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쇼이 오페라의 "스페이드의 여왕" 을 보고
http://to.goclassic.co.kr/concert/8
필자는 25-27일 3일간 볼쇼이 오페라단에의해 국내 초연되는 차이코프스크의
말년의 오페라 "스페이드 여왕"의 세종문화회관 공연의 이틀째 토요일 밤
연주를 보고 막 돌아왔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와 차이코프스키의 곡중에선 비교적 덜 알려진 오페라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비교적 많은 관중들이 객석을 메웠으며 2층 로얄석에 이날 이희호 여사 등
정계 인사들도 몇 참석했었다고한다. 그러나 공연전 초대권을 입장권으로 교환하려고
길게 늘어선 줄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했다.

공연은 막간마다 감탄사를 연발하게 할만큼 대단한 성공이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곡이라는 점만 아니었다면 관중들의 광적인 호응을 얻을 만도 했다.

1막의 서곡은 빗길에 차가 밀려 늦게 도착한 사람들과 빈자리들로 튀는 '메뚜기'들 때문에
조금은 어수선한 가운데 시작해서인지 3막까지의 주요테마로 짜여진 곡 특유의 비장미가
그리 살아나지 않은 채 세종문화회관 특유의 물 탄 듯한 옅은 음색의 단점이
더욱 두드러졌다.

1막 1장의 공원씬에서 아이들은 유일하게 한국인 소년 소녀들이 출연했는데
흡사 "카르멘"의 어린이 합창을 연상시키는 이 부분은 템포가 어긋나면서
전체 오페라 중에서 유일하게 아슬아슬하게 불안한 모습을 보여줬다.
꼬마 병정의 군대 구호까지 포함되어있는 이 부분은
러시아어에 익숙치 않을 한국 어린이들에겐 부담스러웠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1장의 주요 아리아 "Ya imeni eyo ne znayu"은 이 날 게르만 역을 맡은
리브 쿠즈네트소프의 하이 바리톤을 연상시키는 비교적 굵직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어서
가수들의 가창에 조금씩 빠져들게 됐다.
바로 이어지는 공원 사람들의 합창부분부터는 빠른 템포로 바뀌는데
오케스트라는 이제 어느 정도 본 궤도 오른 듯 자신에 넘치는 합창과 함께
어색함이 전혀 없이 점점 무리익어가고 있었다.

엘레츠키, 백작부인, 리자와 게르만이 대면하는 부분의 미묘한 분위기를 가수들은
매우 자연스럽고 정확한 표정으로 훌륭히 연기해냈는데
특히 이어지는 5중창에서는 가장 무대 깊숙한 곳에서 불러주었음에도
또렷하게 두드러지는 음색을 만들어낸 엘레츠키 역의 안드레이 그리고리예프와
성량이 크지 않음에도 워낙 미성이라 두드러진 백작 부인역의 갈리나 바리소바가
돋보였다.

이제 1막에서 가장 많은 박수를 받은 톰스키의 아리아 차례다.
이 역을 맡은 유리 베데네예프는 흡사 터펠을 연상시키는 풍성한 성량을 가진
키 큰 바리톤으로 능글맞은 이 역에 딱 떨어지는 캐스팅이었다.
그의 풍부한 저음은 전체 등장인물들의 최저역을 진하고 깊게 만들어주는
역할까지 겸하고 있어서 훨씬 밝은 음색의 엘레츠키, 가볍고 경박한 조연들의
음색들과 쉽게 구분되면서 다양한 색채를 만들어내는 데 필수불가결한 가수였다.
그의 아리아를 반주하는 볼쇼이 오페라 오케스트라는 이제 확연히 본궤도에 올라있었으며
앞서 음이 잘 모아지지 않았던 트럼펫은 촛점이 이제 완벽한 촛점을 찾았으며
현의 음색도 이제 맹물 탄 듯한 소리를 떨쳐버리고 꽤 감칠 맛나는 소리를 들려줬다.

1장의 마지막 천둥번개씬은 음반으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오케스트라의 독무대였다.
게르기에프의 음반에서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던 큰 북 (무대 오른쪽 커텐 뒤에 위치)이
맹활약하고 금관들이 포효해서 흡사 돈죠반니의 석상씬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필자는 이 1장의 마지막부터 시작하여 중간 중간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2장의 리자와 폴리나의 듀엣은 느릿한 템포로 매우 호소력있게 들리더니
이어지는 폴리나의 슬픈 독창은 역을 맡은 메조 소프라노 타찌아나 에라스토바의
거의 알토에 가까운 풍부한 저음과 템포를 자유자재로 밀고 당기는 노련함이 돋보였다.
그녀의 감정이 뜸뿍 담긴 어두운 음색은 전체 오페라 중
가장 차이코프스키만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이 부분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노련함은 분위기를 쇄신하여 부르는 경쾌한 민요풍의 합창에서
극에 달하는데 게르기에프 음반 (PHILIPS)의 점잖은 분위기와는 비교가 안된다.
조연들의 비중이 매우 높은 "스페이드 여왕"의 폴리나 역으로서
그녀는 더 바랄 것이 없게 만든다.

리자가 혼자 부르는 아리아는 이날 이 역을 맡은 이리나 루브소바가 아직
충분히 워밍업이 되지 않은 듯 조금 밋밋한 진행을 보여줘서 3막에서의
호연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이 오페라는 조연들의 곁가지 노래들에 비해
스토리가 진행되고 등장인물끼리 갈등을 겪는 부분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는데
역시 1막의 마지막은 스토리 진행에 바쁜데다 리자와 게르만의 2중창은
작곡자의 마지막 교향곡에 쓰인 선율이 등장하고 있으며
지나치게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닮아있어서 곡에 몰입되기 보다는
6번 교향곡의 1악장 주제에 의한 "트리스탄"을 어떻게 이해해야할 것인가하는 데
생각을 팔리게 했다. 게르만의 독창은 특별히 흠 잡을 데는 없었지만
짙은 호소력이라는 면에서는 욕심을 가져봄직도 하게 들렸다.
자신을 받아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남자치고는 조금 몸을 사렸다는 느낌이다.

1막의 마지막 엔딩은 지휘자 마크 에름레르의 연출력이 조금 부족해서인지
충분히 폭발하지 못했으며 막이 내려오기 시작하자 터지는 관중들의 반주소리에
묻혀버렸다. 지나고 보니 볼쇼이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실력을 관중들이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면 막이 끝나기도 전에 이탈리아 오페라를 보듯
박수를 쳐댔던 것을 후회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볼거리가 많은 2막은 말그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장면들이 많았으며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2막부터는 맨앞에 빈자리를 찾을 수 있어서
몇 줄 앞으로 옮겨 1층 왼쪽의 오케스트라 바로 앞에서
관람할 수가 있었는데 맨 앞이다보니 볼쇼이
발레단의 세계 최정상의 발레 장면은 실로 꿈만 같아 보였다.
프롬프터 (가수들에게 가사를 작은 목소리로 미리 알려주는 사람)이 왼쪽 무대뒤에
위치해 있다보니 중요한 아리아들이 모두 이 무대 왼쪽에서 행해졌으니
필자가 잡은 자리가 명당자리였음에 틀림없다.

2막의 엘레츠키의 아리아 "Ya vas lyublyu"는 2막에서 가장 인상적인 가창으로 매우 훌륭했다.
이 역을 맡은 안드레이 그리고리예프의 목소리는 바리톤임에도 매우 고음이 밝았으며
흡사 금빛을 연상시킬만치 반짝반짝 빛났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절대 기름기가 있다거나
능글맞아 보이지 않아서 곡의 내용에 너무도 잘 들어맞았다.
필자의 옆자리에 앉았던 유정우 (heribert)님은 2막이 끝나고
특히 안드레이 그리고리예프의 이 아리아가 기대 이상이라며 흥분했다.

한편 2막 처음의 이 가면 무도회장면에서부터
볼쇼이 합창단은 깜짝 놀랄 만큼의 대단한 실력을 보여주더니
발레가 시작하고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목가극에서 그리고
에카테리나 폐하 만세를 부르는 무대 오른쪽에 위치한 극중 무대위에서의
합창은 이날 합창의 백미였다. 특히 마지막의 포르티시모를 확연히 살려 순간적으로
치고 빠지는 실력은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목가극 중 불러지는 모차르트의 파파게노의 아리아를 빼다 박은 듯한 2중창은
소프라노가 매우 깨끗한 목소리를 소유하고 있고
목동역의 메조의 목소리는 게르기에프 음반의 경우보다 더 굵어서
두 목소리가 확연히 차이가 나도록 설정되어져 있었다.

2막 1장의 모차르트 풍의 서곡은 풍부한 저음에 못지 않게 관악기들을 마음껏 내지르게해서
시원시원한 느낌을 가지게 했는데 이는 2막에서 보여준 오케스트라의 발군의 웅변이
시작을 알리는 신호에 불과했다. 해피 엔딩으로 목가극이 끝나가면
마지막으로 발레가 한바탕 신나게 펼쳐지는데
이에 동반되는 합창의 반주로 행해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정말이지
세종문화회관의 그것도 오페라 공연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질감 좋은 훌륭한 사운드를 들을 수 있었다.
다만 1장 마지막에서 팀파니의 강한 울림은 너무 펑퍼짐하게 퍼져버리는 단점을
숨길 수는 없었다.

이 날 공연의 볼쇼이 오페라 오케스트라에 대한 놀라움은
2막 2장에서 그 최정점에 달한다.
볼쇼이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배치는 특이하게도 더블 베이스가 왼쪽 제 1바이올린 뒤에
자리 잡았는데 지휘자는 2막 2장의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데 필수적인 베이스와
파곳의 저음을 충분히 살려주고 있었다.

하녀들의 합창도 매우 표정이 풍부해서 게르기에프 음반의 그것과는 달리
노래만 들어도 아첨을 떠는 하녀들의 가사가 연상될 정도였다.
이제 이 날 필자가 가장 인상 깊게 들은 부분이 등장하는 데
백작 부인의 독창이 바로 그것으로
게르기에프의 음반에서는 그리 기억에 남게 들리지 않던 부분이라서 더욱 놀라웠다.
백작 부인을 맡은 갈리나 바리소바는 관객의 이목을 끌어당기는 이 부분의 호소력으로
이 날 2막이 끝나고 커튼 콜에서 매우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제 이 날 공연의 백미였던 2막 중에서도 백미였던 2장의 엔딩부분을 언급해야겠다.
백작부인이 숨지고 리자와 게르만의 갈등으로 막을 내리는
부분은 지휘자가 점층적으로 곡을 쌓아올려서 터트리는 것을
완벽하게 해냈다. 특히 더블 베이스의 자신감 넘치는 진행은 흡사 바그너의 오페라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면서 튜바의 어택과 함께 감탄사를 연발하게 했다.
이 2막의 엔딩은 다시 꼭 듣고 싶은 부분으로 아직도 그때의 흥분이 생생하다.

3막 1장은 백작 부인의 유령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무대 바닥에서 위로 향하는 조명을 비추어 집채만한 게르만의 그림자가 문에 비춰지면서
공포스런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고 게르만이 유령을 보지 않고 관객을 향해 괴로와도록
한 연출이 볼만했다.

짧은 1장이 끝나고 2장이 시작되면 이 2장에서 처음 등장하는 오케스트라의 주제는
이제 드디어 맹활약을 시작할 리자역의 이리나 루브소바를 반기는 서곡처럼 기억된다.
앞서까지 그리 인상깊은 노래를 드려주지 못했던 그녀는
3막 2장의 "Akh, istomilas ya ogrem"은 분발하여
높은 고음을 충분한 성량으로 그럭저럭 잘 해내지만
극 중 다른 가수들의 노래에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곡을 완전히 장악하는 힘이 부족하게 들린다.

이어지는 게르만과의 이중창을 반주하는 오케스트라는
다시 한번 깜짝 놀랄만한 소리를 들려준다.
첼로부터 시작해 비올라-제 2바이올린-제 1바이올린으로 상승하는 악구를
각 파트별로 뚜렷한 음색 차이를 보여주면서 휘몰아치듯 뿜어내어 옆자리에 앉았던
황지원 (maurizio)님과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놀라와했었다.
이런 부분은 음반으로 들을 때는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던 것인데
실연에서 이런 재미가 있었던가 다시 돌아보게 되는 부분이다.
2장의 시작에 쓰였던 그 주제가 다시 등장하면서 리자가 자살하는 부분이되면
튜바를 강조하며 당당하게 진행하는 오케스트라는
러시아적이다 못해 바그너 풍으로까지 들리는데 이 부분 역시 청중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극의 종결부인 3막 3장은 앞선 장들에 비해서 조금 완성도가 떨어진다.
물론 도박장의 떠들썩한 장면은 볼쇼이 남성 합창단의 능수능란한 합창과
톰스키의 독창도 매우 잘 되었지만
게르만이 등장하고 도박이 시작되면
스토리가 급박하게 진행되는 것이 그렇지 않아도 대본에 대사로 처리되어
잘 들어나지 않는데 연출이 특별히 스토리를 부각시키는 시도를 하지 않아
주인공의 자살로 이어지는 짧은 순간이 밋밋하게 지나가 버린다.
주인공의 죽음앞에 슬프게 울려퍼지는 오페라의 대미를 장식하는
남성 합창단의 아카펠라는 역시 기대한 이상으로 돋보이며
이 부분이 너무 짧은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이제 막이 내려 오고 7시반에 시작한 공연은 11시가 훨씬 넘어있었다.
좋은 공연을 보고 온 흥분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도 일요일 새벽 5시가 다 되간다.

이번 볼쇼이 오페라 합창단의 "스페이드 여왕"의 서울 공연은
러시아 본토의 정통 레파토리를 국내에서
최고 수준의 연주로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오페라 애호가에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임에 틀림없다. 특히 볼쇼이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실력은
기대한 이상으로 돋보였으며 곡의 실질적인 핵심부에 해당하는 조연들의
실력도 단연 최고였다.

태형 씀
작성 '00/08/27 5:04
th***수정 삭제 트랙백 보내기
링크 글 (Trackback) 받는 주소: 로그인 필요
0/1200byte
한 줄 덧글 달기
 
 0
 


내가 본 공연은 내가 평한다, 공연 후기는 이곳에
번호 글쓴이 제목 날짜 조회추천
 ba*** '00/10/234121 
 ab*** '00/10/233777 
 ba***
        정명훈 후기
'00/10/244120 
15dr*** '00/10/104415 
 de*** '00/10/264259 
14ma*** '00/10/094936 
13vr*** '00/10/083950 
12sa*** '00/10/044219 
11ea*** '00/09/253966 
10dr*** '00/09/194595 
 ja*** '00/09/204355 
 jo*** '00/09/245052 
 na*** '00/09/193802 
8th*** '00/08/276031 
7cy*** '00/08/234662 
6ad*** '00/07/045628 
5ey*** '00/07/034118 
3se*** '00/06/244892 
2ga*** '00/06/235361 
 la*** '01/01/084634 
1goclassic '00/06/2060891
새 글 쓰기

처음  이전  111  112  113  
총 게시물: 2821 (113/113)  뒤로  앞으로  목록보기
Copyright © 1999-2020 고클래식 All rights reserved.
For more information, please contact us by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