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퀴레> 도밍고, 그의 열정적인 지크문트
http://to.goclassic.co.kr/concert/1266
<발퀴레>에서 뽕짝같은 신나는 리듬의 '발퀴레의 기행'이 매우 유명하고 대중적인 선율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나는 되려 이 점 때문에 이 작품이 온당한 평가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사실 <발퀴레>는 누군가의 지적처럼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 가장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것 중 하나다.

1막은 남녀의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이고, 2막은 남자의 여자에 대한 사랑에 감동 받아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밖에 없었던 여신(브륀힐데)의 인간적 고뇌와 결단의 장면이며, 3막은 간통과 근친 상간은 안 된다는 도덕률 때문에 자신의 의중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랑하는 딸을 바위 산에 가두어야만 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감정의 절절한 표현이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어렵게 느껴지는, 또는 전혀 그런 인간적인 매력과 무관하게 '발퀴레의 기행'이나 '마법의 불꽃'과 같은 장면 위주로 인기를 끄는 이유는 뭘까?

이태리 오페라는 음악이 주가 되고 대본은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한 토대가 되는 경우가 주를 이룬다. 배경 설명 필요 없고, 전후 사정 생략하고 아리아 몇 개, 이중창 몇 개로 웬만한 건 다 표현이 된다. 반면 바그너 음악은 텍스트를 근간으로 음악이 이에 종속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물론 바그너 입장에서는 텍스트 역시 무대, 연기, 음악이 모두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적 표현의 뼈대에 불과하지만.

쉽게 말하면, 예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2막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서로 껴안고 부둥켜 안으며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그냥 5분짜리 이중창 하나로 쉽게 끝내고 말 일을, 바그너는 수 십분을 대사에 할애하여 길게 표현한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고 그래서 당신을 만난 지금의 내 감정이 어떠하고 당신은 내게 어떤 존재이며 당신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되고 이 사랑의 결말로 죽을 수도 있고 만일 그렇다면 함께 죽을 수 있는지 등등.. 모든 것이 등장 인물의 대사로 설명되어야 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대사를 음미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한 설명이 충분히 이뤄진 다음에야 배우(가수)들은 구체적인 행동-열정적인 키스나 결투의 시작 등등-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태리 오페라로 치면 이미 두 사람이 사랑하고 연적이 생겨 복수의 칼을 갈 시간이 훨씬 넘을 시각까지도 등장 인물은 같은 생각을 반복하며 동일한 행위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퀴레 2막의 지겨움은 각별하다. 요란한 전주곡에 이어 보탄과 프리카의 지루한 말다툼을 사이에 두고 보탄과 브륀힐데가 명령의 하달과 복종의 약속에 긴 시간을 두 번이나 할애한다. 게다가 지크문트 등장 다음에 훈딩과의 결투까지는 브륀힐데의 인간적 고뇌와 결심이 바뀌기까지의 기나긴 대사를 모두 감내해야 한다. 귀에 익은 유도 동기도 멋진 음악도 별로 없다. 발퀴레 2막이 정말 좋아 미칠 정도가 되어야 진정한 바그네리안이라는 말이 있고, 그 말은 곧 바그너 작품의 텍스트에 대한 이해도와 작곡가의 이러한 의도에 얼마나 충실한 감상을 하느냐와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내 개인적으로는 이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다.

솔직히 메트의 바그너 연출은 이미 DVD로 널리 알려져 있고, 그 컨셉이 '대중에게 어필하는 친근한 것' 이기 때문에 연출이나 무대 장치, 의상 등에 대한 음악 외적 기대를 갖고 2막을 무사히 넘기려고 시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도밍고가 나오는 후반부를 제외하고는 2막은 대부분 머리가 멍한 상태로 넘기고 말았고, 허기와 함께 맹숭맹숭한 마음을 달래며 3막을 기다려야 했다.

<도밍고의 발퀴레>처럼 제목을 뽑아 놓고서 엉뚱한 소리를 많이 한 것 같다.

최근 스칼라 가극장의 <오텔로>실황 영상반을 두고 많은 분들이 한 물 갔다, 아니다 아직은 최고다 등등 의견들이 분분했던 것으로 아는데, 아쉽게도 내가 아직 못 본 관계로 그 영상물과의 단적인 비교는 어렵겠고 내가 본 것만을 말씀 드리겠다.

도밍고가 <탄호이저>, <로엔그린>, <파르지팔>의 정규 음반을 이미 십 여년 전에 녹음해 호평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무대를 호령하는 최고의 삼손이자 카바라도시이며, 오텔로임은 인정을 받고 있지만 바그너의 영역에서는 그의 폭 넓은 레퍼터리가 공히 인정 받을 지언정 그의 바그너 해석에 대해서만큼은 호불호가 갈려왔다고 본다. 어쨌든 그는 바이로이트에도 선 경험이 있고, 이미 유럽 유수의 극장에서 지크프리트를 제외한 어지간한 헬덴 테너 역은 모두 소화한 베테랑이다.

1막 전주곡이 울리고 돈너의 동기가 장엄하게 울리면서 현악기들이 미친듯이 날뛰다 잠잠해지면 지크문트의 첫 대사가 울려 퍼진다. "Wes herd dies auch sei..(누구의 집인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쉬어야겠다.)" 도밍고는 첫 음 Wes를 이례적으로 길게 뽑으면서 그 특유의 연기력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잠시 후 낯선 여자(리사 가스틴 분)가 나와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예사롭지 않은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는 그 모습.. 애틋한 지클린데의 동기가 울리면서 두 사람은 곧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집 주인 훈딩과 맞닥뜨리며 자신의 어두운 과거 내력을 얘기하는 동안 훈딩은 그가 곧 자기 친족의 살인자임을 알고 결투를 선언한다. 혼자 남아 아버지 'Welse'(보탄)를 두 번 길게 외치며 절규하는 지크문트. 아, 그 왕년의 스태미너는 어디를 갔는지 몇 초 못 가 그의 외침은 맥 없이 사라지고 아쉬움에 침을 꿀꺽 삼켜야 했다.

지클린데가 몰래 들어와 두 사람은 서로에 이끌리고 갑작스런 바람에 문이 열리자 달빛이 새어 들어와 무대가 환하게 밝아진다. 달빛에서 시선을 돌려 지클린데를 향해 부드러운 눈빛으로 "Wintersturme wichen dem Wonnemond..(겨울 폭풍은 달빛에 사라지고..)"를 부르며 밝은 곳으로 그녀를 인도하는 지크문트.. 그 시선, 그 애틋한 표정, 몸에 밴 듯한 자연스러운 행동.. 세상의 어느 여자가 안 넘어갈 수 있으랴.. 결국 금관의 칼의 동기가 찬란하게 울려 퍼지며 노퉁검은 뽑히고 두 사람의 열정적인 가창과 함께 기쁨과 환희에 찬 1막이 끝났다.

그 자체로서 완벽한 하나의 드라마인 1막은 도밍고의 뛰어난 무대 장악력과 연기-글쎄 그의 표정과 행동 하나 하나가 곧 연기인데 더 설명이 필요할지-로 더욱 빛났고 좀 심하게 말하면 이것 때문에 2막이 더욱 싱거워졌을 정도라고 할까. 그의 목소리가 비록 젊은 테너들이 힘을 과시하는 부분에서는 노쇠함이 역력했고 2막 후반부에서는 약간 힘이 달리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내 생각에 그래도 앞으로 몇 년은 더 현역으로 뛰어도 충분히 설득력있게 배역을 해내지 않을까 싶다.

슈나우트와 모리스가 브륀힐데와 보탄으로 분한 3막은 가수들의 평이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웠고 또 감동적이었다. 앞서 <라인의 황금> 때 언급한 것 처럼 레바인의 지휘는 별로 흠잡을 데는 없었지만 좀 더 강렬한 음악적 임팩트가 아쉬웠다. 1,2막의 전주곡은 그냥 무덤덤했고 1,3막의 후반부는 노골적으로 오케스트라 볼륨-특히 현 5부-을 억제하고 가수들을 띄워준다는 느낌이 들어 개인적으로는 불만이었다. 이것도 음반과 영상물 등 미디어에 익숙한 감상자들이 갖는 폐해일는지 모르겠지만, 칼 뵘의 바이로이트 음반만큼은 아니어도 바렌보임/쿠퍼 반의 바이로이트 영상물의 그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볼륨감을 메트에서 기대한 것이 착오였을까? 레바인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거라고 믿었는데, 어쨌든 그는 나흘을 통틀어 시종일관 가수들을 많이 배려하는 지휘를 했던 것 같다. 그것이 메트 청중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작성 '04/05/11 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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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

에구.. 부럽습니당.. ㅠㅠㅠㅠ

04/05/1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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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

아직도 '황제' 도밍고의 시대는 저물지 않았군요.

04/05/1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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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

잘 다녀오셨다고 하니 반갑습니다. 참고로 레바인은 최근 지휘시의 손떨림 문제 때문에 일부 연주자들이 정확한 지시 내용을 알 수 없다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일부 연주자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하구요. 본인도 지병은 아니지만 최근 건강이 좋은 편은 아니라고 실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혹시 볼륨감의 부족이 그러한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지 모르겠네요.

04/05/1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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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

다만 메트 자체가 음향이 다이나믹하게 나오지는 않는 편이라는 점을 고려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메트에서 본 지휘자중에도 다이나믹한 음을 뽑아 냈던 것은 레바인이 유일했습니다. 엘렉트라와 나부코의 웅장함, 그리고 마이스터징거의 들뜬 분위기는 잊을 수 없지요. 이해도와 곡 장악능력, 레파토리의 폭, 그리고 성악가 및 연주자들에 대한 배려감에 대한 관점에서 레바인에 대한 현지인들의 신뢰도는 대단합니다.

04/05/1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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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

저도 도밍고의 파르지팔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위대한 테너인지를 실감했습니다. 환갑 넘은 나이에도 곡의 소화능력과 드라마틱한 표현능력은 대단합니다(트리스탄과 지그프리트를 정복하지 못하고 은퇴하게 될 것 같아 아쉽기는 합니다). 슈나우트는 바이로이트의 발트라우데(불레즈 영상), 브륀힐데 경력이 말해주듯이 노련합니다만 약간 부족한면이 있습니다. 보이그트/이글린 팀의 백업 비슷하게 되었는데 그래도 잘하죠.

04/05/11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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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

그러고보니 도밍고가 트리스탄을 무대에서 완창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없는 것 같네요.^^ 레바인에게서는 실망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말씀처럼 그의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폭넓은 레퍼터리, 가수에 대한 배려 측면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떠나기 전 해 주신 신희강님의 조언이 감상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04/05/11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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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저는 인터넷 라디오를 통해서 들었는데(메트 4월 3일 낮 공연) 보이트는 들어본 중 가장 그럴듯한 지글린데를 연기했습니다. 감탄했습니다! 이글렌은 힘이 앞서는 스타일이 아닌 만큼 '발퀴레'에는 안어울리는 느낌이었구요. 도밍고!는 1막 후반엔 이미 지쳐있어서 걱정이 되었는데 2막 마지막에서 다시 멋지게 노래해줘서 감격했습니다.

04/05/12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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