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기에 접어든 어느 마에스트로의 짧은 회고담
http://to.goclassic.co.kr/artist/676
Kurt Sanderling이 최만년기에 응한 인터뷰를 기사화한 글입니다. 이게 Sanderling의 마지막 인터뷰였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Kurt Sanderling의 음악세계를 조망하는데 도움을 주는 매우 유익한 자료라서 이렇게 우리말로 옮겨 봅니다.

그런데 기사 작성자인 브라흐만 씨가 큰따옴표를 자주 누락시켰고 말하는이도 별도로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주고받은 대화들을 마치 물이 흐르듯 생생하게 전달하겠단 의도로 보입니다. 문맥으로 충분히 누가 누군지 구분이 가능하니 읽기에 큰 지장은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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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내 운명은 자비로웠다(Mein Schicksal ist gnädig gewesen)

 
2007년 9월 22일자 베를린 신문(Berliner Zeitung)
얀 브라흐만(Jan Brachmann)

쿠르트 잔덜링 지휘자가 지난 수요일 아흔다섯 살이 되었다. 이번에 나눈 대화에서 잔덜링이 쇼스타코비치, 스탈린, 그리고 다섯 개 독일 국가에서 유대인으로서 살아온 삶을 술회한다.

고요하고 빛이 잘 드는 판코(Pankow)1)의 저택. 42년 전부터 정원에 둘러싸인 이곳에 위대한 20세기 지휘자들 중 한 명인 쿠르트 잔덜링이 살고 있다. 이 따사로운 어느 9월의 오후 레너드 번스타인에게서 이름을 따온 개 레니를 옆에 둔 잔덜링이 현관에 서있다. “들어 오세요, 외투는 벗어 주시고요“라고 집주인이 말하고는 복도를 거쳐 밤색 그랜드 피아노가 놓인 거실로 앞서 간다. 벽면에 놓인 선반엔 벨벳과 고무, 그리고 나무로 된, 조그마한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피겨들이 산더미처럼 진열돼 있다. “모두 다 제 아내에게 온 선물들“이라고 쿠르트 잔덜링이 말한다. 바르바라 잔덜링(Barbara Sanderling)은 쿠르트 잔덜링이 이끌던 베를린 심포니 오케스트라(Berliner Sinfonie-Orchester)2)에서 16년간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로 활동했다. 가죽으로 된 안락의자에 앉기 전에 잔덜링이 단호히 말한다. “저기 소파에 앉으시죠“. 그리고는 가죽으로 된 강아지들이 거기에 그냥 장식품으로 달려 있는 게 아니라고 설명해 준다. “ 기자님이 원하신다면 팔을 얹혀 두거나 허리를 편하게 할 수 있게끔 하는 목적으로요“.
1) 서울의 구에 준하는 행정구역인 Bezirk들 중 하나.
2) 현재는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Konzerthausorchester Berlin)


“찐한 커피가 기자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잔덜링이 전화로 통보하였다. 정말로 그 말 그대로였다. 커피를 좋아하시나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그리 오래 사셨으니 이제는 차를 마시셔야 맞지 않나요? 차를 마셔야 한다. 네, 네, 그렇지만 거기서도 제 취향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소련에서 커피를 살 수는 있었나요? 네, 게다가 넉넉했죠, 왜냐면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죠. 기자님이 누구네 집에 초대를 받아 가보셨다면 항상 차가 있다는 걸 아셨을 거에요. 전쟁 중엔 운이 좋았어요. 우리가 레닌그라드 필과 노보시비르스크로 강제이주 당했죠. 모스크바로 가야 했던 식료품을 실은, 거기다 볶지 않은 커피가 넉넉히 있던 구호열차가 노보시비르스크에 멈춰 서게 됐죠. 그렇게 해서 전쟁 내내 커피가 떨어질 일이 없었습니다. 완전히 넘쳐흐를 정도였다니깐요! 지휘자님은 동프로이센의 아뤼스(Arys) 출신인데 동프로이센사람들은 완전 커피애호가들 아니었던가요? 네, 커피애호가들이었죠. 끔찍히 맛없는 커피였지만 어쨌든 커피는 커피였죠. 차는 잘 마시지 않았어요.

지휘자님 아버지는 제재소를 운영하셨고 어머니는 가사를 돌보셨죠. 부모님들도 음악 쪽에 관심을 가지고 계셨는지요? 아마도 저희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요. 피아노를 좀 치셨거든요. 오히려 두 분께선 무엇보다 음악성이 알아서 자연스레 솟아나게 배려하는 방식으로 제 음악적 소질을 북돋워 주셨습니다. 지휘자께선 이미 네 살짜리 꼬맹이 시절부터 프로이센 군악대에 열광하실 수 있었죠. 네! 프로이센 군악대 진짜 대단했죠. 아뤼스가 당시 독일에서 두 번째로 큰 군사훈련소가 있던 곳이었죠. 한창때엔 훈련병들로 가득 찼죠. 거기엔 군인들의 혈기왕성한 삶이 있었어요. 제가 꼬맹이 시절부터 음악 들으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곤 했어요. 그러면 우리 부모님이 사격훈련장에 있던 저를 끌고 오셨죠. 그분들은 뭐 매번 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셨죠. 저야 항상 음악이 연주되는 곳에 있었으니깐요.

지휘자께서는 다섯 개 독일 국가에서 사셨죠. 독일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제3제국, 독일민주공화국, 그리고 독일연방공화국에서요. 어렸을 때 유대인이라고 독일인으로부터 매번 배척을 당해서 외롭다고 느낀 적이 있었는지 얘기 좀 해주세요. 이 고독이 지휘자님의 인생을 결정지었나요? 네, 제가 지금 회상을 해보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네요. 유대인이다는 사실을 어렸을 때 뿐만 아니라 사실상 평생을 거쳐 체험했죠. 아마도 기껏해야 유대인이란 사실이 별 문젯거리가 안 될 거라 착각했던, 소련에서 보낸 짧았던 기간을 제외하면 제 자신이 실은 유대인이란 점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 왔습니다. 하지만 이 점은 당당히 고백해야겠죠. 독일연방공화국에선 이 문제를 가장 덜 의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을요. 제가 베를린에서 반유대주의를 모욕으로 여기는 사람들 주위에서 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고요. 외딴곳이나 작은 도시들에선 사정이 다를지도 모릅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하지만 유대인으로서 이렇게 자유롭다고 느낀 건 독일연방공화국에서가 처음이네요. 제 인생을 다른 수천, 수만 유대인들, 홀로코스트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요, 어쨌든 이들과 비교하면요, 제 운명은 분명 상당히 자비로웠죠. 보세요, 제가 1941년, 스물아홉 살에 소련에서 가장 중요한 오케스트라들 중 하나인 레닌그라드 필의 지휘자가 됐잖아요. 이건 정말 믿기 힘든 행운입니다.

지휘자께서는 1935년 유대인으로서 독일 국적을 박탈당하고 1936년에 소련으로 이민을 가서 그곳에 있던 삼촌과 합류하셨죠. 지휘자님껜 거기선 언제부터 삶이 고달퍼 졌나요? 전쟁 시작하고 나서부터 돌연 달라진 거 같네요. 뭐 그렇게 말씀은 드립니다만 정말로 그때부터 그랬는진 잘 모르겠네요. 원래 러시아인들 사이엔 잠재적인 반유대주의가 전통으로 있었어요. 매번 반복됐고 매번 있어 왔죠. 게다가 혁명가 다수가 유대인이었단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그러니 내심 새로운 정권에 반대하던 주민의 몇몇 계층이 모든 해악의 근원을 유대인에게서 구하려 했죠. 어쨌든 처음엔 그런 걸 보지도 느끼도 못했습니다만. 그런데 전쟁이 시작되면서 지금껏 유효하던, 유대인 주민들과 교류할 때 준수해야 할 원칙들을 더이상 지키려 하지 않았죠. 전쟁 중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국민의, 그리고 무엇보다 무기를 든 자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했죠.

그때 독일인이단 사실과 완전히 등을 지셨나요? 더 예전에 등을 졌죠, 제가 독일국적을 박탈당했을 때요. 하지만 제가 독일인이단 사실을 완전히 청산한 건 아니었습니다. 독일국적자란 사실을 청산했던 거죠. 제가 독일인이단 사실을 지워 낼 순 없었습니다. 제가 유대인이단 사실을 지워 낼 수 없었던 것처럼요, 비록 어떤 때엔 그러고 싶긴 했습니다만. 언제 그런 생각이 들었나요? 1936년까지, 그러니깐 제가 소련 국경을 넘어섰을 때까지는 제가 유대인이란 사실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저는 정말로 독일인이고 싶었습니다. 저는 독일 유대인이고 싶었습니다. 제겐 독일인과 유대인이 대립하지 않았거든요. 소련에선 그게 논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소련 여권을 받고 어떤 민족인지를 기입할 때가 되어서야 그 문제가 그곳에서 처음으로 논제가 됐습니다. 저야 독일인이라 적고 싶었습니다만 저보다 훨씬 선견지명이 있던 저희 삼촌이 말씀하셨죠. “독일인이란 게 여기선 더 이상 좋게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아니? 유대인이라고 적거라. 넌 유대인이기도 하잖니“. 뭐 그래서 유대인이라고 적어 냈습니다. 이게 1941년 9월에 모스크바에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 조치를 당하지 않도록 막아 준 셈이 되었죠. 여권에다 독일인이라고 적은 사람들은 코민테른에서 일을 하거나 당으로부터 직무를 맡아 담당하던 사람들을 제외한 모두가 그곳으로 제대로 강제이주 당했죠. 저 역시 그때 카자흐스탄으로 갔을 수도 있어요.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런진 저도 모르겠네요. 제가 유대인이란 사실이 저를 구한 듯 싶네요.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선 갑자기 지휘자님을 레닌그라드 필의 지휘석에서 끌어내리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런데 누가 저를 끌어내리고 싶어 했는지 아시나요? 아마도 당간부였겠죠.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어요. 하급간부들이 저를 끌어내리고 싶어 하지는 않았죠. 이 문제는 그곳에서 지배적이던 관례와 관련이 있는 거죠. 당대회나 규모가 큰 당회합에 앞서 항상 조직 내에서 당노선에 충분히 서있지 않은 인물들을 세척하는 작업이 벌어집니다. 이제 스탈린이 마지막으로 참가한, 이미 당시엔 스탈린이 발언을 삼가고 있던 시기였지만요, 1952년 당대회가 임박했습니다. 레닌그라드에서 누군가는 숙청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리해서 모든 문화협회들을 관장하는 위원회가 설치되고 당명부가 제출되고 나서는 러시아 이름이 아닌 어느 남성을 찾아냈죠. 유대인이기도 했고요. 아, shocking!3) 당기록에 따르면 대학도 나오지 않았습니다.4) 조직의 상당한 부분에 얼마나 빈틈이 있었는지에 대한 예로 유효했던 엄청난 사건이었죠. 그렇게 그게 레닌그라드에서 뭘 의미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내 이력을 이유로 처분대상이 되어 버렸던 거죠. 지휘자님 혼자였나요? 아니요. 저는 셋 중 하나였죠. 두 번째 인물은 문예학회 회장인, 대단한 업적을 남긴 학자인 아이헨바움(Eichenbaum)이었는데 이분은 꼬맹이 시절에 저 레프 트로츠키와 체스를 두기도 했고요, 근데 그때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고 확실히 정상적인 당경력을 유지하는 데에 부합하는 여러 사고방식들에 걸맞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죠. 누가 세 번째 인물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건 세 명 모두가 유대인이었단 사실 뿐이죠. 제가 레닌그라드의 당회의에서 공식적으로 호명된 이후엔 그렇게 사실상 끝장이 난 상태와도 같았죠. 당은 틀리지 않기 때문이죠, 네, 당은 결코 틀리지 않아요! 보통은 최종판결이 났다고 보면 됐죠. 그곳엔 항소 같은 건 전혀 없었습니다.
3) 원문이 영어로 적혀 있음.
4) 잔덜링은 국가인증기관에서 정식으로 음악수업을 받지 않고 현장에서 지휘를 배운 인물임.


잔덜링 씨와 공동으로 지휘직을 맡았던, 레닌그라드 필의 수석지휘자 예프게니 므라빈스키를 칭찬해야 합니다만. 그가 만만치 않던 라이벌로 보일 수 있던 잔덜링 씨를 해치울 기회를 이용하지 않았단 거죠. 므라빈스키야 보통은 자기 출세를 위해 동료를 밟고 올라섰잖아요. 근데 이번에는 당결의안을 무효로 돌리려 전력을 다했죠. 근데 그건 당대회에서 스탈린의 이목을 끌게 된단 말이잖아요, 이러저러한 일이 발생했는데 그게 썩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요. 이를 위해 두 사람을 찾아냈죠.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영화 알렉산더 네프스키와 이반 대제에서 주연으로 활약했던, 스탈린이 아끼는 배우이자 므라빈스키의 친우였던 니콜라이 체르카소프(Nikolaj Tscherkassow). 그리고 두 번째가 쇼스타코비치였죠. 저 두사람이면 스탈린 개인에게 접근하기 위해 당대회에서 수많은 난관을 뚫을 수 있겠단 기대감이 있었죠. 그 둘이 스탈린에게 모든 걸 해명한 다음날 “잔덜링 건“은 해결되었습니다. 스탈린이 몸소 개입해서요? 네, 자기 전속 부관한테 신호를 주고 그 부관이 레닌그라드에 전화 한 통을 날리니 사건이 해결돼 버린 거죠. 그러니 제가 당조직 자체로 인하였다기보다는요. 그 여름, 레닌그라드 필 내에서 나팔과 피리를 어떻게 부는지 이해조차 못하는 위원회가 틀렸다고 말해줄 수 있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는 저 불운한 상황 때문에 희생자가 됐을지도 모른단 말이죠. 위원회 때문에 희생자가 됐을 거지 결코 조직 때문에 희생자가 되지는 않았을 거란 말이죠. 보세요, 조직은 심지어는 번복해 주기까지 했잖아요.

그런데 매우 특별한, 여론 내에 공통된 의아함을 불러일으켰습니다만. 아마도 쇼스타코비치의 간청으로 지휘자님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죠. 쇼스타코비치와 맺은 사적인 친분이 지휘자님이 그분의 음악을 바라보는 안목에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주었나요? 글쎄요, 일단 기자님의 질문에 있는 자그마한 형식적 오류가 거슬리네요. 제가 쇼스타코비치를 개인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랬다기보다는요, 어떤 환경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만들어 졌는지를 알기에 그분의 음악을 바라보는 특별한 안목을 얻게 된 거죠. 저야 쇼스타코비치를 만나기 전부터 그분의 음악을 알고 있었죠. 예술이란 진공 공간에서 생겨나 진공 공간에서 작동하는 추상개념이 아닙니다. 예술에 들이는 특정한 노력에는, 한 작품이 탄생하는 데에 작용하는 역사적 규정성들을 이해함이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서방의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 저는 쇼스타코비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죠. 다른 지휘자들은 기껏해야 추측을 할 수 있었을 뿐이었죠.

쇼스타코비치에 관해서 말하자면요, 그분이 뭔가를 의미하는 음악을 만들긴 했지만, 동시에 그 음악이 겉으론 다른 의미를 지니도록 명시해야만 한다는 자신만의 신념이 있었죠. 그분의 음악이 사회주의 리얼리즘 독트린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쇼스타코비치에 대항해 스탈린이 조장했던 캠페인이 여러 번 있었죠. 쇼스타코비치 스스로 항시 체포되어 사형 당한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럼 가장 비극성을 띄고 있는 작품들 중 하나를 예로 들어 보죠. 네, 자서전이기도 한 8번 현악사중주요. 정치적으로 용인되게 하려고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을 의미심장하게도 파시즘으로 인한 희생자들에게 바쳤죠. 그렇기에 이 작품을 다르게 연주할 수 없죠. 만약 이 작품을 작곡가의 개인적인 고백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요, 아마도 그 작품을 마치 역사문건인양 연주하는 방식관 다르게 연주할런지도 모릅니다만.

뭔가 많이 부족하다고 알아채시기에 가끔은 다른 지휘자들의 쇼스타코비치 공연에 화가 나기도 하나요? 네, 그런데요, 기자님, 그 사람들은 자기가 뭘 하는지 알지를 못해요. 그러니 그들이 책임을 질 필요가 없죠. 15번 교향곡을 예로 들죠. 극히 비극적인 작품이죠, 자기고백을 하는 작품이고요. 그리고, 뭐 아주 망상만은 아니지만요, 평생을 박해 받는단 망상에 시달렸던 쇼스타코비치가요, 이제는 작품에다 진실에 부합하지 않게 표제를 달아야 할 이유가 없던 시절인 1971년에도 그게 활기찬 교향곡이라고, 첫 악장이 장난감 가게에 관한 거라 명시했죠. 네, 낙관론이 국가철학이었죠. 제가 만약 어떤 조건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살았는지를 알지 못하고 기껏해야 얘기를 전해 들을 뿐인 서방 지휘자라면요. 그러니깐 저 총보를 손에 쥐고 나서 거기다 작곡가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면요, 네, 그렇게 된다면 다른 생각을 품지 못할 거고요, 다른 지휘자들이 그러듯 그렇게 틀리게 연주를 하게 될 겁니다.

쇼스타코비치가 15번 교향곡을 해설한 게 옳지 않음을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제가 1972년에, 당시엔 이 작품이 우선적으로 러시아 국립교향악단에 의해 연주되었는데요, 이 작품을 베를린에서 초연할 때 국립가극장 박스석에 앉아 있었는데 쇼스코비치가 옆에 있었죠. 저야 소련 언론에 보도된 내용만 알고 있었죠 “활기찬 작품, 첫악장은 장난감 가게“. 제가 작곡가와 그의 처지들을 알고 있었기에 작품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의도한 바를 들을 수가 있었죠. 첫악장이 끝나고 완전히 혼란스럽고 불안한 마음을 가진 채 쇼스타코비치에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저야 쇼스타코비치에겐 어떻게 질문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말했죠. “저기요,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제가 틀렸나 모르겠습니다만 이 곡이 극히 슬픈 작품 아닌가요?“. 그러자 쇼스타코비치가 제게 고개를 돌려서는 낮은 음성으로 말했죠.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분명 지휘자님 모골이 서늘해 지는 기분이었겠네요. 아니요, 전혀 모골이 서늘해 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작품을 올바로 들었단 사실이 기뻤을 뿐이었죠. 하지만 아마도 쇼스타코비치가 청중에게조차 자기 작품에 담긴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단 사실에는 모골이 서늘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런 기억이 나네요. 제가 런던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이 교향곡을 연주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쪽 사람들이 말하더군요. “아, 안돼요, 작년에 쇼스타코비치가 직접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들이 이 교향곡을 지휘했죠. 그 교향곡 우리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이 제게 대단히 친절했는지라 제 요청에 굴복하게 됐죠. 이 공연을 위해, 청중이 곡에 달리 접근하는 길을 터주고자 베를린에서 저희 희곡작가인 한스 비터리히(Hans Bitterlich)에게 쓰라 한 소개문을 런던으로 공수해 오는 데 성공했죠. 첫째 결론은요. 다음날 타임즈에 글이 실렸죠. “우리는 제대로 사고전환을 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껏 작품을 완전히 잘못 들어 왔다“. 둘째 결론입니다. 제가 그 뒤에 서너 번 더 런던에서 이 곡을 연주했죠. 그 연주들은 제가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회고할 수 있는 것들에 속합니다. 쇼스타코비치와 그런 걸 가지고 대화를 나눠 보실 수 있었습니까? 쇼스타코비치는 아주 마지못해 억지로 자기 작품에 대한 얘기를 했죠. 제가 국립가극장에서 했듯 우회적으로 표현하여 질문들을 던지면 그 중 하나 정도에는 답하였습니다.

다른 경우인데요. 제가 처음으로 쇼스타코비치의 5번 교향곡을 모스크바에서 연주했을 때 아마도 쇼스타코비치가 아람 하차투리안과 공연장에 동석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전통적인 지휘방식관 달리 넷째 악장을 철저하게 달리 연주했죠. 화사하고 과장되게 시작하는 대신에 모든 걸 쓸어 버리는 기계를 돌리듯 템포를 최대한 빨리 잡았죠. 공연 뒤에 쇼스타코비치가 하차투리안과 함께 제게 와서는 온갖 칭찬하는 말을 해줬죠. 그때 하차투리안이 물었죠. “혹시 넷째 악장의 초반 템포가 너무 빠른 거 아니었나?“. 그러자 쇼스타코비치가 아주 흥분해서는 이렇게 말했죠. “아니, 아니, 그렇게 연주하게 놔둬, 그렇게 놔두라고!“. 쇼스타코비치야 꽤 몇 년간을 자신이 구상한 대로 곡이 연주되지 않아도 용인하고 있었던 거죠. 제 생각에 쇼스타코비치 작품들엔 달리 다뤄 져야만 할 점들이 꽤 있죠, 제가 했던 것처럼요. 그리고 쇼스타코비치는 제가 틀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렌보임이 최근에 자신에겐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별로 복잡하지 않아서 쇼스타코비치를 건드려 볼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만약 바렌보임이 언젠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들을 지휘하게 된다면 쿠르트 잔덜링이 그에게 보여준 방침을 따르려 시도할 것이다.

지휘자님은 분명 흔적을 남기셨죠, 바렌보임에게만 남긴 게 아니고요. 네, 흔적만으론 한계가 있죠. 확실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들이 실책을 저지르는 걸 막아 내긴 했지만요. 그렇지만 쇼스타코비치 해석에서 전세계적으로 근본적인 자극을 주는 데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저로선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겠네요. 그런데 우리 대화를 들으면 나만 모든 걸 옳게 하고 다른이들은 죄다 틀렸다는 인상이 생길 수 있겠네요. 그건 완전 말도 안 되는 거죠. 그럼에도 많은 서방 지휘자들이 쇼스타코비치를 다루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50년대 말에 자신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레닌그라드에 초청연주를 하러 왔던 유진 오먼디 기억이 나네요. 오먼디가 프로코피예프 5번과 쇼스타코비치 5번을 지휘했죠. 프로코프예프 5번은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지만요 쇼스타코비치 5번은 완전히 글러먹었죠.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이 살아온 처지를 정확히 이해해 주기를 진심으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5년 전에 지휘자님이 마지막 공연을 가지시곤 더 이상 지휘를 하지 않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총보를 보십니까? 그럼요! 오늘도요. 아마 믿지 않으실지도 모릅니다만 제가 쉰 번 이상을 지휘했던 차이코프스키 6번 교향곡을요. 그게요, 요즘에는 제가 지휘했던 많은 걸작들을 검증해서 지금껏 놓치고 있었던 점까지 세세히 파고들 만한 시간과 짬이 나거든요. 해석자에겐 항상 큰 어려움들이 있죠. 저야 이제는 공연하는 걸 생각할 필요가 없고요. 정해진 기간까지 완수해야 하는 압박감 없이 작품들을 세세히 파고들어 어떻게 이 곳을 연주해야 하는지 여부를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검증해 볼 수 있는 행복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제 지휘자님은 완전 남이 듣지 못할 음악에 둘러싸여 사십니다만 그게 오로지 지휘자님만의 훈련을 위한 겁니까? 아니요, 제가 즐기기 위해서죠! 저를 훈련시키려는 게 아니지요. 몇몇 경우에는 아마도 놓치고 말았던 것들을 침착하게 만회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요. 그것 말고는요, 총보 속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겠단 목적도 있습니다. 마치 지휘자님이 곡들 속에서 산보를 다니는 듯 들리네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아마도 다소 대담한 비유긴 합니다만 아주 틀리지도 않았어요. 며칠 전에 훑어본 곡이 시벨리우스 4번 교향곡인데요. 왜 하필 그 곡을요? 제가 사실상 딱 한 번 그 교향곡을 지휘했는데 그게 음반으로 녹음되었죠. 제가 곡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을 풀어내지도 끄집어내지도 못했다는 의구심이, 그것도 제대로 된 의구심이 요즘 들었거든요. 제가 아마도 그 당시에는 그 작품의 심오함이 담긴 마지막까지를 파악하지 못한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 어느 정도 죄를 진 기분이었죠, 이제야 만회한 거 같습니다. 작품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 내셨다고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음악적 예술작품엔 끝이란 게 없습니다. 작품들은 항상 각 시대에 맞게 새로이 연주되고 느껴 져야 하기에 항상 새로운 걸 발견해야만 합니다. 아마도 우리들이 이전 세대들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곡의 심오함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이전 세대들은 오늘날처럼 그리 대단한 끔찍함을 보지도 못했고 그리 대단한 고독도 체험하지 못하였죠.

엄청 오랜 기간에 걸쳐 음악활동을 해오셨습니다. 음악하는 게 변화했나요? 네, 대단히요. 이게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 건 아닙니다만, 음악하는 게 더욱 빨라졌고 그럼으로써 몇몇 경우엔 더욱 인정이 없어졌고 더욱 빈약해 졌죠. 예전에는 깊이가 있다고 말하곤 했습니다만. 제가 일전에 라디오에서 쇼팽의 위대한 E플랫장조 왈츠 Op 18을 들었습니다. 제가 그 곡을 모르고 있었다면 그 곡의 멜로디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에요. 누가 연주했는지 모르지만 정말 끔찍했어요! 아무리 대단한 음악이라도 순전한 기곗소리로 변질될 수 있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한계가 있음을 사람들이 간혹 알아내지 못합니다. 요즘엔 느린 데는 너무 느리고 빠른 데는 너무 빠르게 연주합니다. 그런 건 제 취향이 아니에요. 인용구가 하나 있는데요, 누가 한 말인진 잘 모르겠네요. 연주하기가 노래하기와 분리되어서 그런가? 너무 많은 연주자들이 더 이상 자신의 경험으로는 노래를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알아낼 수 없어서 그런가? 어느 정도는 그런 것들이 원인이겠죠. 그렇지만 빨리 연주하고, 그러니깐 기교를 부려야 잘 팔리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요즘에도 작품 하나가 어떻게 연주되어야만 하는지에 관련된 오염 되지 않은 감성과 완전한 이해심을 가진 해석자들이 항상 있단 거죠.
작성 '13/05/17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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