빌헬름 푸르트벵글러 (1886 - 1954)
99년 9월 제7호

Wilhelm Furtwängler

글: 김태형

 
베스트 음반 10선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빈 필 (MELODIYA LP)
1944 Mono

베토벤: 교향곡 5번 & 7번
베를린 필 (DG)
1943 Mono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1942), 6번 "전원" (1944),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1943; Aeschbacher 피아노), 교향곡 1번 4악장 (1945), 브루크너: 교향곡 6번 2-4악장 (1943), 7번 아다지오 (1942) 등
베를린 필 (TAHRA 4CD)
1942-1945 Mono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 (1952), 5번 & 6번 "전원" (1954), 슈베르트: 교향곡 9번 "그레이트" (1953), 8번 "미완성" 1악장 (1944), 슈트라우스 "틸 오일렌시필겔의 유쾌한 장난" (1944) 등
베를린 필 (TAHRA 4CD)
1930-1954 Mono


베토벤: 교향곡 9번
Schwarzkopf, Hongen, Hopf, Edelmann, 바이로이트 축제 관현악단 & 합창단 (EMI)
1951 Mono

브람스: 교향곡 1번 (1952), 하이든 주제에의한 변주곡 (1950)
베를린 필 (DG)
1950, 1952 Mono

브람스: 교향곡 1번, 하이든 주제에의한 변주곡
북독일방송 교향악단 (TAHRA)
1951 Mono

브람스: 교향곡 1번 (1952), 2번 (1952), 3번 (1949), 4번 (1948) 등
빈 필, 베를린 필 (EMI)
1947-1954 Mono

바그너: 오페라 "발퀴레"
Modl, Rysanek, Frantz, Suthaus, Klose, Frick, 빈 필 (EMI 3CD)
1954 Mono

슈만: 교향곡 4번,
푸르트벵글러: 교향곡 2번
베를린 필 (DG 2CD)
1953 Mono
 
Wilhelm Furtwangler
젊은 시절의 푸르트벵글러
 
푸르트벵글러의 생애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Wilhelm Furtwangler)는 1886년 1월 25일 베를린에서 베를린 대학 고고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아돌프 푸르트벵글러는 고고학뿐 아니라 그리스의 도자기와 동전등에 조예가 깊었으며 어린 빌헬름을 그리스나 이탈리아 여행에 동반하여 유럽의 여러 예술을 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빌헬름 또한 해외여행때 마다 그 도시의 박물관을 가장 가고 싶어했고 그리스 도자기나 대리석 조각에 많은 애착을 느꼈다한다. 그의 아버지는 빌헬름을 강인한 체력을 가질 수 있도록하는데에도 배려를 아끼지 않아서 알프스 산맥에서의 휴가철에는 수영, 승마, 요트, 테니스등을 아들에게 배우게 했다한다.

부모중 누구도 정식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그의 가족의 음악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그의 아버지 아돌프는 베를린 필의 연주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였고 어머니 아델라는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자주 오페라나 콘서트에 참석했던 빌헬름은 이때부터 음악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간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뮌헨으로 8살때 이주한후에 그의 음악적인 재능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게된 푸르트벵글러의 부모는 그가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고 싶어하는 열정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그의 최초의 스승은 유명한 오르가니스트이자 작곡가 조셉 라인베르거 (Josef Rheinberger)였다. 어린시절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푸르트벵글러는 라인베르거에게서 작곡의 기초를 배우게된다. 지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5세때 지휘자겸 작곡가 막스 폰 실링스 (Max von Schillings)의 제자가 된 후부터였다. 젊은 빌헬름은 실링스의 제자가 된 후에도 작곡공부를 계속하고 있었지만 18세때 실링스의 천거로 뮌헨에서의 한 연주회에서 대리 지휘를 맡게된 후부터 지휘에 큰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게된다. 결국 스승의 후원으로 브레슬라우 (Breslau) 시립가극장의 보조지휘자 자리를 얻게되고 본격적인 지휘 경험을 쌓게된다. 20세가 되던 1906년에는 뮌헨의 카임관현악단을 지휘하면서 마침내 정식 지휘자로 데뷔하게 된다. 그가 택한 데뷔곡이 브루크너의 9번 교향곡이라는 점은 젊은 푸르트벵글러의 높은 도전의식을 시사해준다. 젊은 지휘자의 이름은 빠르게 알려지게 되고 뤼벡(Lubeck), 쮜리히(Zurich), 그리고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등지의 오페라 무대에서 객원지휘에 나서게되어 젊은 시절 그는 주로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경험을 많이 쌓게된다. 25세가 되던 1911년에는 아벤트로트 (Hermann Abendroth, 1883-1956)의 천거로 뤼벡 악우협회 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의 경력의 중요한 시발은 1915년 29세의 나이에 보단스키 (Artur Bodansky)에 이어 만하임 (Mannheim) 오페라와 만하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차지하고부터다. 만하임에서 있은 9월의 데뷔 공연은 베버의 "마탄의 사수"로 시작되었으며 오케스트라와의 첫 콘서트에선 브람스의 교향곡 1번을 지휘한다. 만하임에서의 5년동안 푸르트벵글러는 지휘자로서의 주관을 확립해가면서 비로서 확고한 명성을 쌓기 시작한다. 1918년부터 2년간 빈의 톤퀸스틀러 (Tonkunstler) 오케스트라에서 정기적으로 지휘를 하기도 한다. 1919년 만하임을 떠날즈음에는 그의 지휘자로서의 명성은 급속히 높아져서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지휘자 자리를 맡게되고 이듬해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이어 상임 지휘자 자리에 오르게된다. 베를린 필과는 이미 1917년말에 처음 객원지휘한 적이있었는데 5년후인 1922년 1월 23일에 당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였던 전설적인 니키쉬 (Artur Nikisch)가 죽게되자 푸르트벵글러는 이 거장의 서거를 추모하는 그해 2월 9일의 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과 브람스의 "4개의 엄숙한 노래"를 베를린 필과 연주하게 된다. 이 공연은 너무도 성공적이어서 곧 베를린 필은 만장일치로 후임 지휘자에 푸르트벵글러를 임명하게 된다. 곧 니키쉬의 유언에 따라 니키쉬가 맡고 있던 또하나의 오케스트라인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자리도 푸르트벵글러가 맡게된다. 그의 나이 36세때였다.

독일내의 가장 중요한 두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가 된 푸르트벵글러는 이후 그의 명성이 전 유럽과 미국에 까지 널리 알려지게된다. 1924년 5월의 결혼이후에 이탈리아에서의 데뷔 콘서트는 그의 신혼여행을 겸하게 되었고 같은해 런던에서도 로얄 필하모닉과의 성공적인 데뷔이후 자주 런던으로 초청받게 된다. 으듬해 1월 3일에는 미국 데뷔 콘서트를 뉴욕 카네기 홀에서 갖게되는데 이날의 마지막 프로그램 브람스 교향곡 1번은 청중들뿐만 아니라 단원들까지 감동시켜 뉴욕 필의 상임이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한다. 드디어 1927년에는 빈 필의 상임지휘자가 됨으로써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들의 상임자리에 앉게된다.1928년에는 바그너의 "라인골드"로 빈 국립가극장에도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빈 국립가극장의 상임 지휘자가 되어 줄 것을 제안받은 푸르트벵글러는 정중하게 이를 거절한다. 같은 해에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1930년엔 빈 필의 상임자리도 내놓는다. 이는 그가 비록 베를린과 빈을 오가는 기차여행의 고요한 평화속에서 악보를 볼 수 있었던 것을 즐겼음에도 하나의 오케스트라에 그의 정력과 시간을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데, 물론 그가 선택한 오케스트라는 자신의 이상을 가장 반영해줄 수 있는 베를린 필이었다.

1931년에는 바이로이트 무대에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면서 최초로 서게되며 1933년에는 바이로이트 음악축제의 총감독이된다. 그러나 그의 이런 성공가도에는 바로 그해 히틀러의 나찌가 독일을 통치하게 되면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당시 많은 유태계 음악가들이 독일로부터 추방되자 이를 용납할 수 없는 야만적인 행위임을 안 푸르트벵글러는 모든 자리를 사임하고 오직 베를린 필의 연주에만 임한다. 그는 베를린 필내의 유태계 혈통을 지닌 단원들을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했으며 그의 이런 노력은 약간의 효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예술가가 정치가를 당할 수는 없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순수 아리아인이었기에 히틀러는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1933년 7월에 프로이센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해버린다. 그가 카라얀과 달리 나찌 당원이 아니었음에도 종전후 전범으로 몰리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당시 그는 미국등지로 망명하여 안전하면서도 화려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으나 독일민족에 대한 애국심 때문에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로서 정치와 무관하게 음악가로서 독일에 남아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찌하에 있는 독일보다 베토벤의 음악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 어디있는가?"라는 그의 말이 이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1934년에 그의 인생과 예술을 크게 굴절시키게되는 '힌데미트 사건'이 발생한다. 푸르트벵글러는 힌데미트 (Paul Hindemith)의 신작 오페라 "화가 마티스"의 초연을 베를린 국립가극장에 올리겠다고 발표한다. 힌데미트는 유태인은 아니었지만 유태인들과 공연을 많이 했으며 유태인 아내를 두고 있다는 점, 무엇보다도 1524년에 있은 교회의 억압과 폭정에 들고 일어나는 농민들의 얘기를 다루고 있는 오페라의 줄거리 때문에 공연을 금지한다고 푸르트벵글러에게 통보해온다. 오페라의 메세지가 당시의 나찌 정부가 보기엔 너무 선동적이었던 것이다. 이에 푸르트벵글러는 음악적인 면에서는 자신만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노라고 강하게 맞선다. 이 와중에 "화가 마티스"의 교향곡 버젼의 초연을 1934년 5월 12일 베를린 필과 함께 초연하게 된다. 이날 관중들은 나찌에 대한 반발감을 표출해내기라도 하듯 지휘자에게 열광적인 환호를 보낸다. 그러나 이 사실은 곧 나찌 정부에 알려지고 어떠한 경우에도 오페라 공연은 불가능하다는 방침이 더욱 확고해진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1934년 11월 25일자 "Deutsche Allgemeine Zeitung"지에 기고한 글에서 정치가 예술을 간섭해서는 안된다며 자신의 심정을 자유롭게 피력하고 힌데미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이 글은 이내 전 베를린을 발칵 뒤집어 놓는다. 그날 밤 푸르트벵글러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기 위해 베를린 국립가극장에 등장하자 관객들은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한다. 이 소식은 곧 히틀러의 귀에 들어가게 되고 히틀러의 특별지시로 힌데미트의 오페라는 금지되게 되고 힌데미트는 국립음악학교장의 지위를 버리고 망명해버린다. 푸르트벵글러는 이에 항의하고자 모든 공직에 사임하는 강수를 두는데 그의 예상과는 달리 사임이 받아들여진 것 뿐만 아니라 출국금지조치까지 내려진다.

결국 이듬해 4월에 이르러서는 푸르트벵글러가 나찌에 굴복했다는 기사가 서방세계에 알려진다. 5월달이 되어서는 다시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 자리에 앉게 되고 히틀러와 나찌의 우두머리들의 열광적인 환호앞에서 복귀연주회를 갖는다. 1936년 1월 빈 필과 갖은 부다페스트에서의 공연에서는 나찌에 완벽하게 동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유태인 작곡가 멘델스죤의 곡을 지휘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나 사건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집트의 카이로에 휴가를 보내고 있던 중 뉴욕 필은 토스카니니를 이어 푸르트벵글러를 상임으로 초청할 움직임을 보인다. 뉴욕 타임즈는 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 사실을 보도해버린고 이에 질새라 히틀러 정권은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상임으로 다시 임명했노라고 발표한다. 나일강변에서 이 소식들을 전해들은 푸르트벵글러는 정치적 흥정에 말려들고 싶지 않기에 정치와 음악이 분리될 때까지 뉴욕 필의 지휘를 미룰 수 밖에 없노라고 전보를 친다. 결국 1936년에는 베를린 국립가극장과 바이로이트 축제의 음악감독직도 다시 맡게된다.

푸르트벵글러가 나찌에 굴복했다는 소식은 곧 전 세계에 알려진다. 그 자신은 나찌에 협력할 의사가 없었으나 정치는 그를 철저히 이용하여 선전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1937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만난 토스카니니에게서 그가 지휘한 베토벤 9번는 마치 나찌의 횡포와 같이 강한 리듬과 힘의 과시에 불과하다는 강한 비판의 말을 들어야만 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 와중에는 베를린에서 히틀러 탄생축하 연주를 지휘해야만 했으며 1945년까지 그는 전황속에서도 베를린 필과의 연주를 계속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 1월 22일 연주회 도중 연합국의 공습으로 연주는 중단되고 그는 곧 빈으로 갔다가 스위스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패전에 임박한 나찌의 비밀경찰은 그의 목숨까지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해 5월 7일 베를린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의 점령하에 분할통치된다. 이때 전쟁중에 녹음된 그의 귀중한 연주들은 소련군에 의해 소련으로 건너갔다가 1991년에야 다시 정식으로 독일로 반환된다. 종전후 푸르트벵글러는 전범으로 몰리게된다. 그러나 유태인 음악가들의 구명운동에 힘썼던 그의 노력을 증언해주는 사람들 덕에 1947년 1월 무죄판결을 받고 다시 연주해도 좋다는 연합군의 허가를 받는다. 결국 그해 5월 26일-29일 3일간 미군이 후원하는 베를린 필의 복귀연주회는 베를린 필의 필 하모니홀은 폭격으로 파괴되버렸기 때문에 티타니아 궁에서 열린다. 여기서 그는 북받치는 열정을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 실어 지휘한다. 몇달 사이에 베를린 필과 함께 다양한 연주 스케줄을 가지고 본격적인 지휘활동에 나선다. 또한 새로 재개된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감독을 맡게된다. 재정적자를 메꾸기 위해 스위스, 스웨덴, 오스트리아, 영국 등지를 돌며 해외원정연주를 활발히 가졌는데 이탈리아의 스칼라좌에서까지 오페라를 지휘하기에 이른다. 1948년에는 시카고 심포니가 음악감독으로 그를 초대하지만 미국내에서는 독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시카고 시민들의 반대에 부딧치게 된다. 푸르트벵글러 스스로도 베를린 필에 대한 애정 때문에 정중히 이를 거절한다.

1951년 바이로이트 축제가 다시 재개된다. 푸르트벵글러가 그 개막 공연에서 지휘한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연주는 아직까지도 불후의 명연으로 기억되고 있다. 푸르트벵글러는 종전후 첼리비다케에 넘겨 주었던 베를린 필의 상임자리에 1952년 베를린 필 창립 70주년 되는 해에 다시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66세의 푸르트벵글러는 점점 몸이 세약해져가고 있었다. 폐렴이 도져 건강이 악화되어 있었고 항생제의 남용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갈수록 몸이 수척해져만 갔던 것이다. 1953년에는 빈 필과의 연주중 실신상태에 이르러 잠시 연주활동을 중단해야만 하기도 했다. 결국 1954년 9월 19일 베토벤의 교향곡 1번과 자작 교향곡 2번의 연주를 끝으로 더 이상 지휘대에 설 수 없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요양을 위해 바덴바덴으로 옮겨 갔으나 결국 1954년 11월 30일 68세의 이른 나이에 운명한다. 어느새 종전후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1954년 베를린 필은 미국으로의 첫 연주여행을 계획하게 된다. 물론 푸르트벵글러가 이 연주여행의 지휘자가 되어주기를 기대했지만 1955년 2월 워싱턴에서 있은 베를린 필의 미국 데뷔공연은 만년에 푸르트벵글러가 그렇게 경원시 했던 카라얀이 맡게 된다.

사생활 측면에서 보면 그는 매우 건전한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그는 담배와 술을 하지 않았으며 기본적으로 채식주의자였다. 단원들과는 항상 인간적인 유대를 잃지 않았으며 매우 가정적이기도 했다. 음악이외에는 그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은 없었으며 어린 시절의 취미였던 미술에 흥미를 느낄 뿐이었다고 한다.

Wilhelm Furtwangler
지휘중인 푸르트벵글러
 
푸르트벵글러의 음악
악보의 충실한 재현을 넘어서서 지휘자의 해석에 의해 음악을 재창조해내는 작업을 그 누구보다 훌륭히 해낸 지휘자가 푸르트벵글러였다. 그는 단원들의 생리를 너무도 잘 이해했으며 인간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단원 각자의 자신감을 최대한 끌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원들은 그를 천재적인 존재로 존경했으며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한몸이 되어 콘서트장을 뜨거운 열기로 넘쳐흐르게 만들어갔다.

그의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지휘 모습은 자주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어떻게 저렇게 부정확한 지휘동작에서 저토록 완벽한 음악이 나올까하는 의문을 많이 불러 일으켰다. 그가 다운 비트를 내젖기 전에 12번의 다른 동작이 앞선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혹자는 끊임없는 리허설 덕이라고 했지만 푸르트벵글러 자신의 답에 의하면 바로 그런 애매모호한 지휘동작 때문에 그의 음악은 가능하다고 답하고 있다. 그의 선임 지휘자 니키쉬가 그러했듯이 그도 다른 지휘자들이 끄집어낼 수 없는 소리를 오케스트라로부터 만들어내는 재능을 가졌다. 그것은 바로 그의 복잡한 지휘 동작에서 나온 것이라고 푸르트벵글러는 밝히고 있으며 사소하고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단원들에게 전해질 때 지휘자가 의도한 대로 오케스트라가 완벽히 따라 올 수 있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의 음악의 완성은 끊임없는 리허설 덕이 아니라 그가 지휘자로서 가지는 수준높은 테크닉 덕분인 것이다. 이것은 그의 사후에 숱한 후배 지휘자들이 그와 꼭 같은 템포 꼭 같은 다이나믹을 가지고 그의 연주를 모방하려 했지만 어쩐 일이지 푸르트벵글러가 만들어낸 소리를 만들 수 없었던 이유다. 그의 이런 특이한 지휘법은 처음으로 그의 지휘하에 연주를 갖게되는 오케스트라에서는 간혹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고 한다. 뉴욕 필을 처음 리허설할 때 단원들 일부는 도저히 그의 지시를 따를 수 없다고 투덜거렸으나 몇번의 반복된 연습후 결국 그의 방식을 모든 단원들이 이해했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 교향곡 5번 연주'라는 말은 매니아들 사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전하는 그의 베토벤 교향곡 녹음이 다양할 뿐더러 하나같이 다른 해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종전후 갖은 복귀연주회의 하루사이의 연주가 확연히 다르다. 때때로 그는 메트로놈을 안고 지휘하듯 시계같이 정확한 템포를 유지하기도 했으며 또 어떨때는 끊임 없이 루바토를 쓰면서 음악을 몰고 가기도 했다. 이는 그의 연주에서 변덕스러움이나 근거없는 변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 어떤 지휘자들 보다 관현악곡의 프레이징에 능수능란했으므로 곡의 튼튼한 구조가 또렷히 살아날 수 있었다. 그는 곡의 전체 윤곽을 잡고 거대한 숲을 보여주는 데 누구보다 탁월했으며 대신 세세한 디테일은 그리 신경쓰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는 연주의 즉흥성을 중요시했으며 그의 그런 개성은 실황연주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그의 개성은 무엇보다도 베토벤, 브람스와 같은 독일계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연주할 때 두드러진다. 푸르트벵글러는 베토벤을 연주할 때 베토벤이 자신의 교향곡을 지휘할 때처럼 지극히 과장된 클라이막스와 속삼임과 같은 피아니시모를 요구했다. 푸르트벵글러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지휘자 칼 뵘은 "이제 누가 브람스 교향곡의 파사칼리아를, 누가 브루크너의 아다지오를, 누가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할 것인가"라고 말해서 그의 음악세계를 한마디로 요약해주었다. 푸르트벵글러의 예술에 베토벤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 어느 지휘자들보다 많다. 그가 연주한 베토벤의 홀수번 교향곡들의 완성도에 근접할만한 연주들을 필자는 알지 못한다. 특히 그가 2차 세계대전 중에 남긴 교향곡 3번, 5번, 7번, 9번 연주는 노쇠한 후의 50년대 연주들과 비교해보다라도 뚜렷히 차이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불타오르는 정열과 힘을 느낄 수 있는 연주들이다. 일본의 평론가들의 글을 번역한 국내 단행본등에서 푸르트벵글러의 50년대 스튜디오 녹음들을 추천한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필자는 이를 매우 염려하고 있다. 그의 연주의 본령은 바로 그의 전쟁중 녹음들이며 그의 40년대 연주들을 듣지 않고 말년의 스튜디오 녹음으로 푸르트벵글러를 평가한다면 큰 오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꼽은 베스트 음반에 브람스의 교향곡 1번만 세가지가 실려있듯이 베토벤 다음으로 푸르트벵글러의 음악에게서 중요한 작곡가는 단연 브람스다. 브람스의 교향곡 중에서도 1번은 그의 평생의 장기였다. 무시무시한 포르테와 부드러운 피아노가 마술처럼 뒤섞인 1952년 베를린 필과의 연주 (DG)를 최고로 꼽고 싶지만 지금은 절판된 상태다. 그러나 1951년의 북독일 방송교향악단의 연주 (TAHRA)를 대안으로 삼을만하다. EMI의 3장 세트에 수록된 빈 필과의 브람스 1번은, 그러나,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세트에서는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어 내듯 활활 타오르는 2번 교향곡과 애절한 1악장과 질주하듯 몰아치는 파사칼리아의 4악장을 들을 수 있는 4번 교향곡이 불후의 명연이다.

이미 푸르트벵글러의 베토벤과 브람스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그의 음악의 마술에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어진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한 다른 독일 작곡가의 곡들은 전쟁중 녹음으로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1악장이 특기할만하고 교향곡 9번 "그레이트"의 경우 다양한 녹음이 전하지만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울림이 가장 잘 살아있는 TAHRA음반을 꼽고 싶다. 그의 브루크너도 빼놓을 수 없겠다. 특히 그의 장기는 7번 교향곡이었으나 베토벤이나 브람스 연주에서와 같은 무게감은 요훔과 같은 후배 지휘자들이 쌓아놓은 업적에 비하면 조금 빈약하다. 또한 근래에는 음반 역시 구하기 힘든 상태다. 그가 지휘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들도 카라얀과 같은 다듬어진 연주들에서는 찾을 수 없는 폭발하는 힘을 발견할 수 있다.

푸르트벵글러는 베토벤과 브람스 이외의 작곡가의 곡을 연주할 때는 지휘 스타일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것이 말년의 녹음들만 전하기 때문인지 어떤지는 정확지 않으나 슈만이나 하이든의 연주에서는 곡의 건축미를 최대한 살리면서 천의무봉과도 같이 어느 곳 하나 빈틈없이 탄탄한 음악을 만들어낸다. 이런 해석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나 "발퀴레"와 같은 말년의 바그너의 오페라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독일의 작곡자외에도 프랑크나 차이콥스키와 같은 지휘자의 교향곡들도 뛰어나지만 진정한 그의 음악의 본령은 베토벤과 브람스였다는 점에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금년 말이면 각 음반사들마다 CD보다 월등히 뛰어난 음질을 들려줄 수 있는 DVD 타이틀들을 발매할 계획이라는 소식이 전해온다.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필자의 머리에는 '푸르트벵글러의 연주들을 어서 DVD로 들을 수 있어야할텐데...'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푸르트벵글러가 존재했기에 우리의 음악생활이 몇배 더 풍부해졌다는 사실이 해가 갈수록 더욱 절실히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글쓴날짜: 1999/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