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레바인-바그너 <니벨룽의 반지>감상, 서설
http://to.goclassic.co.kr/concert/1263
학회 참석차 뉴욕에 일주일간 머무르면서 메트에서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전곡을 감상하였습니다.

메트의 03/04시즌의 마지막 공연이었는데, 이미 수 개월 전에 표가 매진되어서 좌석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여차여차하여 모두 다 보게 되었는데, 여기서 잠시 그 감동의 일부나마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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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해 왔다. 한 인간의 노력과 집념,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천재적인 능력이 없었더라면 이런 거대한 작품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독일의 오랜 전설과 신화에 녹아 있는 권력과 재산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갈등, 남녀의 순수한 사랑과 따뜻한 부성애, 무지한 어린 아이의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 드라마,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희생과 구원-한 가지라도 제대로 다루기 어려운 이런 거대한 주제를 한 인간이 음악과 텍스트와 무대 장치를 통한 종합 예술로 구현해 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건이고 그 음악내외적 완성도가 아득히 높은 것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고, 나 역시 그 중 한 사람으로서 이 작품을 사랑해 왔음을 고백한다.

그렇긴 하지만-많은 음반과 영상물을 보아왔고 한글 대본도 한 때 탐독한 적이 있었다.-여전히 나는 그냥 '바그너 애호가'로 불리기를 원할 뿐이다.

말하자면, 나는 바그너의 인생관과 철학, 정치적 성향, 반 유태주의 따위에는 별반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런 논쟁에 휘말릴 생각조차 추호도 없다. 단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바그너의 '작품'과 '음악'이고, 작품에 관련된 정치적, 철학적, 심리학적 해석이나 그와 관련된 논쟁은 '작품 자체나 연출가, 지휘자의 해석'의 차원에서 끝날 일이지 그것을 음악 외적 외연으로 확대해서 특정 상대에 대한 비판에 이용하거나 혹은 거꾸로 그로 인해 특정 작곡가가 비판 받는 것-예를 들면 제 3제국과 바그너의 관계-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정말 바그너의 작품에만 미쳐서 독일어로 된 바그너 작품들의 텍스트를 무슨 보물인마냥 읽고 음미하고 탐독할 만큼의 어학 실력이나 한국어 대본을 열심히 볼 만큼의 열정이 있는 것은 아니고, 발퀴레 2막이나 신들의 황혼 1막 발트라우테 등장 부분은 그냥 졸고 마는 평범한 감상자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파르지팔'이 좋기는 하지만, 그 종교적인 겉모습에 심취해서 '신도'가 되고 싶은 맘은 별로 없고, 바그너 음악의 메카라는 바이로이트에 가보고 싶긴 하지만 '성지'라는 생각까진 들지 않을 뿐 아니라 '가까운 장래에 꼭 가야 할 곳' 까지는 아니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가 볼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정도의 감상자라는 거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쓸 감상 역시 그런 범주를 크게 벗어나진 못할 것이고, 거꾸로 그런 점들은 '바그너 매니아' 또는 '바그네리안'들이 보기에는 다소 싱겁고 삐딱한 내용들이 될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로 너무 편향되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본 바그너가 될 것이란 점은 장점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번 시즌 메트의 바그너 공연은 오토 솅크 연출, 귄터 슈나이더-짐센의 무대 장치로 나온 DVD와 같은 연출이기 때문에 다소 신선감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반지>의 전곡 실황 감상이 주는 감동은 그것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황 공연에는 언제나 음반이나 영상물 소스가 전달해주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지휘자의 컨디션, 교체된 가수들, 오케스트라의 상태와 같은 음악적인 것과 청중의 반응, 연주회장의 분위기, 그 날의 날씨 등과 같은 음악 외적인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실황 감상은 언제나 흥분되고 떨리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실황을 좋아한다.

단적인 예로 메트의 이번 시즌 반지 공연에서 가수들의 구성을 보면 신, 구의 적절한 조합이라고 보여져 기대가 컸다.

보탄 역의 제임스 모리스와 하겐 역의 마티 살미넨이 왕년의 노련함을 대변한다면, 브륀힐데 역의 가브리엘레 슈나우트와 지크프리트 역의 존 프레드릭 웨스트와 같이 이미 입지를 굳힌 최고의 현역들이 버티고 있고, 프리카 역의 이본느 네프나 미메 역의 게르하르트 지겔 같은 신진급이 대거 참여해 대조를 이뤘다. 게다가 (내 기억이 맞다면) 시노폴리/플림의 2000바이로이트 공연 때 지크문트로 나와 관객을 열광시켰던 도밍고가 같은 역으로 메트에 서게 되어서 <발퀴레>의 경우 입석조차 전 주에 일찌감치 동이 나는 사태가 발생했다.

지난 주에 받았던 많은 감동들이 아직도 머리와 가슴 속에 생생하다. 이제부터 하나씩 조금씩 뜯어 보려고 한다. 나의 무수한 편견과 독단이 곳곳에 배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런것조차 너그럽게 봐 주시면 고맙겠다.
작성 '04/05/11 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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