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첼리비다케만이 도달할 수 있던 브루크너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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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최근 일본에서 발매한 음반의 내지에 실린 내용을 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내용 중에는 일본의 관점으로의 위화감이 있음을 양해 바랍니다.

 

첼리비다케만이 도달할 수 있던 브루크너의 세계

 

 

 

세르주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 이하 ‘첼리’)가 지휘한 작품은 여러 갈래에 걸쳐 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빈 고전파, 브람스나 슈만 같은 독일 낭만주의 음악가는 물론이고, 드뷔시나 라벨 같은 프랑스 음악, 차이콥스키, 무소륵스키, 드보르작 같은 동유럽의 음악을 모두 연주하였다. 20세기 음악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R 슈트라우스는 말할 것도 없고, 프로코피예프나 스트라빈스키, 시벨리우스의 어떤 곡은 반복해서 프로그램에 올렸으며, 2차 대전 종전 직후 베를린에서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을 올린 적도 있다. 이러한 작품은 지금으로서는 20세기의 고전으로 돼 있지만, 첼리에게 있어서는 당시의 작품이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최만년에 이르러서도 버르토크, 힌데미트, 블로흐, 미요, 루셀, 베르크 등의 작품을 지휘하였다. 오늘날 대작곡가로 간주되고 있는 이들 중에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이는 오직 말러뿐인지도 모른다.

 

다르게 생각하면, 이 정도까지 다양한 음악을 연주하고, 게다가 어느 것이든 간판으로 만들 수 있는 지휘자라는 것도 진기한 것이다. 어떤 이는 첼리는 러시아 음악이 가장 좋았다고 말하고, 다른 이는 프랑스 음악을 격찬한다. 이러한 것은 그럭저럭 생기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것은, 첼리가 루마니아에서 태어나서 독일에서 배우고 프랑스어에 능통하며 이탈리아에서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에게는 편안히 자신과 일체화하는 음악이 없었는지도 모른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다. 첼리가 자신만의 이론과 이치로 음악을 설명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론과 이치는 모든 것이 꼭 명백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 지휘자는 이론에 의해 음악을 떼어 놓아야 하는 위험을 지니고 있는 듯이 보인다. 첼리의 음악이 지나치게 인공적이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꼭 배격당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인공성’이 그의 예술의 본질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예술은 모두 인공이지만, 자연스러움을 지향하는 것이 예사다.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바라지 않는다는 점을 지금 첼리의 인공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서양 고전음악이 명백하지 않게 된 지점에서 어떻게 그것을 근거를 부여하는가 하는 인식이 첼리에게 있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푸르트뱅글러처럼 ‘위대한 독일 음악’을 고지식하게 찬양하면 좋은 시대는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했든, 황혼기에 접어든 첼리가 특히 브루크너 연주의 대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그는 이전에도 브루크너를 연주하였지만, 특히 뮌헨 필을 지휘하게 되고 나서 빈도는 매우 높아졌다. 바이에른의 청중은 브루크너를 끊임없이 요청하고 빈, 암스테르담 등의 유럽 주요 도시는 말할 것도 없이, 프랑스의 지방 도시인 루앙이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도 첼리와 뮌헨 필은 브루크너의 대작을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동양도 예외가 없어서 가령 대만에서도 확실히 4번 교향곡을 연주하였지만, 물론 브루크너 연주의 정점이 되었던 것은 일본, 특히 도쿄였다. 1986년의 전설적인 5번(Altus에서 CD화), 1993년의 최후 일본 방문 때에는 4번을 여러 차례 연주하였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아니라 브루크너 연주로 이 정도까지 전 세계에서 요청받은 음악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1990년에는 교향곡 4, 7, 8번을 2회씩 선토리 홀과 오차드 홀에서 연주하였다. 첼리는 홀의 음향을 고려하여 연주하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 같은 곡을 다른 홀에서 비교하여 들을 수 있는 이 기획은 대단히 매니아적인 것이었다. 이때의 연주회는 NHK와 SONY에 의해 녹화되어 7번과 8번이 LD로 발매되었다. NHK가 방일한 대연주가의 연주를 방송하려고 한 것은 놀랄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에 더해서 SONY가 첼리의 만년 모습을 수록하려는 열의를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사정 때문에 이 영상은 쉽게 DVD화 되지 못할 듯하다. 4번 교향곡은 LD로도 발매되지 않았는데, 이것은 첼리가 연주자들의 촬영을 허락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때문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영상은 눈을 즐겁게 하는 스펙타클에 지나지 않는, 비음악적이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첼리와 뮌헨 필의 음향은 잔향이 풍부한 선토리 홀에서는 실로 아름답게 들렸다. 투명하지만 야위지 않고, 맑으면서 적당한 광택이 인상적이었다. 악기의 합주도 아름다웠다. 가령, 본거지인 뮌헨에서 듣는 음과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은 그것으로서 대단히 좋은 것이었다. 또한 느긋한 잔향은 온쉼표가 자주 나타나는 브루크너 작품에는 잘 어울렸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첼리와 뮌헨 필은 공간이 크고 거기에 음향적으로는 풍요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가스타이그에서 연주하였기 때문에, 그것에 맞춰서 연주법을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실은 빈이나 암스테르담의 잔향이 풍부한 홀에서 연주하면 음이 포화돼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에서도, 나고야에서 연주된 차이콥스키의 비창 교향곡은 그러했다. 홀의 음향에 배려해서 연주한다고 해도, 스위치를 딱 하고 바꾸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토리 홀에서 듣는 뮌헨 필은 그다지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다.

 

1990년 10월 선토리 홀에서의 8번 교향곡은 첼리 만년의 브루크너 연주의 단젹인 예일 것이다. 상식을 초월한 느긋한 템포를 취하여, 음을 견실하게 울린다. 물론 각각의 음의 관계성은 명쾌하다. 여기에서는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시간이 흐른다. 알레그로일지 아다지오일지, 기본적으로는 관계없다. 빠른 것인지 느린 것인지 하는 일반적인 감상이나 관념이 소실돼버렸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보통 음악을 들을 때, 장조의 빠른 음표에서는 좋은 기분을 기대하고, 단조의 느린 음표에서는 감상적이거나 비애의 표현을 찾는다. 그런데 그러한 일반적적인 음악관은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 더 추상적인, 음색이나 리듬이나 여러 가지 요소의 복잡한 조합에 의한 아름다움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특히 1악장에 있어서 오케스트라는 미묘하게 더듬는 상태가 느껴진다. 집중력이 다소 모자란 듯이 들린다. 세로선이 깨끗하게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첼리는 연주자들에게 언제나 서로가 내는 음을 들으면서 연주하도록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하였다. 보통 연주하고 있는 홀과는 울림이 다른 까닭에, 조금 망설이는 것인가. 첼리는 단원이 늘 주의 깊게 지휘자를 보도록 요구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마이너스로 작용하고 있는 가능성도 없는 이유는 아니다. 고령의 연주자에게 있어서는 아무래도 신체의 움직임에 예리함이 없어진다. 그것은 추측할 밖에 없지만, 그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최상의 상태, 연주를 하고 있는 의미는 아닐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3악장 부근부터는 사정이 호전되어, 끝에 이르러서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하는 멋진 클라이막스가 쌓인다. 최초의 연주 중에 긴장이 없는데 점점 열기를 머금어 좋아지는 것은 실제로는 스테이지에서는 좋은 것이다. 푸르트뱅글러의 라이브에서도 그런 류의 것이 있고, 오늘날에도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일상다반사다. 1곡의 중간이라고 하지 않아도, 콘서트의 전반과 후반에서 두드러지게 인상이 변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있다. 물론 듣는 사람으로서는 시종일관 전력투구로 빈틈이 없는 연주 쪽이 좋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러나 생생하게 듣고 있는 입장에서는 나아져 가면 좋은 인상이 남는다. 반복해서 듣는 재생음악과 다른 점인 것이다. 가령 반세기 이상 명연주로 쳐 온 푸르트뱅글러 지휘 베를린 필의 브람스 교향곡 4번은, 경악할 정도로 조악한 합주로 놀라게 한다. 그러나 요점에 이르면 맞지 않기는커녕 착 맞아 간다. 그것으로도 효과적인 것이다. 그러한 미묘함, 의도하지 않은 혹은 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라이브에는 있다.

 

이 8번 교향곡의 끝에서는 1악장에 등장한 모티브가 장려해마지 않은 모습으로 돌아와서 결연하게 곡을 마친다. 그것을 첼리만큼 명쾌하게 보인 지휘자는 어디에도 없다. “최초의 속에 최후가 있다”라는, 첼리가 젊은 음악가들에게 반복헤서 가르친 것이었다. 이 사고방법은 성서에도 있고, 헤겔 철학에도 있다. 최후에 이르러서 음악은 점점 걸음을 늦추서, 시간은 정지하고 공간으로 변한다. 세상에 여러 가지 음악이 있고, 각각이 필연성이나 매력을 갖고 있겠지만, 그런 너무도 이상한, 상식을 초월한 크기의 음악은, 서양의 음악 예술 문명이 도달한 하나의 정점에 틀림없다. 그곳에 곡절 끝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조금의 혼란도 좋지 않은 형편도 전혀 의미가 없었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첼리는 녹음기사가 미스를 수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실수도 또한 음악의 일부라고 주장하였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이 음악을 듣는다.

작성 '10/04/2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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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

좋은 번역 감사합니다:) 라이브와 녹음의 차이에 대해, 연주회장의 차이에 대해 이해가 되는군요~

10/05/03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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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일본인들 특유의 매니악한 취향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첼리에 대해 많은 이해를 하게 되네요.

10/06/05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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