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1 이병욱/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슈만 교향곡 2번
http://to.goclassic.co.kr/concert/3103

지난 3월 8일, 광주에서 광주시향의 슈만 교향곡 1번을 들은 저는
3-4월 공연 일정을 보다가 우연히 성남아트센터에서 3월 21일 슈만 교향곡 2번 공연이

예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른 예약을 했습니다.
교향곡 3, 4번은 훗날을 기약하기로 하고 급한대로 2번부터 들을 수 있으니 좋은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이 공연은 오전 11시에 열리는 마티네 콘서트로 성남아트센터가 올해 기획한

"차이콥스키, 위대한 낭만주의자"라는 시리즈의 제1회 공연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작 콘서트의 주인공인 작곡가는 차이콥스키로 스페이드 퀸 서곡,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준비된 콘서트로 후반부에 덤으로 추가된 곡이 슈만 교향곡 2번이었습니다.

 

성남아트센터가 주관한 시리즈 공연이지만 성남시립교향악단이 주가된 공연이 아니고
코리안심포니, 부산과 과천의 시립교향악단을 포함, 이날 공연을 맡은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까지
다양한 오케스트라가 초대될 예정이기 때문에
차이콥스키의 교향곡들은 다른 오케스트라가 연말까지 공연할 계획으로 파악됩니다
(그런데 정작 교향곡 6번은 빠져있네요...)

 

어쨌든 슈만 교향곡 2번이 듣고 싶었던 저로서는 흡사 초대받지 않은 손님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주중에 열리는 마티네콘서트라는 성격상 대부분의 관객들이 50-60대의 주부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2층을 선호하는 제가 예약할 수 있었던 자리는 2층 뒷쪽 가운데 자리로
제가 앉은 줄이 통채로 비어있었기 때문에 실제 관람에서는, 오케스트라 배치를 보고서,
한칸 오른쪽에 앉아서 들었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일련의 공연 후기들의 주된 논조는
국내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공연장 음향이 열악하기 때문에 충분한 연주효과가 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남에서 한번도 공연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최근 국내 공연장들을 들어다니며 음향을 들어보고 있는 저로서는
이날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을 찾은 것은 추가로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나무위키에서 읽은 바로는 국내 신발박스형의 직사각형 홀이 고양 아람음악당과 함께
성남아트센터의 콘서트홀이 언급되어 있었는데, 공연 전에 인터넷 검색으로 내부 사진을 본 바로는
성남의 경우 슈박스라기 보다는 박스물 CD 같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길이가 짧은 공연장이었습니다.

 

3층이 없는 공연장의 2층 뒷줄에 앉았음에도 오케스트라가 매우 가깝게 보였고
공연장 벽쪽으로 배치되어 무대와 직각을 이루는 좌석들의 수도 많지 않아서
확실히 정사각형에 가까운 공연장인 것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뒷좌석에 앉았다고 해서 음량이 작게 느껴질 그런 공연장은 아니라고 예상이 되었습니다.

 

사각형 모양의 공연장인 것은 반갑지만
무대로부터 객석 끝까지의 거리가 너무 가까와서 이 부분이 어떤 영향을 줄지 걱정스러웠습니다.
고양 아람음악당도 슈박스 모양이긴 하지만 빈 뮤직페라인 홀의 장장 48.8m에 달하는 길이에 비하면
짧게 느껴졌었거든요.

 

이날 지휘는 작년 10월에 최근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제8대 상임지휘자로 취임한 이병욱 씨였으며
오케스트라는 경기필이었습니다. 이병욱 지휘자는 저로서는 처음이지만
기억을 뒤짚어보면 2014년 5월 세종문화회관에서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윤호근 씨의 지휘와
경기필의 연주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가수들의 기량도 좋았지만, 독일 오페라를 이토록
위화감없이 연주해내는 경기필의 실력에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오페라를 반주해낼 수 있다는 것은 오케스트라로서는 대단한 장점으로
저로서는 이날 공연에 많은 기대를 갖게 할 충분한 이유가 됐습니다.

 

참, 이날 진행은 탤런트 김석훈 씨가 맡아주셨습니다. 2000년대 초에 한 러시아 대학생이

'이 드라마 아냐'고 제게 보여준 사극이 그가 주인공이었던 "홍길동"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스페이드 퀸은 실연으로 들어본 적이 있는 곡이라서
서곡은 이 성남아트센터 홀의 음향을 파악하는데 좋은 샘플이 되었습니다.
바이올린 뒤 쪽에 위치한 호른 소리의 잔향이 가늘고 길게 울리지 않고 뭉뚝하게 느껴지는 점이
홀의 세로 길이가 짧은 영향이 아닌가 추측됐습니다.

 

공연내내 천장에 위치한 환풍기의 풍절음이 들려서
흡사 S/N비가 떨어지는 오디오에서 나는 화이트 노이즈를 연상시켰습니다.

 

하지만 사각형 모양의 공연장이 가지는 장점이 더 많다는 것을 금방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케스트라의 음향은 손실없이 그대로 객석으로 쏟아졌으며,
저는 금새 등골이 서늘해지는 전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페이드 퀀 서곡의 주제선율이 워낙 강렬해서 지금까지도 뇌리에 맴도는 것은
살짝 민폐스러운 곡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술로 치면 슈만은 샴페인인데 차이콥스키는 보드카라 둘이 섞이기엔 차씨가 너무 도수가 높지 않나 싶네요.

 

이날 공연의 주된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협연자는
작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피아노과 교수로 임용된 이진상 씨가 맡아주셨는데
역시나 저에게는 처음인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차피협 1번처럼 어려운 곡을 연주하고 앵콜곡을 또 연주하는 것은 협연자에겐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행히 앵콜을 연주하는 대신 김석훈 씨와 오케스트라 앞에 앉아 짧은 인터뷰를 가지는 시간을 가졌는데
이날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10년만에 연주했다는 내용이 기억에 납니다.
국내 공연에서만 가능한 참신한 기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날 피아노 연주는 김석훈 씨의 말처럼 이진상 씨의 유려한 테크닉이 유감없이 발휘됐습니다.
이진상 씨는 차이콥스키 협주곡의 명반들에서 들을 수 있었던
차갑지만 맑은 겨울 하늘을 연상시키는 매우 전통적인 피아노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특히 3악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의 집중력이 대단해서
실황에서만 가능한 폭발하는 듯한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요즘 콘서트에서 협주곡은 현대 음악이 선곡되는 경우가 잦아서
저로서는 이날 협주곡이 어떤 생경한 작품이 올라왔더라도 감수했을 터였는데
이런 호사가 있을까 싶은 그런 협연이었습니다.

 

2, 3악장에 비해 유독 긴 1악장은 오랜만에 이 곡을 들었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곡 자체가 가진 이런 몰입감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이 있다면
저로서는 러시아적인 강렬한 트럼펫의 울림 밖에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이날 가운데 위치한 팀파니의 오른쪽에 위치한 2대의 트럼펫은 더 오른쪽으로 위치한 3대의 트롬본과
소리가 섞이면서 협주곡에선 잘 도드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병욱 씨가 잘츠부르크에서 공부한 지휘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협주곡에서는 러시아 오케스트라 보다는 독일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차이콥스키같은
절제된 사운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흔히 국내 협주곡 연주에서 협연자에게 배려하듯 음량을 줄인 반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협연자를 녹다운시킬 수 있는 결정타는 피하는 반주였다고 요약할 수 있을까요?

 

이날 공연은 마티네 콘서트라 그런지 인터미션 없이 김석훈 씨의 짧은 소개 이후에
바로 슈만의 교향곡 2번으로 이어졌습니다.

 

콘서트를 보고 나서 고민에 빠지는 경우가
그 공연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영원히 음반으로 간직하고 싶은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날 이병욱 씨와 경기필의 슈만 교향곡 2번은 저에겐 그런 공연이었습니다.

 

홀 자체의 특색 때문에 생긴 금관 음향의 착색만 눈감아 준다면
실황 음반으로 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완성도만 높다면 기존의 음반들과 차별화가 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이날 연주가
음반화 되는 것을 바랄 필요가 없겠죠.
그것이 아니라 제가 아는 어떤 음반들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슈만 교향곡 2번이 낭만주의적 감동도 충분하지만
그 고전주의적 재미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매력을 단순히 '감동'이란 단어보다는
차라리 '재미'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유명하고 인기있으며, 말러적인, 3악장도 좋았지만
제가 이날 깜짝 놀랐던 악장은 2악장입니다.
2악장 코다에서 지휘자는 템포를 몰아붙이고, 팀파니에 대한 모든 고삐를 풀면서,
오케스트라 음량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습니다.
결국 저로서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스타일의 2악장의 코다여서 정말이지 충격적이었습니다.
2악장에 이런 재미가 있었구나!

 

2악장 코다와 유사한 재미를 역시 4악장 코다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기대하고 있어서 앞서 2악장보다는 놀라지 않을 것을
예상했지만 오케스트라 음량이 이날 공연 중 최대로 커지면서
대단한 다이내믹을 보여주었습니다.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의 장점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었고
음반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보통보다 2배 빠른 템포로 물개 박수를 치면서도
한편으론 앵콜을 연주하지 않기를 기대했습니다. 슈만으로 충분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지휘자는 2번째 인사에서 제1바이올린 수석의 팔을 끌면서
손을 모아 고개를 옆으로 뉘이는 '자러가야한다'는 듯한 모션을 취했습니다. ㅎㅎㅎ

 

물론 이날 슈만의 성공에는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에서 어느 정도 체력을 비축해두었던
트럼페터가 병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의 샴페인까지 쏟아부워준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경기필의 실력이 높은 수준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제 확신을 가지게 됐습니다.

 

한가지만 아쉬운 부분을 얘기하자면,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이 비올라나 첼로 소리와 같이
중저음을 돋보이게 하는 점에는 취약점이 있는 홀 같습니다.
제가 지난 빈 여행에서 들은 공연들에게 가장 충격을 먹은 악기가 도드라지는 첼로의 합주 소리였습니다.
국내 공연장이 이 음역대의 소리를 명료하게 만들어주는 것에는 대부분 취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성남아트센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는 무대 바닥을 공명이 잘 되는 구조나 소재로 교체하거나, 공연장 벽면을 나무 대신 석고처럼 저음이 잘 반사되는 소재를 쓰는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해결이 요원할 것 같습니다.

 

공연 팜플렛에서도 느꼈지만 지휘자 이병욱 씨는 클래식 음악계의 박재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재상이 누구냐구요? 다르게 말하면 싸이는 대중음악계의 이병욱...
물론 싸이보다 훨씬 키도 크고,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연상시키는 멋진 지휘 모션을 가지고 있는 지휘자지만
싸이가 갖고 있는 복스러운 얼굴, 무엇보다 높은 음악성을 그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젯밤 저는 이병욱 씨가 상임으로 있는 인천시립교향악단의 공연들을 2건이나 예매했습니다.
인천시향을 지휘하는 이병욱은 어떤 결과를 들려줄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작성 '19/03/22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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