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크프리트> 음악이 어우러진 한 편의 연극
http://to.goclassic.co.kr/concert/1267
<지크프리트>가 얼마나 재미있는 악극인지 눈 앞에서 실연을 보고서야 깨달았다면, 그것이 그간 얼마나 이 작품에 무관심했는지의 반증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물론 모든 부분이 다 재미가 넘쳐난다는 건 아니고, 솔직히 이 작품의 3막-특히 3장-을 개인적으론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해 왔기 때문에 작품에 대한 감상도 그런 점을 감안하고 봐 주셨으면 좋겠다.

사실 <지크프리트>의 1, 2막은 약간 과장해서 어른이 볼 만한 동화나 코메디에 가깝다.

보탄의 창에 맞아 부러진 노퉁검을 다시 이어 붙이는 족족 지크프리트가 와서 부러뜨리고, 그럴 때 마다 또 새로 붙여 갖다 바쳐야 하는 미메. 곰 한마리를 산 채로 잡아 자랑하듯 내 보이는 지크프리트. 보탄이 방랑자 행색으로 찾아와 미메와 주고 받는 세 가지 수수께끼 결투. 용으로 변한 파프너를 꼬셔 반지를 차지해 보려는 보탄과 알베리히. 거대한 용과 지크프리트의 싸움.-연출자에 따라서 얼마든지 코믹하게, 아기자기하게 또는 스펙터클하게 만들 수 있는 부분들이 널려 있는 것이다.

미메 역을 맡은 게르하르트 지겔은 목소리는 평이한 편이었지만 뛰어난 연기력으로 비열하고 간사하지만 머리가 좀 모자란 미메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냈고, 지크프리트 역의 존 프레드릭 웨스트는 며칠을 쉬어서인지 <신들의 황혼> 때 보다는 한층 업그레이드 된 음량과 자연스런 연기로 힘 세고 역시 좀 모자란 듯한 캐릭터를 잘 표현해 냈다. 특히 칼 다듬는 장면은 왕년의 빈트가센만큼은 아니어도 야노프스키 판의 페터 슈라이어의 그것 만큼은 충분히 훌륭했고 박진감이 넘치는 것이었다. 1, 2막은 가수들의 승리라고 할 정도로 두 명의 테너와 세 명의 베이스(1막은 한 명) 위주로만 세 시간이 가깝게 할애된 비정상적인 막 구성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잘 커버했다.

2막에서 용과의 결투 전에 나오는 숲 속의 속삭임 같은 부분은 더 언급해서 무엇하랴. 용의 출현 장면은 이미 DVD영상에 나와 있으니 이걸 참조하시면 되겠다.

아까 <지크프리트>의 3막을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지만 <반지>전체를 통틀어서 보았을 때 상당히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는 건 사실이다. 1장의 방랑자 보탄의 창이 지크프리트의 노퉁 검에 나가 떨어져 두동강이 나는 것은 절대 권력으로서의 신이 인간의 의지에 패배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로서 신의 몰락이 기정사실화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장은 두 영웅 지크프리트와 브륀힐데의 만남이다. 남자와 여자로서 사랑하는 사이로서 서로를 맞이하고 이로서 <신들의 황혼>에 나오는 비극적 운명의 단초가 제공되는 셈이다.

1,2막의 다소 만화적이고 코믹할 수 있는 아기자기한 이야기 구조에서 보다 심각한 내용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만큼 이야기의 진행이 다소 느려지는 것은 그렇다 쳐도, 특히 3막 3장은 느슨하고 구심점이 없는 음악적 흐름을 갖고 있는 것 같아 늘 아쉬움이 있었다. 브륀힐데의 갑옷을 벗기고서 '앗, 남자가 아니다.'는 것 까지는 좋은데 장황하고 복잡한 설명과 늘어지는 대사, 난데없이 끼어드는 <지크프리트 목가>의 선율 등등.. 영 참기 힘든 불편감을 감상할 때 마다 느끼곤 했다. 음악이 텍스트에 종속됨으로서 되려 긴장감을 불필요하게 늘어뜨리고 자연스런 감정의 진행을 막는다는 느낌이라는 거다.

존 프레드릭 웨스트와 가브리엘레 슈나우트는 예상대로 작품 자체가 가진 문제점을 음악으로 고스란히 드러냈고, 뛰어난 목소리로 커버할 수 있는 부분까지도 평이함으로 일관하면서 다소 맥빠지는 사랑의 장면을 연출하고 말았다. 사실 두 가수가 그리 컨디션이 나빠 보이진 않았지만, 그들의 능력이 작품 자체가 가진 문제점을 극복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 내 느낌이다. (슈나우트를 싫어하는건 아니지만 냉정히 말해서 그녀에겐 프리카 정도가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이 날 공연이 끝난 후의 박수 소리가 나머지 세 날에 비해서 가장 작았고 관객들의 환호도 제일 적은 편이었던 것 같다. 1,2막이 끝난 후의 환호와 대조적이었다고 할까.

레바인의 지휘는 여전히 노련했고, 별다른 기복이 없이 연주를 무난히 마쳤다. 어차피 관현악적으로는 별로 부각되지 않는 작품이기 때문에 레바인 정도의 지휘자라면 동기의 구분이나 장면 전환만 확실히 해 주어도 본전은 뽑는 악극이 아니던가. 전반적으로 극의 진행 속도를 지나치게 느리지 않되 장면 장면을 충분히 음미하게끔 청중들에게는 알기 쉽고 가수들에게는 부르기 쉽게 배려하는 미덕을 보였다. 다만, 내 경우 이러한 점 때문에 가수와 관현악이 맹렬히 부딫치며 극적 고양감을 극대화 시키는 음악적 희열감을 느끼지는 못했고, 전반적으로 가수가 관현악에 비해 다소간 우위를 점하는 밸런스 감을 유지했다는 것은 레바인의 이태리 오페라 지휘자로서의 감각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섣부른 추측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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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실황 감상은 어려운 여건에서 일주일간의 짧은 기간 안에 이뤄졌기 때문에 내게는 모종의 도전이었다. 어쨌든 공연은 모두 마무리 되었고, 메트의 2004/2005새 시즌에는 <반지>는 없고, 새로운 프러덕션으로 여러 작품들이 올려질 예정이란다. 우리나라 출신의 베이스 연광철이 바이로이트와 베를린에서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마술피리>의 자라스트로(쿠르트 몰과 더블 캐스팅)로 메트 데뷔를 할 예정이고 <탄호이저>에서도 헤르만 영주로 캐스팅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내가 메트는 처음이고 게다가 <반지>외에 본 작품이 없으니-브로드웨이 뮤지컬 두 편을 보느라-내가 받은 인상들이 전부이기는 커녕 극히 일부의 모습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메트는 확실히 세계 오페라의 별들이 모이는 최고의 오페라 극장이고, 그 곳의 터줏대감인 제임스 레바인은 뉴욕과 세계의 무수한 오페라 애호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거장임에 틀림 없이 느껴졌다.

플레밍의 <루살카>를 놓친 것이 큰 아쉬움이지만-역시 입석까지 완전 매진-언젠가 다음에도 또 좋은 기회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졸필을 접을까 한다. 아울러 시간이 되는 대로 마지막 날 카네기홀에서 보았던 진만, 톤할레 오케스트라의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의 간략한 리뷰도 해 보고자 한다.
작성 '04/05/11 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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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

와.. 멋진 감상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신들의 황혼'을 첫날 보셨다니 잘 이해가 안 가는데...4개 작품을 매일 동시에 공연하는 건가요?

04/05/1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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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

각자 다른 날에 하는데, 일 주에 한 사이클이 돌아가는 스케줄이라 보심 됩니다. 저는 지지난 주말 부터 봤으니 당연 <신들의 황혼>을 먼저 본 거고, <신들의 황혼>마지막 공연은 지난 주말에 있었는데 저는 그걸 못 보고 귀국을 했던 거지요. 이제 03/04시즌 공연은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04/05/11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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