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전설’ 티보 바르가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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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티보 바르가 선생님의 장례식에 다녀와서 곧바로 음악춘추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살아있는 전설’ 티보 바르가를 보내며



바하의 ‘G선상의 아리아’가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면서 푸르름을 뒤덮는 굵은 빗줄기와 함께 장례식이 시작되었다.

스위스 동남부에 위치한 발레주의 주도인 시옹은 양쪽이 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계곡으로 비가 드문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그날은 아침부터 궂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작지만 아주 오래된 도시인 시옹에 음악학교를 세우고 콩쿨을 여는 등 오랫동안 활동을 한 티보 바르가는 자동차로 10분 거리인 그의 자택에서 9월 4일 오후 2시가 조금 넘어서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향년 82세. 1921년 7월 4일생인 그는 82년하고 2달을 살았다.

지난해 심장 수술을 받을 때만 해도 힘겨워 하던 그가 올해는 봄에 오스트리아 그라츠 음대로 거취를 옮겨 심지어는 일요일에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여름에 짤츠부르그 모짤테움에서 2주 동안 마스터 클래스를, 또 스위스 바젤에서 티보 바르가 콩쿨을 1주일간 마치는 등 아주 왕성한 활동을 하며 건강에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는 지난 2월부터 교수로 재직하고있는 오스트리아 그라츠 음대에 잠시 들렀다가 집을 그리미스와에서 그라츠로 이사하기위해 다시 스위스로 돌아가 모든 짐을 다 보내고 빈 집에서 별세했다.

장례식 전날 저녁까지 옆 동네인 샴프랑의 천주교 성당에 안치되어 많은 조문객들의 인사를 받은 그의 모습은 왼쪽 앞이마에 넘어질 당시의 흔적인 듯한 멍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안해 보였다.

학생들의 잘못된 점을 직접 보여주기 위해 지판 위를 의도적으로 과도하게 넘나들었던 그의 왼손은 평생을 활을 잡고있던 오른손과 함께 깍지를 끼고 있었다.

조금 부자연스러워보이기는 하지만 양손의 네 손가락을 깍지를 끼고 엄지를 서로 맞물려 빙빙 돌리던 학생들의 연주를 듣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가 떠난 것을 아쉬워하는 많은 이들이 다녀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그런 무표정이 야속해보였다.

장례식장이 마련된 그의 자택 옆에 있는 자그마한 학교의 주차장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의 각지에서 온 조문객들의 차량으로 가득 차서 경찰이 동원되어 정리해도 자리가 모자랐다.

강당에는 별세 미사를 드리기 위한 제대가 뒤 좌석에서도 잘 보이도록 높게 만들어져 있고 그 뒤로 오케스트라를 위한 자리와 한쪽으로 성가대석이 마련되어있었다.

제대와 400여 개의 의자가 준비된 일반석 사이에 티보 바르가의 관이 십자가와 함께 자리를 하였다.

40여명의 오케스트라는 평소에 그가 아끼던 제자들로 구성되었다.

스위스 프리부르그 오케스트라 악장인 쉬틀러, 이미 연주자로 스트라드지에도 소개된 바 있는 미리얌은 지난 여름 짤츠부르그 음악제에서 연주회를 가져 선생님을 기쁘게 하기도 했다. 만하임 음대의 비올라 교수인 자크 마용코, 어릴 적부터 선생님을 보고 자라온 테레사, 유난히도 마음인 순한 토비아스, 첼로를 잡고 앉은 키나 선 키가 같다고 놀림을 받던 사샤, 그리고, 선생님이 그라츠 음대로 자리를 옮기면서 데려가서 모든 학생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어린 나이에 대학생이 된, 선생님의 마지막 제자로 불리우던 강구일 등.

실내악 교수인 타카치의 지휘로 장례식 5분전인 10시 25분부터 연주가 시작되었다.

아주 잔잔하게 시작된 바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서 깊은 슬픔을 이끌어 내는가 싶더니 그 슬픔이 극에 달하면 다시 적당하게 잠재워주었다. 전날 저녁 단지 한차례의 리허설을 가졌던 오케스트라는 스승을 보내는 길에 최고의 연주를 들려주었다.

많은 이들의 눈이 젖을 때쯤 학교의 기를 든 기수가 천천히 입장하여 고인에게 인사를 드린 후 왼편에 자리를 잡았다.

연주가 끝나자 미사를 집전할 사제가 입장하였다.

별세미사는 잔잔하면서도 결코 서둘지 않는듯한 목소리의 카메룬출신 신부의 집전으로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부터 티보 바르가를 하늘로 보내기 위한 별세 미사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인사말과 함께 불어로 시작되었다.

장례식장은 자리가 모자라 서있는 사람으로까지 가득 차 있었으나 동네 교회 성가대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성가대의 조심스러운 숨소리마저 안타까울 정도로 무거웠다.

복음과 설교가 지나고 예수의 성체를 영하는 시간, 슈베르트의 오중주의 2악장이 시작되자 제2바이올린의 미리암의 눈물이 악기를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테레사의 소리 없는 오열이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고 강구일은 고개를 숙이고 흔들리는 어깨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관속에 누워계신 선생님을 보고도 선생님과의 이별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결코 울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던 그는 미사 전 고인의 아들과 악수를 할 때 그에게서 선생님의 얼굴을 보았노라 며 통곡을 했다.

기립 박수를 받아도 아까울 것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연주회는 글룩의 멜로디와 모짤트의 오중주로 이어지면서 그렇게도 슬프고 박수 없는 연주회가 되어 미사와 어울렸다.

모두들 그를 ‘이 시대의 마지막 대가’라고 부르고, 또 신부는 미사 내내 그를 ‘마에스트로’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는 ‘마에스트로’라고 하는 호칭은 그에게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거실의 커다란 유리창에 한 마리 새가 날아와 부딪혀 다치고는 몇 시간 뒤 그의 별세 소식을 들었던 그날까지도, 또 고인이 되어 누워있는 그의 차디찬 손을 잡을 때까지도 나는 티보 바르가를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렀다.

그가 남긴 수많은 일화는 전설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1921년 헝가리 기요르 출신인 그는 부다페스트 리스트 음악원에서 공부하여 10세에 멘델스존 협주곡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수많은 연주를 기록했다. 많은 곡을 초연하였으며 특히 쇤베르그로부터는 최고의 해석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1947년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1956년 스위스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레슨 중에 자신이 겪은 일을 인용하고 이야기 해주기를 좋아했다.

어려서 레슨을 받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기차를 타고 갔던 일, 독일 데츠몰트에서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겪은 일 등.

그는 2차 대전을 겪었다.

헝가리 출신인 그가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을 때였다.

연주 여행을 해야 했던 그는 점령군인 러시아군에 허가를 얻어야 했고 당시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그를 존경하던 군 사령관으로부터 여행 허가를 받았다. 사령관은 그의 여권에 ‘티보 바르가가 여행함에 있어서 모든 편의를 제공할 것’이라는 친필 문구와 함께 사인을 하였다.

그 덕에 티보 바르가는 영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통합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런던으로 연주 여행을 하고자 했던 티보 바르가는 여권을 압수 당한 채 6개월간을 비엔나에 묶여 있어야 했다. 그의 여권에 기재된 러시아 군 사령관의 사인이 문제가 된 것이다.

독일군은 그를 스파이 운운하면서 여행을 금지하고 비엔나에 머물도록 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엔나에서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의 초연이 계획되었다.

그러나 연주회를 열흘 남짓 남겨두고 솔리스트가 팔을 다치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급해진 주최측은 티보 바르가를 찾아왔다.

‘우리는 연주회를 일주일 남겨두고 있는데 연주자가 사고를 당해 연주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알고있데 맡아서 연주해 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의심에 가득찬 말투로 그가 다시 물었다.

‘일주일밖에 시간이 없는데 충분히 준비가 되겠습니까?’

‘시간이 많지 않은것도 잘 알고있습니다. 내가 연주할 테니 악보나 두고 가십시오.’

그 날부터 티보 바르가는 연습을 시작했다.

우선, 처음 이틀간은 바이올린은 손에 대지도 않은 채 악보를 읽는데 만 몰두했다. 그리고는 오케스트라 악보까지 전체 스코어를 외웠다. - 그의 기억력은 여든 살이 넘은 최근까지도 비상했다. 잠시 레슨을 했던 학생을 1년 뒤에 만나더라도 그의 버릇까지 기억한다.-

그리고는 다시 이틀동안 운지를 연구하고 나머지 이틀동안 연습을 하였다.

연주회 전날 리허설이 있었다.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지휘자는 ‘어떻습니까? 할만 합니까?’라고 빈정거리는 말투로 인사를 했다. ‘한 번 해 봅시다 그려.’

리허설이 시작 되었다. 음악이 흐르고 솔로 바이올린이 시작되어야 하는 부분에서 솔리스트는 멍하니 서서 지휘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화가 난 지휘자는 소리를 질렀다.

‘그것 봐! 내가 뭐랬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어떻게 저런 자를 솔리스트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 보시오 바르가씨, 당신 도대체 뭘 하고 있는거요? 일주일 내에 준비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사람이 당신이 아닌가요?’

잠시 침묵이 흐르자 티보 바르가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아! 예. 물론 준비는 다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그 부분에서 오보에가 멜로디를 이어 주어야 하는데 그 소리가 들리지를 않는군요. 저는 지금 오보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휘자는 미심쩍은 얼굴로 스코어를 들여다보고는 그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였다.

스코어에는 오보에의 멜로디가 적혀있었다. 큰소리 치던 지휘자는 이내 바르가에게 정중히 사과하였다.

‘모두들 당신을 천재라고 부르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군요. 용서하십시오. 진심으로 사과 드립니다. 당신과 함께 연주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의 연주가 얼마나 훌륭했는지는 지난 6월, 내가 사는 동네에서 그리 멀지않은 독일 남부 지방의 한 작은 도시인 하이덱에서 빈터를 만나서 직접 들어 알게 되었다. 그의 아내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바이센부르그 챔버 오케스트라 악장을 지낸 바 있는 그는 우연히 티보 바르가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흥분하여 그날의 연주회에 대해 자기는 그처럼 훌륭한 연주는 그 이전에도, 또 그 이후에도 보지 못했노라고 말하였다.

일부러 찾으려 해도 얻기 힘든 그와 같은 증언이 아니더라도 그의 레코딩에서나 학생을 가르치는 모습에서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이 전설 같은 베르크 협주곡 초연에 대한 그의 이야기이다.



시옹 시장, 티보 바르가 재단 이사장 등의 추도사와 함께 미사가 끝나고 미리암의 솔로로 비발디 사계 겨울 2악장이 흐르는 가운데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이제 모두들 고인과의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한 사람씩 앞으로 나가 관 앞에 놓인 조그마한 소쿠리에 동전을 놓고 성수를 뿌린다.

‘티보 바르가’ ’04. 07. 1921 – 04. 09. 2003’ 이라고 새겨진 나무십자가 앞에서 그의 관 위에 십자 성호를 긋고는 성수를 세 번 뿌렸다.

연주가 이미 끝났으나 아직도 행렬이 끊이지를 않자 타카치는 다시 ‘G선상의 아리아’를 지휘한다. 한차례의 반복을 더 한 후에야 발길은 끊어졌고 이어 고인의 관이 밖으로 옮겨졌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장례식장을 빠져 나갈 때쯤 누군가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모두들 그에게 눈물과 함께 마지막 커튼콜을 보냈다.

그는 그의 부모와 첫번째 부인이 잠든 묘지로 향하기 위해 각처 관공서와 그라츠 예술대학에서 보내온 아름다운 화환으로 장식된 영구차에 실렸고, 연주를 마치고 서둘러 밖으로 나온 연주자들은 스승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다가 영구차가 움직이자 끝내 누군가의 입에서 시작된 울음 소리로 인해 모두 소리 내어 울었다.

티보 바르가는 그렇게 떠났다.

수 많은 제자들과 그를 아끼던 사람들, 스위스의 작은 도시 시옹과 그리미스와의 사람들, 그의 별세 소식과 함께 한 면을 장식하면서 특집으로 다루었던 유럽 각국의 신문, 특집 다큐멘터리로 1시간을 할애하던 텔레비전 방송, 그리고 많은 음악인들, 그 모두를 두고 그는 갔다.

모두들 말한다. 그는 모든 것을 갑작스럽게 해 왔던 것처럼, 늘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떠났다고.

그렇지만 많은 경우에도 그렇듯이 그는 지난 여름에 많은 메시지를 남겼다.

그 메시지가 이별을 암시했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시옹의 마스터 클래스에서 학생들을 하나 하나 안아주며 등을 토닥거리고, 연주자로서 가져야 할 덕목을 이야기해주었다.

특히 짤츠부르그의 마스터 클래스는 그의 마지막 레슨이었다.

한국에서 온 4명의 학생과 강구일에게 다른 약속을 미루면서까지 베풀어준 마지막 레슨, 그의 가르침은 평생 공부를 해도 모자랄 정도의 숙제가 되었다.

큰 인물이 세상과 작별할 때에는 커다란 가르침을 남겨주는 모양이다.

그는 강구일에게의 마지막 레슨에서 최선을 다한 연습으로 2주만에 끝내는 이자이 소나타 연주를 듣고는 지극히 행복해 했다. ‘나는 오늘은 너의 연주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줄게 없구나. 지금까지 너를 가르치면서 처음 들어보는 최상급 연주자의 훌륭한 연주로구나.’라고 좀처럼 하지 않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는 음악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침을 주었다.

‘잘 듣거라. 음악에 대해 내가 가르쳐주는 해석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임의대로 포르테, 피아노, 리타르단도등 악상을 붙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곡자가 이미 악보에 알려주었다.

악보에 써있는 제목, 빠르기, 분위기, 그리고 박자, 음표, 심지어는 음표의 꼬리가 아래로 향했는지 위로 향했는지 등 모든 것이 작곡자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악보를 잘 읽으면 그 안에 모두 기록되어 있단다.

주어진 박자에서 지나치게 벗어나는 해석은 이미 연주자의 것일 뿐이다.

만약 작곡자가 그것을 원했다면 악보에 그렇게 적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일러두건대,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악보를 잘 읽거라.

그러면 해석은 끝난 것이다.’

평생의 숙제를 남겨주고 그는 그렇게 갔다.

안녕히 가시라는 말 한마디할 틈도 주지않고 나와 그라츠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날 하루 전에 떠났다.

아마도 그는 새가 되었을 것이다.

나의 집 정원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기르고, 늘 흙과 나무 조각을 헤쳐 놓아서 아침마다 비질을 하게했던 새가 난데없이 거실 유리창으로 날아든 것을 보면 그는 세상을 뜨자마자 새가 되어 날았던 모양이라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아마도 하늘을 나는 것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 만큼 잘 하지는 못해서, 그래서 유리창으로 날아들었나 보다.



같이 지낸 시간은 짧았지만 바이올린 선생님일 뿐만 아니라 친구처럼 지낸 순진한 한 노인으로서 작별의 슬픔이 크다.

왼손과 오른손 연습을 위한 그의 독특한 스케일 연습 악보를 보면 그가 생각날 것이다.

그보다도,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면 그가 그리울 것이다.

슬프더라도 그가 그리워지면 좋겠다. 그것도 오랫동안.



2003년 9월 9일

티보 바르가의 장례식에 다녀와서
작성 '05/03/28 2:57
ta***수정 삭제 트랙백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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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

그 진하디 진한 바이올린 음색,한 번들으면 잊혀지지않는....

05/03/2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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