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기홀 공연-안스네스/진만/취리히 톤할레
http://to.goclassic.co.kr/concert/1268
다음 날이 귀국일이었기 때문에 맨해튼에서 본 마지막 공연은 특별히 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번에 보면 또 언제 여기 와서 공연을 보게 될까 싶은 맘에 감회가 새로웠다. 더구나 카네기 홀은 처음 가 보는 곳이었기 때문에 사진으로만 봤던 공연장 내부가 실은 어떨까 싶어 더 흥분되기도 했다.

공연은 저녁 8시 정각에 시작됐다. 나는 학생증으로 십 달러 주고 드레스 서클을 끊었는데, 4층이라지만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 2층 후반부 열에 앉은 정도의 좋은 위치였다. 생각보다 홀은 앞뒤 길이가 짧았고 내가 앉은 위치에서는 홀 전체가 타원형의 약간 길쭉한 모양새로 규모가 작은 실내 돔구장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이 날의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오네거 관현악곡 <파스토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9번/피아노,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영웅의 생애>

지휘자 데이비드 진만은 그간 헤어 스타일 정돈을 더 깔끔하게 했는지 뒷모습은 영락없는 대머리였고 갈색 정장의 말끔한 차림으로 포디엄에 섰다. 연미복이라기 보다는 양복에 가까운 차림의 옷이었다. 지휘봉이 하늘로 잠시 치켜 들리더니 곧 음악이 시작되었다. 오네거의 <파스토랄>은 처음 듣는 곡이었지만, 목관 앙상블과 호른의 하모니가 참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맑은 음악이었다.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의 1,2악장을 섞어 붙인듯 빠르고 상쾌한 부분은 세밀하게 조여주고, 느리고 목가적인 부분은 목금관 앙상블의 빼어난 솜씨로 넉넉하고 여유롭게 수놓아졌다.

대략 8-9분 정도 연주했을까? 첫 곡이 인상적으로 끝나니 다음에 있을 협연과 후반부가 더 기대되었다. 모차르트 피협 9번은 내게 다소 낯설은 곡이었지만 안스네스와 진만의 톤할레 오케스트라가 만들어 내는 긴박한 호흡과 세밀한 하모니를 캐치해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사실 3층 드레스 서클 정도의 위치에서 피아노의 개개 음색을 홀의 잔향 없이 직선으로 음미한다는 것은 불가능임을 고려하더라도, 안스네스의 터치는 섬세하지만 힘이 넘쳤고 맑고 정교하게 한 올 한 올을 잡아 채듯 울려 퍼졌다. 진만의 오케스트라는 나긋나긋한 반주가 아니라 상당히 선이 굵은 남성적인 면모를 과시하면서, 피아노에 뒤질새라 엎치락 뒤치락 긴장감 넘치는 앙상블을 만들어냈다. 오케스트라의 규모는 40명 선이었지만,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날렵함과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스케일 사이를 절묘하게 오가면서 독주자 안스네스를 긴장시켰다.

다소 감상적인 애틋한 2악장은 마치 20번의 1악장을 듣는 것처럼 비감한 느낌마저 들었고, 안스네스는 상념에 빠진 듯 자신이 만들어 내는 섬세한 터치들을 온 몸으로 느끼며 연주해 나가는 듯 했다. 잔잔한 물 위에서 방울 방울 물이 떨어지듯 오묘하게 그려지는 한 편의 수묵화 같은 2악장이었다. 빠르고 경쾌한 3악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는 다시 스릴 넘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펼치면서 단숨에 피날레까지 마무리하는 인상적인 연주를 펼쳤다. 이런 스타일의 모차르트 협주곡을 이전에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안스네스와 진만의 톤할레 오케스트라가 보여준 조화와 대립의 묘미는 거의 환상적인 수준이었다.

인터미션 때 복도에서 파는 와인 한 잔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꾹 참고 후반부를 기다렸다. 슈트라우스 <영웅의 생애>, 그렇다. 사실 이거 들으려고 오늘 여기 온 거였다.

진만의 톤할레 오케스트라는 근래 아르테 노바 레이블로 슈트라우스 관현악곡 시리즈를 녹음한 바 있는데- 로비와 샾에서는 진만의 <영웅의 생애>음반을 13달러인가 하는 터무니 없이 비싼 가격에 팔고 있었다.-아직 들어보진 못했지만 대충 누구나 예상하듯이 음반상으로는 카라얀의 베를린 필, 틸레만의 빈 필과 같은 버거운 상대들과 대결을 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놓여 있다.

하지만, 실황이라면 이건 또 다른 얘기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으로 염가 음반으로는 기대 이상의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던 진만과 톤할레 오케스트라이기에 그들의 지명도는 미국에서도 무시 못할 수준임에 틀림이 없었다. 오늘, 카네기 홀에는 빈 필도 베를린 필도 없고 오직 진만과 톤할레 오케스트라만이 존재할 뿐이기에 오늘의 연주 자체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면 그걸로 그만 아닌가?

오케스트라의 규모는 단숨에 두 배로 늘어나 80-90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정도로 커졌다. 팀파니가 무대 맨 왼쪽 뒤, 그 앞으로 호른 주자들, 무대 가운데 트럼펫과 트럼본, 오른편 뒷줄에 튜바, 그 앞에 목관 4부가 위치하는 배치였다. 진만의 지휘봉이 힘차게 내려오면서 호른과 현 5부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정교한 하모니로 종횡무진 전진하다 힘차게 내리닫는 밀고 당김의 쾌감은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고, 목관이 희롱하는 <영웅의 적> 부분 직전에 팀파니가 좀 아쉬운 것을 빼면 관현악 전 파트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맹렬히 밀어 붙였다.

<영웅의 반려>에서는 바이올린 독주를 맡은 악장이 약간 흔들리는 기색이었고 후반부의 오케스트라 총주로 몰아치는 부분과 클라리넷의 독주부는 그런대로 잘 하긴 했지만, 빈 필의 그윽한 음색과 쳐바르는 거대한 음량이 좀 그리워졌다. <영웅의 전투>는 작심한듯 금관과 타악기군(큰 북, 작은 북, 팀파니)이 있는대로 찢어발기며 처절한 씬을 만들어 냈는데, 아연 실색 넋을 빼 놓는 인정사정 없는 연주였고 뒤죽박죽 진흙탕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논리 정연한 질서와 하모니가 느껴져 오케스트라의 능력을 실감케 했다. 돈 환, 틸 오일렌 슈피겔 등의 편린들이 그려지며 과거를 회상하다 장엄하게 마무리 되는 후반부까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집중력을 잃지 않으며 힘껏 밀어 붙였다.

오늘 연주에서 제일 돋보인 것은 지휘자 진만의 추진력과 오케스트라의 조직력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일체감 보다는 굉장히 많이 연습해서 단단히 조련된 오케스트라라는 인상이 더 강했다. 물론 그들의 오랜 역사는 인정해야겠지만, 사실 진만 이전에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에는 변변한 지휘자가 별로 없었던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한 사람의 지휘자가 많은 것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것,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것, 아무튼 여러 가지를 생각케 하는 연주회였다. 6월에 함신익이 대전 시향을 이끌고 이 곳에 온다고 한다. 건투를 빈다. 카네기 홀의 좋은 음향에 대해서는 나보다 많이 아시는 분이 계실 것 같아 부연설명 하지 않으려 한다.
작성 '04/05/11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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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

안스네스는 최근 뉴욕에서 "critics favorite"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접근방식, 착실한 기초와 표현능력, 실내악, 가곡 반주 등 빛을 발하지 않는 부분에도 신경을 쓰는 세심함 등이 장년층 위주의 평론가들에 어필하는 부분이 있는가 봅니다.

04/05/1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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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

임재인님 연주평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뉴욕에서 훌륭한 공연들 많이 보셨다니 부럽네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 부탁드려요~~ ^^

04/05/12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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