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황혼> 여전히 감동적인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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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에서 보는 첫 공연이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일줄, 그것도 입석으로 보게 될 줄은 나조차 상상을 못 했던 일이다. 맨해튼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시차로 인한 피곤함조차 잊은 채 메트로 달려가 네 시간 반을 서서 공연을 볼 생각이라고 하니 옆에 있던 친구가 약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 보았다.

이번 메트의 <반지>공연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 중이었고, 페터 마테이의 <돈 죠반니>나 르네 플레밍의 <루살카>등 여타 공연에 비해 표 값이 두 배는 족히 비싼데도-제일 값싼 발코니 석이 70달러-표는 수 개월 전에 일찌감치 동이 나서 공연장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 그나마 입석을 구하게 된 걸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1층 뒷편 맨 끝줄의 내 자리로 갔다. 1층 입석의 경우는 횡으로 세 줄이나 되기 때문에 키 큰 사람이 앞 줄을 점해버리면 그 날은 무대의 중요 부분 대신 그 사람의 뒤통수를 공연 끝날 때 까지 보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약간 맥이 풀렸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이미 메트에 들어와 있고 내 눈 앞에서 곧 커튼이 걷히고 <신들의 황혼>의 무대가 펼쳐진다는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 곧 잊게 되었다.

<신들의 황혼>, 크나퍼츠부쉬가 빈 필을 지휘했던 발췌 음반(DECCA)으로 나는 바그너를 처음 접했었다. 세 명의 노른이 십여분 간 신들의 멸망과 새로운 세상을 예언하고 퇴장하면 나지막히 목관에 의해 들려오는 브륀힐데의 동기가 목관의 중주로 발전하고 현이 이어 받아 조금씩 조금씩 음량이 증폭되어 거대한 음의 홍수를 만들어 내는 압도적인 장면을 듣고 듣고 또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이 미치도록 좋은 음악이 세 명의 노른 등장 다음의 장면이라는 것과 브륀힐데의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건 한참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쨌든 온 몸을 휘감는 전기 충격 때문에 얼마가지 않아 <신들의 황혼> 발췌 음반을 사서 들었고 그렇게 나의 바그너 이력은 시작되었다. 곧 이어지는 '지크프리트의 라인 기행'과 '지크프리트의 장송 행진곡'이 이 음반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물론 나중에 안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신들의 황혼>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가장 특별한 바그너 작품 중 하나로 남아있다. 작품 속의 어지간한 부분들이 다 이해되고 앞서 언급한 부분 외에도 무지하게 좋은 부분들이 많이 있다는 것, 그리고 많은 음반과 영상들을 접해 봤고, 이제는 바그너의 예술이 음악에 국한되지 않을 뿐더러 음악, 대본, 무대, 미술, 연기 등이 복합되어 이뤄지는 종합 예술이라는 것을 안 지금에 와서조차 <신들의 황혼>은 여전히 내게 바그너 베스트 셋 안에 드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서두가 길었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지휘자 레바인이 등장했다. 1층 맨 뒷줄에서는 얼굴과 어깨 뿐이었지만 사진으로 봤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다. 상상 이상의 환호와 박수가 터졌고 지휘자가 어깨를 돌리자 음악이 곧 시작되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레바인의 인기는 생각보다 대단했고 그저 예의 차원의 상식적인 박수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는 환호에 가깝게 느껴졌다.

무대는 그간 영상에서 봐 오던 것과 특별히 다른 것이 없었고, 익히 봐 왔던 것 처럼 바위나 숲, 하늘은 사실적이되 그 색감과 질감이 너무 솔직하고 직선적인 것이어서 되려 현실의 한 장면이라기 보다는 잘 세팅된 스튜디오의 내부를 보는 듯했다. 마치 잠실 롯데월드 지하에 잘 만들어진 플라스틱 인공 폭포를 보는 것 처럼 이런 인공적인 느낌 때문에 되려 현실감이 떨어지고 그저 '옛날 옛적의 이러이러한 무대'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은 착각마저 불러 일으켰다.

빌란트 바그너의 상징주의 무대로부터 셰로의 파격과 쿠퍼의 탈시대적 무대, 키르히너의 색감을 거쳐 위르겐 플림의 또다른 실험에 이르는 바이로이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무대는 '지극히 대중적, 무뇌아적 연출'로 보일 뿐더러, 80년대에 써먹던 것을 똑같이 우려 먹는 시대 착오적 해석으로 비판 받을 소지가 다분하지만 관객들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저 무대와 등장 인물의 연기와 음악을 즐길 뿐이었다. 여기서 공연 전 줄리어드 스쿨 맞은편에 있는 타워 레코드에서 잠시 얘기를 나눴던 중년 신사의 말을 잠시 인용코자 한다. 자기는 메트 오페라를 수 년째 봐 오고 있는 뉴요커인데, (마침 슈투트가르트 슈타츠오퍼의 지크프리트 DVD영상물을 가리키며) 저런 시시한 연출은 못 봐주겠다며 자신은 메트처럼 화끈하고 스펙터클한 반지를 선호한다고 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바그너의 원래 의도대로라면 <지크프리트>의 용은 무섭고 큰 것이어야 하고, <라인의 황금> 3장에서 니벨하임으로 내려가는 장면은 무대 위에서 사실적으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런 효과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기로 치면 메트를 능가할 오페라 극장이 얼마나 있을까?

<신들의 황혼>의 마지막 장면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지크프리트의 죽음과 하겐의 반지에 대한 탐욕을 목격하고 모든 정황을 깨달은 브륀힐데가 긴 모놀로그를 끝낸 후 벽에 걸린 횃불을 들고 무대 깊숙이 들어가 불을 지폈다. 불은 활활 타올라 발할에 이르고, 기비훙의 궁전이 불타 오르며 반지에 손대지 말라고 절규하는 하겐을 라인강이 집어 삼키자 기둥 서까래가 무너져 내리고 무대 지반이 서서히 침잠했다. 강물의 범람을 뜻하는 물결 모양의 조명이 요동치고 불에서 나는 허연 연기가 무대를 자욱히 덮으며 요란한 음악과 함께 무대는 막을 내렸다. 오페라 극장 무대에서 이런 장관을 본다는 것 자체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이고, 동시에 경이로운 것이었다. 모두들 숨 죽이고 지켜보았고,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다.

이 날 가장 돋보인 가수는 하겐 역의 마티 살미넨이었다. 핀란드 출신으로 81년 메트에 <트리스탄>의 마르케 왕으로 데뷔한 이래 이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최고의 바그네리안 베이스 가수 중의 한 사람으로서 여전히 녹슬지 않은 실력을 과시했다. 특유의 그 폐부를 찌르는 간교하고 시퍼렇게 날이 선 저음은 여전하였고 악역 전문 배우답게 시종 일관 무대를 압도하는 노련한 연기를 구사했다. 1막에서 반지를 되찾아 아버지 알베리히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고 말겠다는 'Niblungen son...'하는 긴 호흡의 모놀로그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발퀴레>의 훈딩도 불렀다.)

군터 역의 알란 헬트, 알베리히 역의 리차드 폴 핑크는 충실한 모습을 보여줬고, 이본느 네프는 두 번째 노른, 발트라우테를 부른데다 <라인의 황금>, <발퀴레>에서 프리카 역을 맡아 최다 배역을 맡은 가수가 되었다. 가장 관심이 갔던 지크프리트 역의 존 프레드릭 웨스트는 3막에서 죽기 직전까지 왕성한 스태미너를 과시했지만 지크프리트 예루살렘과 같이 거침없이 불러제끼는 무식한 힘장이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고, 약간 어른스런 면모의 착실한 지크프리트를 연기했다.

솔직히 말해서 가브리엘레 슈나우트에게 브륀힐데가 적역인지는 의문이 간다. 음반으로 들었던 <로엔그린>의 오르트루트도 그저 그랬지만 2002년 잘츠부르크 <투란도트>영상에서도 별로 깊은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던 그녀다. 비브라토가 너무 심하고 기름진데다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맛이 없어 영 무디고 밍밍한 브륀힐데였다. 하긴 그녀로서는 최선을 다했겠지만, 그녀의 <발퀴레>와 <지크프리트>를 들어야 하는 내 입장으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았다.

레바인의 지휘는 음반이나 영상으로 접하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풍성하고 기름진 소리라고만 생각했지 실제로 보니 가수들의 가창을 대단히 세심하게 배려하는 '반주'에 약간 더 가까운 사운드를 만들어 냈다. 어떤 경우든 가수의 가창이 묻히는 일은 없었고, 느긋한 템포로 개개 음을 충실히 내며 전체적으로 둥글고 모나지 않은 소리였다. 3막이 압권이었는데 장송행진곡을 매우 느리게 최강주로 연주하여 깊은 인상을 남기더니 브륀힐데 모놀로그는 보통의 템포로 처리하고 발할이 불타는 피날레 부분은 다시 속도를 줄여 파워가 넘치고 장중한 종말을 일궈냈다.

사실 첫 날 공연은 다소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봐서 얼떨떨한 느낌이 더 많이 남는 것 같다. 같이 공연을 보던 옆사람과 잠시 말을 나눴는데, 2막 끝나고서는 '글쎄..'하더니 전곡이 끝나자 '원더풀'을 연발하며 놀라워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좋은 공연을 보고도 앞으로 봐야 할 공연이 더 많이 남았음에 만족해 하면서 숙소로 향했다.
작성 '04/05/11 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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