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피아니스트의 정치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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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다시 불러온 것은 오로지 나의 예술이었다. 아아, 나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불러내기 전에 이 세계를 떠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테다. 그래서 나는 이 비참한 생존을 견디고 있다. …… 신성한 존재여, 당신은 나의 가장 내면에 있는 영혼을 보고 계십니다. 당신은 그 속에 인류에 대한 사랑과 선해지려는 욕구를 알고 계시지요. 아아, 동료 인간들이여. 언젠가 그대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그대들이 나를 부당하게 대우했다고 생각해주십시오. 불운을 당한 사람은 자기 경우와 비슷한 일을 누군가가 겪었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겠지요. 저는 천성으로 타고난 한계가 수없이 많지만 그래도 힘이 닿는 한 가치 있는 예술가와 인간들 사이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1)

1936년 5월 27일 베를린2)에서 한 여인이 이 글을 낭독하고 있다.3) 후대에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로 잘 알려진 베토벤의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을 죽음으로 내모는 고통과 불안에 맞서 싸우는 “영웅으로서의 예술가”로 스스로를 변모시키고 있다.4) 이 글을 읽는 저 인물은 그러한 베토벤의 영웅적 면모를 칭송하면서 그 역시 베토벤처럼 예술을 통해 완성시키고자 하는 자신의 도덕적 사명을 주장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이 인물이 추구하는 영웅적 면모와 내면의 “인류에 대한 사랑”과 “선해지려는 욕구”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오늘날 거의 잊혀진 독일의 피아니스트 엘리 나이(Elly Ney, 1882-1968)는 현대인이 어두운 과거로 기억하는 나치 시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비단 한 개인의 인생만이 아니라 독일이라는 국가 역시 당시 찰나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1936년 3월 독일은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를 무혈점령했고 히틀러는 이에 대한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냈다.5) 이 해 8월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있던 베를린은 전 세계에 게르만 민족국가의 위상을 드높일 준비로 한창이었다. 1932년 공황이 최저점을 통과한 이래 1937년에는 “일과 빵”이라는 구호 아래 거대 군수산업과 공공근로를 기반으로 한 완전고용을 달성했다.6)   
  1937년 4월 1일 나치당원이 된 엘리 나이는 같은 달 20일 히틀러의 생일을 맞아 교수 직위를 얻었고 독일소녀단(Bund Deutscher Madel)의 명예회원이 되었다.7) 그녀는 히틀러 청소년단(Hitler Jugend)8), 독일노동전선(Deutsche Arbeitsfront)9) 산하의 노동자들, 무장친위대(Waffen-SS)를 위한 연주회 등 나치 선전 활동을 위한 무대에 적극적으로 봉사했다.10) 이렇듯 정권에 충성한 그녀는 베를린 음악계에서 “제국 피아노계의 대모”라는 비아냥 섞인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11)  
  이때 그녀가 주로 연주한 곡은 당시 바그너와 함께 게르만 민족과 그 예술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베토벤의 작품이었다. 이미 바이마르 시대의 다양한 정치적 노선 속에서 베토벤은 순수한 예술가가 아닌 각각의 이념을 대변한 전령으로 탈바꿈했다. 한편에서는 베토벤의 음악이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였지만 그 반대편에서는 패전의 멍에에서 게르만 민족을 구원해 줄 위대한 영웅적 정신이었다. 특히 이 시기 나치당(NSDAP)은 베토벤을 아리안 혈통으로 미화하는 한편 그의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왜곡하여 권위주의적 인물로 전복시켰다.12) 히틀러 집권 이후 베토벤은 민족사회주의국가에 있어서 게르만 예술의 뿌리 깊은 전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주요한 문화적 선전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베토벤의 예술적 성취와 영웅성이 나치당의 선전에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는 1938년 '히틀러 청소년단을 위한 베토벤 축제'에서 연설한 엘리 나이의 다음과 같은 개회사에서 잘 나타난다.
 
"히틀러 청소년단에게 베토벤을! 생동하는 독일 젊은이들이여, 여러분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서 아름다움과 진실, 영웅적 면모에 대한 욕구가 깨어나 행동을 촉구합니다. 독일 음악가로 참여하여 베토벤에 한 발짝 다가가게 함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이 위대한 독일 작곡가의 작품이 영혼을 흔듭니다. 힘과 위력의 위협 속에서도 그는 예술로써 극복하며 … 영웅주의는 게르만 예술의 본질이며 모든 음조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스러운 불꽃은 청년들의 가슴을 타오르게 하고 책임감을 일깨우며, 투쟁 속에서 힘을 주고, 고통 속에서도 위안을 줍니다. 이리 다가오십시오, 독일 젊은이들이여! 일상의 걱정들은 내려놓으세요! 오늘날의 우리 자신은 민족의 충만한 힘에 내맡기고자 합니다. 이로부터 우리 지도자의 공헌이 위대하고도 훤히 일어나길!13)"

이 연설에서 자신의 운명을 딛고 일어선 베토벤의 영웅적 면모는 게르만 민족의 지도자 히틀러의 영웅적 면모와 일치되었으며, 앞서 말한 음악을 통해 완성시키고자 하는 '도덕적 사명'은 지도자에 대한 충성으로 탈바꿈했다.14)   
  이러한 정치적인 발언은 단지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정말 그녀의 내면에서 베토벤에 대한 존경과 히틀러에 대한 흠모가 일체화된 것일까. 당시에 남긴 연주와 육성을 지금 이 순간에 듣고 감동을 받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엘리 나이에게 나치시대의 전성기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만으로 이룩한 것이 아니며 철저히 정권에 의탁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이는 분명 그 시대가 부여한 태생적 한계였다. 굳이 망명할 이유가 없었던 어느 누구도 그 환경 안에서 나치 정권에 동조하지 않고서는 음악가로서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15) 비록 푸르트벵글러처럼 자신이 “나치의 선전에 이용되리라는 걱정보다는 독일 음악을 최대한 보존하고 독일인들을 위해 독일 음악가들과 계속 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앞섰다고”16) 해도 그러한 음악활동은 결국 나치 정권 유지와 선전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엘리 나이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나치 협력은 단순한 수단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음악은 단지 입신을 위한 방편이었을까. 이럴 경우 베토벤에 대한 그녀의 예술성은 모조리 사장돼버리는 것일까.
  그러나 그녀에게 베토벤은 평생의 예술적 목표였다. 10세에 쾰른 음악원의 마스터클래스에 들어간 음악신동 나이는 이후 빈에서 리스트(Franz Liszt)의 제자인 에밀 폰 자우어(Emil von Sauer)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피아노 교육자인 레셰티츠키(Theodor Leschetizky, 1830-1915)에게 사사하였다. 베토벤, 체르니, 레셰티츠키로 이어지는 피아니스트의 계보(비록 수많은 이들 중 하나이지만) 속에서 그녀는 일찍이 베토벤 연주에 두각을 나타냈다.17) 나이는 1927년 베토벤의 고향이면서 동시에 그녀가 성장했던 본(Bonn)의 명예시민으로 추대되었으며, 그곳에서 1931년 '대중적인'(volkstumliche) 베토벤 기념일을 마련하여 오늘날까지 매년 이어져 오는 현대적인 차원의 베토벤축제(Beethovenfest)를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18) 전후에는 자선콘서트를 통해 폭격으로 파괴된 본의 베토벤홀(Beethovenhalle)을 재건하기 위해 힘썼다. 그 무엇보다 그녀는 베토벤 음악을 예술적 목표로 삼았고 죽기 전 마지막 리사이틀에서까지 베토벤을 연주했다. 만년인 1965년에는 역시 만년의 베토벤이 사용하여 현재 본의 베토벤하우스에 소장된 그라프 피아노(Graf-Flugel)19)로 유일무이한 녹음을 남겼다.20) 그녀는 평생을 베토벤의 여사제로 살았다.
  그러한 삶의 모습은 아무리 나치 시대라고 하더라도 베토벤의 음악을 단지 자신의 출세 수단으로 삼은 것은 아님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있어서 나치 시대의 정치적인 지향이 예술적 가치와 어떻게 양립할 수 있었을까.
  다시 맨 처음 그녀가 낭독했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로 돌아가 보자. 여기서 베토벤은 음악가로서의 생명을 위협하는 청각 장애와 세상의 험악한 풍문을 극복하고 “운명의 목덜미를 움켜쥔”21) 예술적 영웅으로 거듭나고자 한다. 만약 이러한 의지적인 삶이 누군가에게 칼라일(Thomas Carlyle)이 말하는 영웅의 모습으로 보인다면, 역사적 전개과정을 영웅들의 행동에 귀속시킨 그의 영웅숭배론을 기초로 나치즘의 대두 과정을 설명하는 카시러(Ernst Cassirer)22)의 도식에 따라 정치적 신화와 예술적 영웅의 결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카시러는 당시 대두하던 나치즘이라는 정치적 신화를 칼라일의 영웅숭배론, 고비노(Joseph-Arthur Gobineau)의 인종불평등론, 헤겔의 국가론을 통해 설명한다. 앞서 이미 나치의 선전정책에서 베토벤의 영웅적 면모가 부각된 점을 살펴보았다. 칼라일은 역사적 생활 전체를 위인 혹은 영웅들의 생활과 동일시하였고 필연적인 영웅의 출현과 그 영도력에 근거하여 역사적 발전 과정을 설명한다.23) 그것이 나치즘의 대두와 히틀러의 집권을 설명함과 동시에 합리화하는 기제가 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개인에 앞서는 '민족공동체'의 강조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숭배'를 종합하는 나치당의 선전정책24)이 히틀러라는 민족적 영웅을 집권 초기에 이미 빚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 나이는 히틀러가 집권할 무렵인 1933년에 이미 그의 라디오 연설을 듣고 마음이 사로잡혔다. “45분간의 연설은 얼마나 힘에 넘치는가. 깊이 전해오는 영혼의 불꽃같은 진실이여. 히틀러는 영혼으로부터 예술적으로 말하며 … 무엇보다 발음은 얼마나 정확한가.”25)
  히틀러를 위해 따로 연주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혔던 그녀는 1933년 5월 동료 '게르만' 피아니스트인 빌헬름 바크하우스(Wilhelm Backhaus)가 히틀러의 초대를 받자 실망과 질투심을 감추지 못했다.26)
  칼라일의 영웅 숭배론이 위대한 개인에 의한 역사의 전개라면 고비노의 인종 숭배론은 전체주의적인 고귀한 인종에 의한 역사이다. 역설적이게도 고비노의 이론의 전체주의적 속성은 분리와 분할을 지향한다.27) 즉 다른 인종과의 분리, 혈통의 순수성만이 인류의 쇠퇴를 막을 수 있는 것이다. “인종이 역사적 세계의 유일한 주인이며 지배자”라고 한 고비노의 인종이론은 전체주의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내는 데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28) 고비노는 아리안 인종이라는 유일한 가치관이 다른 모든 가치관을 넘어서는 절대적 이념이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측면은 나치즘의 인종주의로 이어지며, 역시 엘리 나이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과 상통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나치당은 베토벤의 음악을 순수한 게르만 인종의 가치로 환원시켰다고 볼 수 있다.
  엘리 나이의 반유대주의는 이미 어릴 적부터 형성되었다. 후에 스스로 고백했듯이 유대인이었던 쾰른 음악원의 교수 이지도르 자이스(Isidor Seiss)를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어린 나이에 이미 싫어했다.29) 그녀에게 이렇게 일찍부터 반유대주의가 형성된 원인이 제2제국의 “소부르주아 군인 가정의 편협성”에 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30)
  1933년 5월 브람스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고향인 함부르크에서 열리는 음악회에서 유대인 피아니스트인 루돌프 제르킨(Rudolf Serkin)의 연주가 일방적으로 취소되고31) 엘리 나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하지만 나이는 자신이 유대인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이유로 불쾌함을 드러냈다.32) 그렇지만 이후 1936년 유대인 음악가에게 베토벤을 비롯한 '게르만' 음악가의 작품 연주가 금지되고 뒤이어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추방됨으로써 음악가로서의 경쟁은 한결 수월해졌고 따라서 보다 쉽게 음악적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카시러는 “인륜성의 체계”로서의 국가론을 주장하는 헤겔의 국가절대주의를 언급한다. 힘의 원리에 기초한 국가의 이념은 현실에서 실제성을 띠어야 하며 그것이 이성적인 것이다. 비록 현대의 전체주의적 체계의 특징인 우상화와는 차이가 있지만 헤겔의 국가 권력의 이상화는 신성화로 나아갈 수 있으며 국가의 진리, 즉 “권력에 깃든 진리”가 파시즘의 강령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33)
  이제 나치즘은 국가적 신화의 창조과정에서 새로운 의식을 도입하지만34) 그러한 (소위 벤야민이 말하는) “정치의 심미화”는 기존의 문화에 기생하는 이데올로기적 혼합물에 불과하다.35) 기존의 베토벤과 바그너의 음악은 게르만 민족의 이념 전달체가 되며 예술은 곧 정치가 된다. 바야흐로 나치즘 속에서 베토벤과 같은 예술적 영웅은 동시에 정치적 아이콘이 된 것이다. 이로써 나치즘 체제에 동화된 예술가에게 예술행위와 정치선전의 구분은 사라진다. 엘리 나이는 1935년 본의 베토벤축제 개막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겐 모든 언행이 흔들림 없는 신념의 표상인 지도자가 있습니다.”36) 그 지도자는 베토벤이 되기도 하며 히틀러가 되기도 한다.

1945년 5월 독일이 패망하고 얄타회담과 포츠담회담 결과에 따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이 네 연합국이 독일에 대한 분할점령에 들어갔다. 점령통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 중 하나였던 독일인에 대한 탈나치화(denazification)는 점령지역마다 상이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37) 그중 가장 적극적으로 탈나치화 정책을 추진한 미군정은 자의적인 판별과 과도한 숙청에 대한 반발, 숙청으로 인한 인적 손실과 뒤따른 업무 지연으로 인한 행정적・경제적 기능의 마비38) 등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탈나치화 업무를 독일인들에게 대폭 위임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1946년 3월 5일 '나치청산법'이 공포된 후 4월에는 미군정 정보통제국(ICD) 산하의 정보부(Intelligence Branch)에서 엘리 나이를 비롯한 나치에 협력한 상당수의 음악가들이 포함된 블랙리스트를 발표하며39) 정책노선의 변화를 경계했지만 1947년 4월 말 푸르트벵글러의 사면을 기점으로 다른 음악가들의 점차적인 사면과 복권은 불가피해졌다.40) 하지만 엘리 나이는 1952년이 되어서야 사면을 받게 된다. 나이는 1952년 4월 말 정치적 선전 정책에 음악을 적극 활용했던 동독에서 먼저 공식적인 연주 허가를 받은41) 이후 5월 20일 본에서 마침내 사면을 받았다.42)
  종전 이후 탈나치화 과정에서 나치에 협력했던 예술가들 대다수는 자신의 정치적 순진함(political naivete)에 호소했으며 엘리 나이 역시 마찬가지였다.43) 푸르트벵글러는 '독일 음악의 수호'라는 자신의 예술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권력을 필요로 했음에도44) 예술과 정치가 분리될 수 있다는 환상을 끝내 버릴 수 없었다.45) 그렇다면 예술은 결코 순수하지 않으며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인가? 이는 비록 예술작품이 내적 완결성을 가지고 존재할지라도 그것을 수용하고 향유하며 평가하는 맥락에 의해 의미가 변화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에 따라 예술적 주체인 예술가 역시 순수한 예술행위를 둘러싼 외적 환경에 의해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획득함을 의미한다. 특히 다른 예술과 대비되는 음악의 텍스트로서의 특징은 컨텍스트와의 관계를 심화시킨다.
  음악은, 기보된 텍스트로서의 음악과 그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소리로 해석됨으로써 조형적 형식을 구현하는 작품으로서의 음악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이룬다.46) 하지만 끊임없이 연주되고 재생되는 음악작품은 그 자체로 텍스트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시간 속에서 완결된 음악작품은 그것이 연주되는 공간과 맥락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즉 작곡가가 남긴 악보를 연주자가 해석함으로써 텍스트로서의 일차적인 의미를 획득하면서 음악작품으로 완결됨과 동시에 그 작품은 그것이 연주되고 청취되는 환경에 따라 새로운 차원의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다.
  베토벤이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를 통해 인류애의 메시지를 담은 제9번 교향곡 [합창]은 항상 악보 그대로 재현되지 않았다. 1942년 4월 19일 히틀러의 생일축하 공연에서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한 이 곡은 해석자・연주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치의 선전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47) 한편 앤서니 버지스의 소설 『시계태엽 오렌지』의 주인공 알렉스의 경우처럼 이 곡은 범죄적 희열을 돋우는 음악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반면 냉전의 붕괴 속에서 자유의 축가로서 연주되기도 했으며48), 베토벤이 뜻한 바대로 평화를 염원하는 메시지 자체가 되기도 한다.49)
  음악은 어디로든 퍼지며 누구나 자유롭게 마시는 공기와 같다. 이 말은 음악이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그저 들리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일 수 있음을 뜻한다. 음악은 모든 맥락과 결부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으로부터 유리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음악이라는 예술의 불멸성은 현세의 끊임없는 재생(연주)과 음악 체계의 존속에 달려있다.50)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오늘날 레코딩과 음반이라는 수단과 매체를 통해 과거의 연주자는 끊임없이  되살아나 연주라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를 통해 엘리 나이가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낭독하던 1936년 5월 베를린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 때 같이 녹음한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op. 111)의 '작은 노래(Arietta)'라는 소박한 이름으로 전하는 마지막 2악장을 재생시킨다. 이 순간 음악을 둘러싼 모든 배경은 사라지고 없으며 오직 연주자와 청자만 남을 따름이다. 음악은 “듣기 좋은 공기”처럼 자유롭게 떠돌아다닌다. 결국 이 '작은 노래'를 들으면서 한 인간이 가진 다면성 가운데 베토벤 연주에서 놀라운 재능과 감동을 드러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치즘이니 반유대주의니 하는 것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진다. 이것이 모든 것을 포섭하면서 동시에 해방시킬 수 있는, 자유로운 음악이 지니는 놀랍고도 무서운 힘이다.
  2008년 9월 17일 본의 베토벤축제 가운데 의미 있는 공연이 열렸다. ‘순응과 저항’(Conformity & Resistance)이라는 제목을 단 이 공연에서 엘리 나이, 그리고 그녀와 함께 당대에 뛰어난 베토벤 연주자로 알려졌던 한 인물을 조명했다.51) 카를로베르트 크라이텐(Karlrobert Kreiten, 1916-1943)이라는 이름의 이 피아니스트는 당시 젊은 나이에 이미 천재적인 연주자로 부각되었지만 나치와 히틀러에 대한 반감이 당국에 발각되어 결국 총살  당했다. 두 사람 모두 (시기는 다소 차이가 나지만) 본이라는 같은 성장환경과 베토벤 음악에 대한 사랑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지만 체제에 대한 '순응'과 '저항'은 이렇듯 이들의 인생을 엇갈리게 만들었다.
  또 다른 인물이 있다. 영국의 피아니스트 마이라 헤스(Dame Myra Hess, 1890-1965) 역시 독일 음악에 대한 뛰어난 해석으로 동시대에 이름 높았다. 1939년 이후 런던은 독일군의 폭격으로 모든 문화 행사가 전면 중단되었지만 그녀는 미술품이 옮겨져 텅 빈 내셔널 갤러리에서 매일같이(주 5일) 1700회에 가까운 연주회를 열어 음악을 통해 런던시민들에게 위안을 주었고 힘을 북돋아줬다.52) 1946년까지 계속된 이 '점심 연주회'를 통해 그녀는 음악이 지닌 정서적인 힘을 새삼 일깨워주었고 음악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 세 인물의 공통된 음악에 대한 재능과 애정은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통해 드러났고 서로 다른 인생의 결말을 보여줬으며 모두 다른 평가로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이는 음악이 순수하다는 환상을 깨뜨리기에 충분한 역사적 증거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 순수한 감정을 느끼고 이를 경험으로 간직한다. 이는 분명 음악의 모순된 양면성이 아니라 다중성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느 피아니스트의 정치적인 삶이 드러내는 것은 공적인 연주와 사적인 체험, 사적인 연주와 공적인 체험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음악의 자유로운 침범(transgression)53)이다. 이는 다른 말로 음악의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사회적인 기능이며, 한편으로 엘리 나이의 연주를 들으면서 순수한 감동을 받는 어떤 이의 사적인 변명이다.


주석

1) Solomon, Maynard, 김병화 옮김, 『루트비히 판 베토벤 1』, 한길아트, 2006, p. 292. 인용자가 일부 수정.
2) Hunt, John, Pianists For The Connoisseur: 6 Discographies of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Alfred Cortot, Alexis Weissenberg, Clifford Curzon, Solomon, Elly Ney, London: John Hunt, 2002, p. 316.
3) 당시의 육성이 담긴 레코딩은 2005년 일본 Toshiba-EMI를 통해 복각된 음반(TOCE-15037)을 포함해 모두 4종이다(78회전 포함).
4) Solomon, p. 300.
5) Kitchen, Martin, 유정희 옮김, 『케임브리지 독일사』, 시공사, 2001, p. 314.
6) 비록 그것이 인플레이션에 의해 조성된 경제붐이라는 착시현상이었을지라도 분명 나치 체제 하의 독일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유지하기 위한 기만적인 선전의 결과이기도 했다. Peukert, Detlev, 김학이 옮김, 『나치 시대의 일상사』, 개마고원, 2003, pp. 77-100 참고.
7) Schad, Martha, Sie liebten den Fuhrer: Wie Frauen Hitler verehrten, Munchen: Herbig, 2009, pp. 189-190.
8) 나치당의 청소년 조직.
9) 1933년 5월 2일, 나치당 조직국장 로베르트 라이(Robert Ley)가 나치 노동정책에 따라 다양한 노선의 노동조합을 분쇄하여 단일화된 독일노동전선을 만들었다. Broszat, Martin, 김학이 옮김, 『히틀러 국가』, 문학과지성사, 2011, pp. 202-5 참고.
10) Kater, Michael H., The Twisted Muse: Musicians and Their Music in the Third Reich,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p. 31.
11) Haffner, Herbert, 이기숙 옮김, 『푸르트벵글러』, 마티, 2007, p. 268.
12) Dennis, David B., Beethoven in German Politics, 1870-1989,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6, pp. 133-141.
13) Ibid, pp. 155-156.
14) 또한 이 축제에서 소녀들에게 가정에서의 순종과 의무, 모성을 가르쳤던 독일소녀연맹에 있어서 감옥에 갇힌 남편을 구출하는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의 여주인공 레오노레는 그런 여성성의 이상적 모델로 칭송되었다.  Dennis, p. 156.
15) 엘리 나이만큼 적극적이지 않았더라도 빌헬름 바크하우스(Wilhelm Backhaus, 1884-1969), 빌헬름 켐프(Wilhelm Kempff, 1895-1991), 발터 기제킹(Walter Gieseking, 1895-1956) 등과 같은 당대의 유명한 '게르만' 피아니스트들은 모두 나치에 협력하면서 음악 활동을 했다.
16) Haffner, p. 480.
17) 베토벤의 계보를 잇는 레셰티츠키 문하라고 하지만 당대의 유행에 따라 이들은 베토벤 이후의 작품을 다루는 낭만파 피아니스트가 주를 이루었다. Schonberg, C., Harold, 윤미재 옮김, 『위대한 피아니스트』, 나남, 2008, p. 388.
18) http://en.beethovenfest.de/chronologie
19) 이 피아노는 베토벤의 만년, 비엔나의 피아노 제조업자 그라프(Conrad Graf)가 대여해 준 것으로 그의 방에는 브로드우드제와 이 피아노 두 대가 마주 보게 놓여 있었다고 한다. 만년에 들리지 않는 그의 청각을 감안하여 모든 음이 연주자에게 크게 들리도록 특별히 설계되었다. 현재 본의 베토벤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피아노는 베토벤의 사후 그라프 피아노사에서 찾아갔고, 그 뒤에 리스트의 소유가 되었다가 본의 베토벤박물관 개관(1889)과 함께 박물관에 기증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백기풍 외, 『베토벤 32 피아노 소나타 전곡 분석과 연주법』, 작은우리, 1998, p. 43 참고.
20) 뉘른베르크(Nurnberg)의 콜로세움(Colloseum) 레이블을 통해 녹음했다(음반번호: COL9013.2). Hunt의 디스코그래피에는 녹음 장소가 뉘른베르크로 잘못 표기돼 있다. 참고로 유일한 녹음이라는 건 음반에 나타난 설명이다. 1970년 베토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서 오스트리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외르크 데무스(Jorg Demus)가 남긴 실황 연주가 전해진다.
21) Solomon, p. 286.
22) 칼라일의 『영웅의 역사』의 역자는 해제에서 카시러의 『국가의 신화』를 칼라일에 대한 왜곡의 대표적인 답습으로 꼽고 있다. 하지만 역자가 스스로 말했듯이 칼라일의 ‘영웅숭배’ 사상이 20세기에 들어 나치즘과 파시즘의 뿌리로 왜곡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약 20년 동안 서유럽에서 ‘총통숭배’와 동일시되는 경향을 보였다”면, 그 왜곡된 양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1940년대 초에 씌어진 『국가의 신화』(출판: 1946)는 언급할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을 것이다. Carlyle, Thomas, 박상익 옮김, 『영웅의 역사』, 소나무, 1997, pp. 9-10 참조.
23) Cassier, Ernst, 최명관 옮김, 『국가의 신화』, 서광사, 1988, pp. 238-239.
24) Welsh, David, A., 최용찬 옮김, 『독일 제3제국의 선전정책』, 혜안, 2001, p. 35.
25) Schad, p. 188.
26) Kater, p. 33. 이 책을 인용한 Schad의 책에는 1935년으로 잘못 표기돼 있다. Schad, p. 188 참조.
27) Cassirer, p. 298.
28) Cassirer, p. 285.
29) Schad, p. 186.
30) Kater, p. 31.    나치정권 수립의 실마리를 제2제국에서 찾고 있는 독일의 역사학자 한스-울리히 벨러(Hans-Ulrich Wehler)는 먼저 군주정의 국왕으로부터 가정의 아버지에까지 이어지는 당시의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적 사회구조를 언급하고 있다. 더 나아가 당시 각 군인의 가정 안뿐만 아니라 병영 밖에까지 영향을 미친 제2제국에서의 군대의 사회적 성격을 '소부르주아적 신념의 군국주의'라고 규정한다. 만기제대병의 경우 전역 후에도 독일전사연맹(Deutscher Kriegerbund)과 같은 조직화된 단체를 통해 결집되었으며 이들이 호전적이고 반(反)사회민주주의적이며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언급한다. Wehler, Hans-Ulrich, 이대헌 옮김, 『독일 제2제국』, 신서원, 1996, pp. 217, 280-1 참고.    실제로 엘리 나이는 1882년 뒤셀도르프의 제 2제국의 직업군인인 아버지와 음악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사실만으로 이를 단정 짓기는 힘들지만 당시 반유대주의적인 시대 배경을 짐작할 수는 있다.
31) 1933년 1월 30일 나치가 정권을 획득하고 히틀러가 제국총리로 임명되면서 반유대인 정서와 정책이 더욱 기승하게 된다. 제르킨은 2월 무렵 이미 (음악적 동반자이면서 자신의 장인이 될) 아돌프 부슈(Adolf Busch)와 함께 브람스 축제에 초청을 받았지만 히틀러가 후원하는 이 행사에 참여하고자한 나치당원인 바이올리니스트 구스타프 하베만(Gustav Havemann)이 유대인 초청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제르킨의 초청이 취소되었다. 유대인은 아니지만 반유대인 정서에 위협과 괴로움을 느낀 부슈와 그의 사중주단 역시 공연을 취소했다. 대신 하베만과 그의 사중주단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Lehmann, Stephen ; Faber, Marion, Rudolf Serkin: A Lif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p. 70-71 참고.
32) Schad, p. 187.
33) Cassirer, pp. 324, 334.
34) Ibid, p. 343.
35) Feukert, pp. 284-285.
36) Schad, p. 188.
37) 특히 정치적 중요성으로 인해 4개 구역으로 공동 분할된 베를린의 경우 정책적 상이함에 따른 혼란이 더욱 컸다.
38) 이진모, 「전후 독일의 탈나치화와 과거청산 - 성과와 한계(1945-1950)」, 『독일연구 제5호』, 1999, p. 68.
39) Thacker, Toby, Music after Hitler, 1945-1955, Aldershot: Ashgate, 2007, pp. 51-2.
40) 이는 특히 냉전체제의 구축에 따른 3개 점령지의 통합 등의 과정에서 탈나치화 작업이 점차 중요성을 잃어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41) Thacker, p. 203.
42) New York Times, 1952, 05. 21일자 기사.
43) Monod, David, Settling Scores: German Music, Denazification, and the Americans, 1945-1953,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5, p. 53.
44) Haffner, p. 479.
45) Ibid, p. 635.
46) Dalhaus, Carl, 조영주・주동률 옮김, 『음악미학』, 이론과실천, 1987, pp. 22-23.
47) 선전부 장관 괴벨스는 연주 전 연설에서 이 곡을 통해 “지도자에 대한 복종심을 고양시키며, 고난의 숭고함을 깨닫고, 독일민족에게 있어 위대한 역사적 순간을 함께 하는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했다. Dennis, p. 168 ; Haffner, p. 425.
48) 레너드 번스타인은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기념하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4개 추축국과 동독의 오케스트라를 연합하여 '자유의 송가(Ode an die Friheit)'라는 제목으로 이 곡을 공연했다.
49)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는 2012년 8월 15일 지금까지 분단 상태에 있는 한국의 판문점에서 이 곡을 연주했다.
50) Burckhardt, Jakob, 이상신 옮김, 『세계사적 성찰』, 신서원, 2010, p. 343.
51) http://en.beethovenfest.de/programm/annette-k-banse/37
52) 자세한 사항은 다음 웹사이트 참고. www.nationalgallery.org.uk/paintings/history/myra-hess-concerts/
53) Said, Edward, 박홍규・최유준 옮김, 『음악은 사회적이다』, 이다미디어, 2007, p. 115.



참고 문헌 및 자료

Broszat, Martin, 김학이 옮김, 『히틀러 국가』, 문학과지성사, 2011.
Burckhardt, Jakob, 이상신 옮김, 『세계사적 성찰』, 신서원, 2010.
Carlyle, Thomas, 박상익 옮김, 『영웅의 역사』, 소나무, 1997.
Cassier, Ernst, 최명관 옮김, 『국가의 신화』, 서광사, 1988.
Dalhaus, Carl, 조영주・주동률 옮김, 『음악미학』, 이론과실천, 1987.
Dennis, David B., Beethoven in German Politics, 1870-1989,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96.
Haffner, Herbert, 이기숙 옮김, 『푸르트벵글러』, 마티, 2007.
Hunt, John, Pianists For The Connoisseur: 6 Discographies of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Alfred Cortot, Alexis Weissenberg, Clifford Curzon, Solomon, Elly Ney, London: John Hunt, 2002.
Kater, Michael H., The Twisted Muse: Musicians and Their Music in the Third Reich,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Kitchen, Martin, 유정희 옮김, 『케임브리지 독일사』, 시공사, 2001.
Monod, David, Settling Scores: German Music, Denazification, and the Americans, 1945-1953,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5.
Lehmann, Stephen ; Faber, Marion, Rudolf Serkin: A Life,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2.
Peukert, Detlev, 김학이 옮김, 『나치 시대의 일상사』, 개마고원, 2003.
Said, Edward, 박홍규・최유준 옮김, 『음악은 사회적이다』, 이다미디어, 2007.
Schad, Martha, Sie liebten den Fuhrer: Wie Frauen Hitler verehrten, Munchen: Herbig, 2009.
Schonberg, C., Harold, 윤미재 옮김, 『위대한 피아니스트』, 나남, 2008.
Solomon, Maynard, 김병화 옮김, 『루트비히 판 베토벤 1』, 한길아트, 2006.
Thacker, Toby, Music after Hitler, 1945-1955, Aldershot: Ashgate, 2007.
Wehler, Hans-Ulrich, 이대헌 옮김, 『독일 제2제국』, 신서원, 1996.
Welsh, David, A., 최용찬 옮김, 『독일 제3제국의 선전정책』, 혜안, 2001.
백기풍 외, 『베토벤 32 피아노 소나타 전곡 분석과 연주법』, 작은우리, 1998.
이진모, 「전후 독일의 탈나치화와 과거청산 - 성과와 한계(1945-1950)」, 『독일연구 제5호』, 1999.
New York Times, 1952, 05. 21일자 기사.
http://en.beethovenfest.de/chronologie
http://en.beethovenfest.de/programm/annette-k-banse/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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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14/11/02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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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03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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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03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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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

본문 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요구하는 논문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기희생이라는 표현은 독재자들의 자질인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동남아시아.아프리카의 많은 지도자들도 그렇지 아니한가요!
차라리 러시아 인테리겐챠들의 그것은 충분히 인정이 됩니다...

14/11/03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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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

1. 이 글은 어디서 발췌한 것이 아니라 제가 쓴 것입니다(남의 글을 아무 설명 없이 퍼나를만큼 비양심적이진 않습니다). 참고 및 인용한 부분은 주를 통해 밝혔습니다.
2. 이 글은 한 인물에 대한 친절한 전기(biography)도 전문적인 논문도 아닙니다. 그저 평소에 제가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 예술(행위)의 사회성에 대해 고민한 것을 엘리 나이라는 인물을 통해 두서 없이 풀어 놓은 것입니다. 약 2년 전에 썼는데 여력이 없어 지금까지 계속 단상으로만 남겨 두었습니다. 차후에 보다 친절하고 체계적인 글로 완성해보겠습니다.
3.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4/11/03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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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1/03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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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

먼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게하는 글인것 같습니다.
예술과 사회와의 관계,예술의 사회성 또한 상황은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윤이상 선생의 음악과 그가 느껼을 남북분단의 정치 상황등등...

14/11/0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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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

부연해서, 제가 글 속에서도 다루었지만 '예술(행위)의 사회성'이라는 말에는 감상자 차원에서의 평가와 수용이라는 문제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한국에서와 같이 아직 냉전구도의 인식틀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과거에 대한 역사적 합의(consensus)가 부재한 상황에서는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윤이상뿐만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일제강점기의 소위 '친일' 예술가들에 대한 평가와 수용의 문제는 많은 예술영역 밖의 논란을 안고 있습니다. '감상자'라는 주체는 일차적으로 한 개인이지만, 그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측면에서 특정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평가와 유리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 글에서 엘리 나이라는 낯선 대상을 삼은 것은 (일차적으로는 제 취향에 따른 것이지만) 그런 예술적 수용에 대한 한국 사회의 예민한 문제를 우회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4/11/0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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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

서정주 시인도 친일 성향의 글을 많이 쓴건 사실이고 그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자기 반성과 그로인해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사과의 표현만 있었어도 평가가 달라 잘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굳이 돌아가실때 까지 부정하는것을 보면 참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예술을 예술로서만 봐 달라고하는 제자들의 주장만 따를 수 없는것도 일제에 저항하며 자기만의 예술을 지향한 분들이 있기에 그또한 섣불리 인정할 수가 없을것 같습니다.
상기와 같은 내용을 모두 잊은채 예술로서만 감상하며 즐길 수 있으면 더 없이 좋겠지만 예술자체가 어느정도 작가의 삶을 완전히 떠나서는 논하기
어렵기에... 글쓴이의 표현대로 과겅 대한 역사적 합의가 부재한 상황에서 현재의 분단구도와 맞물려 예술을 예술로서만이 아닌 현재의 이데올로기와 얼켜 더욱 논쟁이 깊어지는것 같습니다.
제 유년시절에 아무것도 모르고 예술로서만 감상하고 느꼈었는데 그 시절이 그립기도하네요.

14/11/0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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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y***: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내용이 좋아 퍼갑니다.

15/01/23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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