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미트리 마르케비치와의 대화(번역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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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S EXCLUSIVE INTERVIEW
CONVERSATION WITH DIMITRY MARKEVITCH
BY TIM JANOF

 

ICS 독점 인터뷰 -디미트리 마르코비치와의 대화, 인터뷰어 팀 야노프

 

콘서트 첼리스트인 디미트리 마리크비치의 관심은 다양한 영역들을 포함하는데, 음악학, 양식 전통 연구 그리고 교육이다. 그는 미국 음악학회의 회원이고 프랑스 음악학회의 회원이다. 그는 스위스에 음악학교(Hautes Etudes Musicales)를 설립하였다.

 

그는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베스트팔 켈러 필사본을 발견했는데 수십년간 음악학자들도 존재를 몰랐다. 그는 바흐 모음곡의 자신만의 에디션을 출판하였는데 3 판째 나왔고 이런 에디션들은 막달레나  필사본과 융합한 것들이었다. 1964 년 그는 뉴욕 카네기홀 연주회에서 그의 에디션으로 모음곡 6 개 모두 연주하였다.

 

그는 미지의 두 베토벤 첼로 소나타 작품번호 64와 체르니가 첼로 버전으로 편곡한 크로이처 소나타를 발견하였다. 그는 또한 무소르그스키, 다 팔라, 스트라빈스키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들의 에디션들을 연구하였다. 마르케비치는 첼로 이야기를 저술하였고 현재 업데이트 중이다. 이 책은 첼로의 역사, 레파토리 그리고 유명한 연주가들에 관한 책이다.

 

그는 정격 연주 기법을 재발견한 선구자였고 19 세기 이전에 작곡된 작품들을 바로크 첼로로 연주하였다. 그는 특히 무반주 첼로 작품들을 탐구하였고 주제로 삼은 책을 썼다. 솔로 첼로라는 책은 업데이트 중이다.

 

그는 코다이 무반주 첼로 소나타 작품번호 8 전곡을 최초로 녹음하였고   루이스 애비에트와 베르나드 링아이센의 주 첼로 소나타도 처음으로 녹음하였다. 1992 년 그는 바흐 첼로 모음곡 전곡을 녹음하였고 베토벤 첼로 소나타의 7 첼로 소나타도 첫 녹음하였는데 통상적인 5 개 곡에 작품 번호 17, 작품번호 64를  첼로 최초 버전으로 녹음하였다. 그는 3000 개가 넘는 악보들을 포함한 광대한 첼로 라이브러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런 이유로 카탈로그를 출판하였다.

 

TIM JANOF(이하 TF) : 당신은 당대의 첼로 연주를 썼고 파블로 카잘스 문하생들 중 하나인  모리스 아이젠버그와 함께 연구하였는데요. 그는 스승으로는 어떠했나요?

 

Dimitry Markevitch(이하 DM) : 그는 대단했습니다. 그 분 덕분에 저는 이날까지도 굳건한 기교를 가지게 되었죠. 저는 파리 에꼴 노말에서 그에게 첼로를 배우기 시작했고 14 세에 졸업했는데 학교에서는 연주회 면허(Licence de Concert)라고 불렀습니다. 아이젠버그는 훌륭한 첼리스트였습니다. 어렸을 때 그는 바이올린부터 시작했고 첼로로 바꿨습니다. 그는 독일의 줄리어스 클렌겔과 휴고 베커, 프랑스의 알렉사니언, 마지막으로는 카잘스에게 사사하였습니다. 그에게서 배운 동안 2 차 대전 이전에 그는 연주회를 조금 열었습니다. 그가 연주 일정중이었을 때에는 알렉사니언이 에꼴 노말에서의 그의 수업을 맡았습니다. 훗날 아이센버그가 롱기 스쿨과 줄리어드에서 가르쳤습니다. 그는 진보적인 첼리스트였고 많은 당대의 현세의 작품들을 초연했습니다. 아이센버그를 통해 더는 카잘스를 8 세 남짓에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아이센버그는 "여기 장래에 당신처럼 연주하고싶어하는 젊은이가 있습니다"라고 저를 카잘스에게 소개했습니다. 카잘스는 매우 현명하게 대답했는데 "난 그가 자신처럼 연주하기를 바라네"라고 말입니다. 아이센버그 이후에 저는 피아티고르스키 문하로 갔고 두 학교에서 혜택을 받았습니다. 첫번째는 아이센버그를 통해 카잘스로부터 그리고는 피아티고르스키를 통해 러시아 학교로부터 받았습니다. 저는 매우 운이 좋았습니다.

 

TF: 20 세기 초의 위대한 첼리스트들의 토론을 들을 때면 저는 항상 두 이름을 듣게됩니다. 카잘스와 포이어만입니다. 피아티고르스키는 이에 상응하게 언급되지않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DM : 이는 저로서는 유감스러운 데 그는 최고입니다. 그의 라이브 연주를 듣지않았다면 첼로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 모르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겐 로스트로포비치와 요요마가 있지만 제 귀에는 피아티고르스키의 소리가 귀에 남아있는데 매우 따뜻하고 자비롭고 강력한 소리입니다. 그는 환상적인 기교를 지녔고오늘날까지도 이에 필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 예를 들자면 그가 했던 것처럼 프라잉 스타카토를 구사할 수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위아래로 아무런 어려움없이 그걸 해냈습니다. 제 나이 12인가 13 세에 그에게 기교를 가르쳤고 그 덕분에 저는 이를 현재에도 구현할 수 있습니다.로스트로포비치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흥미로웠는데, 왜냐하면 러시아 악파는 이런 기교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피아티고르스키의의 오랜 녹음들을 감상한다면 당신은 그의 경이적인 기교를 듣게될겁니다.그는 매우 뛰어났고 본능에서 나오는 연주가였으며 항상 가슴으로 연주했을 뿐 아니라 초판본들과 필사본들을 찾는 것에 대해 매우 흥미가 있었습니다. 그는 정격 자세로 연주하기를 갈구했는데 유행하기 전보다 앞선 것이었습니다. 피아키고르스키와 초판본과 필사본들로 회귀하고자하는 염원 덕분에 역사학자인 이브 제라드는 보케리니와 그의 음악을 철저히 연구했고 쾨헬이 모짜르트를 위해 그랬듯이 작곡가에 대해 엄청난 양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사람들은 작곡가의 애초의 의도를 이해하려고 한 피아티고르스키의 깊은 책임감을 잊어버립니다.

 

TJ : 당신은 피아티고르스키가 왜 동시대의 다른 첼리스트들처럼 많이 언급되지않는 지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DM : 2 차 대전 이후 피아티고르스키는 점점 더 연주하지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런 것과 상관이 있는데요. 그와 야사 하이페츠는 유럽 순회 연주회를 했는데 악평을 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유럽에서 연주를 거부했고 이는 유럽 전체 음악 시장을 잃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로 인해 피아티고르스키는 혐오감을 느낀 나머지 헐리우드에서 그 유명한 하이페츠-피아티고르스키 연주회들만 연주했습니다. 한참 뒤 그는 여러 실내악 작품들을 연주하기 시작했고연주회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는데 2 차 대전 이전만큼 자주 연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경력은 구심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녹음들이 재출시되는 것을 압니다. 드보르작과 생상의 협주곡들이 소니에서 얼마 전에 나왔습니다. 당신의 독자들은 그가 30 년대 초반에 녹음한 슈만 협주곡을 찾아야합니다. 이 음반은 정상의 위치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이 작품을 겨우 20 대 초반에 녹음했고 정말이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는 젊은 세대들이 재발견할 것입니다.

 

TJ : 당신은 나쟈 블랑제르에게 사사했습니다. 그는 20 세기 위대한 작곡가들을 여럿 가르친 분인데요. 무엇을 배웠습니까?

 

DM : 기초 음악 이론, 역사, 분석을 배웠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6 살 때 선생님한테 데리고 다녔습니다. 보울랑가는 어머니께 말했습니다. "얘를 나이먹도록 나한테 데리고 오다니 안됐군요." 그 분은 3 살에 음악을 배우기 시작해서6 살이란 나이는 음악 배우기엔 늦은 나이였던 거죠. 엄격한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는 테오도르 드부아 교본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19 세기에 쓰여진 방법인데 저는 그 교본이 끔찍하도록 지루했습니다. 결국 어느날 저는 선생님한테 충분히 배웠도 더는 진도를 나갈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충격을 받은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이제 겨우 껍데기를 만졌을 뿐이라고." 그는 음악 지식이 환상적이었습니다. 그에게서 4 년동안 음악사를 배우면서 저는 선생님이 악보나 한 장의 종이조차 들고있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기억으로 모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의 백과사전적인 지식과 뛰어난 교수법 덕분에 그는 에꼴 노말에서 수업도 하게 되었습니다.

 

TJ : 당신은 아론 코플랜드같은 그 분의 다른 유명한 제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DM : 저는 아론 코플랜드를 잘 압니다만 대부분 미국에 체류했을 때나 알았습니다. 우리는 제가 1940년 피아티고르스키를 따라서 미국으로 갔을 때 친해졌습니다. 당시는 저는 곧 유럽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는데 당시에는 재미있는 전쟁이라고 불렀던 2 차 대전의 초반기였기 때문입니다.전쟁이 길어지면서 저는 머무르기를 끝내고 탱글우드로 갔습니다.거기서 저는 레너드 번스타인 피아노와 제이콥 크락말닉 바이올린과 더불어 코플랜드의 삼중주들 중 하나를 연주했습니다. 코플랜드는 우리 연주에 확실히 즐거워했습니다. 저는 또다른 보울랑거의 제자를 아는데요. 버질 톰슨입니다. 저는 그를 뉴욕에서 만나곤 했죠.그는 제가 보케리니의 작은 교행곡들을 카네기홀에서 연주했을 때 격렬한 리뷰를 했습니다.당시에는 제가 군인 신분이라 군복을 입고 연주를 했습니다.

 

TJ :  바흐 얘기를 해보죠. 당신은 역사학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신의 연주는 매우 역사적으로 기초가 잘 되어있는 걸 압니다. 아이젠버그에게서 사사받으면서 그가 받은 카잘스의 영향에서 현재 당신의 음악 접근 방법으로 어떻게 진화했는지요?

 

DM : 저는 여러 무대들을 경험했습니다. 말슴했듯이, 저는 아이젠버그부터 사사했고 그에 따라 바흐에 관한 카잘스의 원칙들과 지침들을 배웠는데 그 때가 바흐 모음곡의 저의 첫 버전을 만을었습니다. 그 때 저는 피아티고르스키 문하로 갔고 그에게서 바흐를 배웠습니다. 그리고는 두번째 버전의 바흐를 가졌습니다. 제가 10 대 후반과 20 대 초반에 연주회를 열었을 때는 모든 것을 다시 바꿨습니다. 왜냐하면 저만의 스타일을 가지고싶었는데 예전의 스승들로부터 배웠던 것들을 합성한 것이었습니다. 그로써 저는 세번째 버전을 만들었습니다.저는 제 접근 방법에 대해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안나 막달레나의 필사본 외에도 필사본들이 있다는 걸 들었습니다. 안나 막달라나 필사본은 오류로 가득하죠. 찾아낸 끝에 저는 켈너와 베스트팔의 필사본을 찾았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음악학자들이 몰랐던 것입니다. 이 필사본은 19 세기에 존재가 알려졌지만 사람들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독일 바르부르크의 도서관에서 찾았고 전쟁 중에도 안전하게 보관되어있었습니다. 그렇게 필사보이 수중에 들어오자 저는 저의 연주법을 다시 개조했고 네번째 버전을 만들었습니다. 이는 제가 모든 필사본에 근거해서 편집본을 출판했고 요즘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에디션들 중의 하나가 되었는데 테오도르 프레서로 3 판 째 인쇄중입니다.제 에디션이 출판되자 사람들은 제게 연주하라고 말했고 제가 1964 년 카네기홀에서 한 번에 6 곡 전곡을 연주하기로 결정한 때입니다. 그래서 네번째 버전이 나왔죠. 환상적인 성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저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카네기홀에 오지는 않을 것이며 그런고로 단일 연주회에서 전곡을 연주하는 것의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맙게도 저는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카네기홀은 만석이었고 연주를 끝내자마자 3 번의 앵콜을 연주해야만 했습니다.저는 근사한 리뷰들을 들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저는 제가  처음으로 전곡 솔로 연주회를 했고 바로크 첼로로 프로그램을 짰으며 모던 또는 바로크 첼로의 중간을 대체하는 연주회를 연 실험가였다는 점을 지적하고싶군요. 몇 달 후에 뉴욕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열었을 때 1964 년 카네기홀에서 연주한 그 사람을 보고싶어했기때문에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큰 행사였습니다. 요요마같은 첼리스트가 요즘 같은 걸 합니다만 제가 처음이었죠. 이 연주회 이후에 저는 모음곡 전부를 바로크 첼로로 연주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더 공부했고 5번째 버전이 나왔습니다. 저는 연주회장에서 바로크 첼로로 전곡을 연주한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6 개 전곡을 카네기 홀에서 다시 연주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저는 바흐 모음곡을 녹음할 때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던 첼로로 연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연주하는 악기가 어떤 종류인지는 중요하지않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입니다. 

 바흐 모음곡은 저의 많은 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타입의 첼로로도 연주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 6번째 버전은 모던 첼로가 되었습니다만, 다른 첼리스트들이 했다고 주장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저는 모음곡을 더 잘 아는 첼리스트들이 있다고 생각하지않습니다. 저는 알려진 필사본들, 수많은 다양한 활주들, 다양한 스타일들을 포함해서 엄청나게 자세히 연구해왔습니다. 저는 매우 만족스러운 버전에 도착했다고 생각합니다.

 

TJ : 당신은 안나 막달레나의 필사본이 오류로 가득차있다고 언급했는데요. 안너 빌스마는 이 필사본이 특히 활주에 있어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많은 오류들이 있지는 않다는 생각을 재미삼고 있습니다. 그는 이 필사본의 오류를 헤아리는 것이 쉽다고 생각합니다.

 

DM : 그 필사본은 명백한 오류도 가득한데, 저는 117 번이나 헤아렸습니다. 박자를 놓치거나 너무 많은 박자을 표기한 것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저는 완벽히 무작위적인 태도로 삽입한 슬러들도 보입니다.  안나 막달레나가 음악의 관점(특히 슬러들)애 대해 완벽했다고 생각하는 건 말이 안됩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서도 안되고요. 무성의함이 선별성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필사본들은 안나 막달레나의 오류들을 거의 수정합니다; 이 에러들이란 켈러와 베스트팔 필사본을 발견하기 전에 이미 오류로 알고 있던 것들입니다. 저는 빌스마를 정말 좋아하고 그가 상당히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최근 접근 방법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언젠가 우리가 원본을 찾게 될런지도 모르고 그것만이 최선일겁니다.

 

TJ : 빌스마는 켈너 베스트팔 필사본을 논할 때 거기 적힌 슬러들에 동의하지않습니다. 그는 이런 필사본들이 더 프랑스적인 접근을 사용한다고 믿습니다, 프랑스적인 접근이란 모든 마디의 첫박에 활을 아래로 향하게 연주하고 시퀀스를 같은 활궁으로 연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가 막달레나 필사본을 연구한 거에 근거해서 그는 바흐가 모음곡을 작곡했을 때 이탈리아적인 접근을 더 많이 생각했을 것으로 믿습니다. 이탈리아적인 접근은 나오는대로 활궁하라는 겁니다.

 

DM : 바흐가 무엇을 원했는지, 그가 이탈리아 또는 프랑스 양식으로 모음곡을 연주했는지 확실히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가? 저는 바흐가 프랑스 양식으로 연주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악보에 모든 것이 프랑스 어로 적혀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프랑스 모음곡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프랑스적인 방법으로 활궁을 해야합니다. 우리가 이 음악에 국적을 설정해야한다면 말입니다. 모든 악장들은 프랑스어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프렐류드만 빼고 쿠랑트와 알레망드같은 프랑스 춤곡에서 이름을 빌려왔습니다. 저는  단지 빌스마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TJ : 당신의 바흐 에디션들에 있어, 당신은 5 번 모음곡의 류트 버전에 부합하는 버전을 포함했는데요. 여기엔 첼로 버전에는 너무 많은 장식구들과 더블 스톱들이 있습니다. 빌스마는 이것이 바흐가 자신에게 최소의 음표들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야만했던 과제에 어긋나는 것일 수도 있다고 믿습니다. 류트 버전으으로 연주하면 당신은 바흐가 고의적으로 뺐던 음표들을 다시 추가하게되는 셈이죠.

 

DM :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것의 정반대입니다. 류트 버전은 첼로 버전 이후에 쓰여졌습니다. 바흐의 많은 작품들에서 그랬듯이 그는 자신의 음악을 고칠 때 많은 요소들을 추가하곤 했습니다. 자신이 쓴 작품이나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편곡한 것들중에서 많이 볼 수 있는데, 더 많은 음표들, 더 많은 코드들, 더 많은 장식음들이 있습니다. 그의 악곡들은 항상 단순한 피스에서 정교한 피스로 다시 시작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바흐가 자신의 음악을 단순화하는 한 사례를 보고싶습니다.  그는 창의적인 작곡가여서 항상 조합할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있었습니다. 5 번 모음곡의 푸가는 류트 버전으로 연주하면 갑작스러운 타당성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성부들이 있는 부분에서는 더 명확히 들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저는 빌스마 씨에게 억지로 류트 버전을 연주하도록 강요하고싶지는 않습니다만, 그는 대단히 정통적이지 않은 것다른 많은 것들(모음곡에서의 슬러에서의 음표 처리를 말하는 듯합니다, 번역자 주)을 연주하는데 저는 그가 이점에 있어서는 덜 집요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류트 버전은 바흐를 벗어나지 않고 그의 아이디어들을 뚜렷하게 설명합니다. 제 찰로 모음곡 첫번째 CD에서는 첼로 버전을 먼저 연주하고 류트 버전을 반복으로 연주합니다.

 

TJ : 저는 당신의 바흐 모음곡 에디션에 대해 몇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6 번 라 장조 프렐류드를 올림활(바이올린 등에서 활을 끝쪽 방향으로 움직이는 운궁법)로 시작합니다. 왜 이렇게 하는지요?

 

DM : 그 멜로디는 각 세가지 조로 이뤄진 그룹 - D, F#, A, D -의 세번째 조입니다. 올림활로 시작하는 선율의 음은 내림활로 연주하게 됩니다. 내림활로 프렐류드를 시작하게되면 자동적으로 강조를 주면서 시작하게되는데, 제 생각에는 선율을 더 강조해야한다고 봅니다. 이 반복되는 라장조 선율들은 더 맣은 단조로운 저음이라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TJ : 그래서 당신은 매 박자마다 세번째 음을 강조하는데 반면 박자는 실제로는 첫번째 음에 둡니다. 그것은 박자들이 박자와 액센트들을 무시한 것들보다 더 강력한 음악의 근본적인 원칙이라고 일반적으로 말만하는 바가 아니던가요? 모음곡은 결국은 춤곡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DM : 꼭 그런건 아닙니다. 저는 이를 지나치게 학술적인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바흐는 자신만의 내적인 리듬을 가졌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항상 춤을 춥니다. 심지어 액센트가 전혀 없을 때도 말입니다. 음악 스스로가 춤을 추다시피하는데 이는 바흐의 마술적인 부분이고 그를 동시대의 작고가들과 구분하는 부분입니다. 바흐는 자연스러운 내적인 리듬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TJ : 당신은 선율로된 음들에도 약간의 액센트를 줍니까?

 

DM : 그렇지않습니다. 왜냐하면 내림활로 연주하면 액센트가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제 녹음들을 들으신다면 액센트가 어떻게 나오는 지를 알게될 겁니다. 다른 악장들에서 저는 때로는 반대로 하는데 몇몇 상박을 내림활로 연주합니다. 예를 들어 첫번 째 모음곡의 쿠랑트에서 저는 내림활로 시작하는 상박을 연주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하면 악곡에 추가적인 음률을 주기 때문입니다.

 

TJ : 4 번 프렐류드는 왜 올림활로 연주하는지요?

 

DM: 기교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첼리스트답게 얘기하자면 C 현으로부터 내림활로 상부의 현을 누르면 더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낮은 음표들은 페달과 같아서 특별히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TJ : 저는 주의깊게 다루지 않는다면 박자들 대신에 곡의  박자와 액센트들을 강조하기 쉽다는 이런 생각과 싸움을 벌입니다.

 

DM : 이 악장은 춤곡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세요. 프렐류드입니다. 이 악장을 오르간 토카타로 더 생각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프렐류드는 비트를 강조하고자하는 필요를 이완시켜줍니다. 저는 제 운궁이 이 음악적으로 기교적으로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TJ : 왜 4 번 모음곡의 사라방드는 내림활로 시작하나요?

 

DM : 내림활에 도착하고 싶어서 그런건데, 그 때 저는 두번 째 소절의 두번째 박자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두 소절들중의 클라이맥스죠.

 

TJ : 왜 5 번 사라방드는 올림활로 시작하죠? 그리고는 세번째 박자는 내림활로 연주하죠?

 

DM : 알베르트 슈바이쳐는 특정한 멜로디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시사했습니다. 이는 그의 연주들 특별히 칸타타들에서 발견할텐데요. 5 번 사라방드의 경우, 멜로디는 무덤으로 가려는 어떤 사람을 묘사합니다. 안식처는 각 소절의 세번째 박자의 4분 음표입니다.

 

TJ : 그러나 4 분음표로 활을 안착시키면 젓박이나 두번째 박자 대신에 세번째 박자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사라방드의 공통 속성이죠.

 

DM : 지금 우리는 예술을 얘기하는 거지 기술을 얘기하는게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세요. 음악이 그런 엄격한 규칙들을 따르기만 한다면 음악 예술 작업은 많이 권위를 잃을겁니다. 당신의 독자들이 제 녹음들을 듣게된다면 게 활궁 작업들을 알게될겁니다.

 

TJ : 당신의 접근법은 참 독특합니다.

 

DM : 들으니 행복합니다. 로스트로포비치 얘기가 떠올랐는데요. 그가 러시아를 떠났을 때 저를 보러 스위스로 왔습니다.그는 제게 두 아이를 위탁했고 첼리스트인 딸 올가를 제게 사사하기를 원했습니다. 1 년을 맡겼는데 딸이 중요 레파토리를 제게서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이죠. 바흐 멜로 모음곡은 물론임을 의미했고요. 저는 그에게 경고했습니다. 내가 당신 딸에게 바흐를 가르치면 나만의 에디션을 가르치 것이라고요. 그는 이를 듣고 행복해했습니다. 제 에디션에 동의하기 때문이었죠. 저는 왜 왜 그가 제 에디션을 따라서 그만의 에디션을 바꾸지 않는지를 물었습니다. 지는 이렇게 말했던 것같은데요. "전부 다시 시작할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25 년 정도인가 지난 뒤에 그의 최신 바흐 모음곡 녹음들에서 4 번 프렐류드를 듣자니 저는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제 도서관에 갔고 바흐 모음곡들의 55 가지 에디션들중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로스트로포비치의 스승인 코졸루포프가 발행한 1947 에디션에게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로스트로포비치가 1947 년에 코졸루포프가 했던 것처럼 1990 년에 연주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로스트로포비치가 학창시절 이후로 진화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만 저는 매우 곤혹스러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줄곧 연주했던 같은 방법으로계속 연주합니다만 스스로 묻지도 않았고 19 세기의 위대한 성과였던 스승처럼 연주하기를 만족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로스트로포비치는 위대한 첼리스트이고금세기에 첼로로 놀라운 업적을 이뤘습니다, 저는 단지 누군가 그처럼 이런 식으로 음악에 접근한다면 너무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뮨재눈 어린 첼리스트들이 로스트로포비치를 모방하기를 원할거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저는 로스트로포비치가 바흐를 연주하는 방법은 구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당대의 소비에트 에디션들은 취향이 고약하고 슬러들이 과중했으며 다이내믹이 메우 과장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내게 제 접근은 독특하다고 말했을 때, 저는 듣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는 바흐에 대해 엄청난 양의 정보수집과 연구를 했으며 수년간에 걸쳐 진화했습니다. 더는 제가 지금 처한 경지에 이르도록 겪은 모든 과정들에 자부심을 느끼고 계속해서 배우기를 원합니다.

 

TJ : 지난 100 년동안 첼로 기교가 어떻게 변해왔는지 설명하실 수 있습니까?

 

DM : 19 세기 후반에 피아티와 세르베같은 첼리스트들은 환상적인 기교를 가졌음에 틀림없는데, 그들의 매우 어려운 연습곡들과 다른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는 달리 그들은 거의 비브라토 없이 연주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슬라이드를 많이 구사했는데 위 아래로 슬라이드를 구사했습니다만, 이는 금세기초의 오래된 녹음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슬라이드 과잉이라고 여기는 것에 진정으로 반응한 첫번째 사람은 카잘스였습니다. 어쨌든 그의 오랜 녹음들에서는 슬라이드 업 다운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뒤에 포이어만과 같은 사람들이 나와 새로운 스타일의 연주법을 도입했고 대부분 야사 하이페츠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더 명확한 유형의 연주법이었습니다. 불행히도 저는 몇몇 첼리스트들은 구식 슬라이딩으로 어느 정도는 퇴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주는 100 년 전보다 일반적으로 더 명확합니다.저는 슬라이드 주법은 한정된 시적인 목적들과 표현에만 사용되어야 생각합니다.당신은 슬라이드를 고음에 이르려는 가수처럼 사용합니다.고양되어야하는 음표들 사이에는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슬라이딩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단지 음을 바꾸기 위해서 슬라이드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올라가는 망가진 3 도 음정처럼 이상한 소리(da yeeeah da yeaaah) 등등 같이 특히 짜증날 수도 있기때문입니다. 그런 류의 슬라이딩은 제 머리의 남아있는 머리카락들을 쭈뼛하게 만드는데 그 때문에 저는 이런 것들을 매우 비음악적인 매너리즘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게가 일전에 언급한 플라잉 스타카토와 같이 매우 비르투오소적인 유형의 연주법은 망실되었습니다. 모두가 로코코 변주곡의 어중간한 변주를 연주하는데, 로코코 변주곡에는 독립된 활들로 40 개 음표로 된 내림활의 플라잉 스타카토 경과부가 있습니다. 저는 이 경과부의 모든 음표들을 아무 어려움 없이 활 한 개로 연주합니다. 저는 매우 자연스러운 플라잉 피치카토를 구사하는 한 14 세 프랑스 소년을 압니다. 일전에는 그 애가 파가니니 작품을 자연스러운 플라잉 피치카토로 연주했습니다. 이제 그는 파리 음악학교에 입학 시험을 준비하기위해 이 운궁 기교를사용하는 다비도프 협주곡의 마지막 악장을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불운하게도, 그의 시험을 준비시키고 있는 그의 스승은 파리 음악학교가 이 악장을 독립된 음표들로 연주하라고 고집할 것을 알고 있습니다.어떤 이유로 파리 음악학교는 플라잉 스타카토를 금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교수들이 플라잉 스타카토를 구사할 수 없기 때문일겁니다.

 

TJ : 버나드 그린하우스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것보다 구식 기교에 더 많은 익스텐션(?)을 사용했다고 언급했습니다.

 

DM : 예. 그러나 저는 이것이 최선을 위해 필요한 것인지는 확신하지않습니다. 많은 유형의 매우 도움이 되는 익스텐션들이 있습니다. 한 예로 세번째 네번째 손가락사이의 익스텐션은 베토벤 소나타 C 장조의 시작에서처럼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저는 우리가 건강한 익스텐션들을 구사하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엄지와 팔을 늘이기 쉽게끔 필요한 움직임을 성취 가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엄지는 익스텐션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야하고팔은 전 과정을 리드해야합니다. 당신이 이거렇게 하면 익스텐션을 필요로 하지않을 겁니다. 저는 이것 또한 잃어버린 기교라고 생각합니다.

 

TJ : 20 세기 동안 비브라토의 사용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DM : 비브라토는 19 세기와 20 세기에는 장식음처럼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요아킴의 녹음에는 예를 들어 그가 매우 적은 비브라토를 사용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 세기에는 부쉬 패밀리의 오랜 녹음들은 그들도 매우 적은 비브라토로 연주했음을 보여줍니다. 저는 비브라토를 관대히 많이 사용하는 것이 러시아 악파로부터 유래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합니다. 하이페츠같은 연주가를 들을  때면 어떻게 비브라토를 사용하는 지에 대해 적확한 변화가 있습니다. 하이페츠가 1917 년 뉴욕에서 첫 연주회를 열었을 때 그는 혁명을 창조했습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사람들이 전적으로 새로운 유형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피아티고르스키를 포함해서 많은 세계 연주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듣는 종류의 비브라토의 탄생이었다고 여깁니다. 우리가 지속되는 비브라토를 사용하는 것은 비교적 현대적인 발명입니다.

 

TJ : 당신은 우리가 연주에 있어 독특한 개성을 많이 잃었다고 느낍니까?

 

DM : 단연코 그렇습니다. 저는 이를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봅니다. 대부분의 어린 연주자들이 같은 방법으로 연주하고 달리 연주하고싶어하지 않아보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꼭 깊은 표현으로가 아니라 더 효율적으로 연주하는 것입니다. 이를 발견하고는 슬프더군요. 제가 어렸을 때는 러시아 악파와 프랑스 악파처럼 매우 다양한 악파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연주는 점점 더 표준화되었고 우리가 많은 녹음들을 가지고 있고 연주가들은 더 쉽게 여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희소식은 음악에 싸이클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몇 년 안에  관중은 쉽게 지루함을 느껴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누군가를 요구할 것이라는 겁니다.그런 뒤 새로운 악파가 부상할 겁니다. 당분간은 이에 대해 슬픔을 느끼겠지만 이는 단지 늙은 이의 관점에 불과한 것일 수 있습니다. 스위스에서 제 75 주년 생일을 제 최고의 제자들과 크게 축하했습니다. 거기서 우리 모두는 바흐의 모음곡들을 연주했습니다. 우리는 6 곡을 마쳤습니다. 사라방드를 함께 연주했는데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연주회의 시작에 저는 3 세기에 걸쳐 살게 된 것에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19 세기의 산물인 카잘스의 문하생 아이센버그에게서 시작했습니다. 그런 뒤 금세기의 명장 피아티고르스키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음 세기의 세대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역사의 넓은 너비를 경험했다는 것을 매우 감사하고 다음 세대가 올 것에 희망적입니다.

 

1999 년 2 월 17 일

http://www.cello.org/Newsletter/Articles/markevitch.htm 글입니다. 잘못 번역한 곳을 지적해주시면 

 고맙게 정정하겠습니다.

 

 

작성 '10/10/02 21:01
an***수정 삭제 트랙백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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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Nadia Boulanger 나디아 불랑제 또는 그의 러시아식 이름을 보다 정확하게 러시아식으로 하자면 나쟈 블란제르가 정확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리고 로스트로포뷔취의 선쟁님 코소루포프가 아니고 코졸루포프가 정확한 발음입니다.

10/11/1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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