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 (친일인명사전 수록 전문)
http://to.goclassic.co.kr/artist/706
'불의는 참을 수 있어도 불이익은 참지 못한다'는 가치관을 가지신 분들이 홍난파의 친일행위에 대해 감상적인 동정을 하는군요.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홍난파에 관한 글 전문을 게재하니 홍난파를 친일파로 분류하는게 정당한 건지 부당한 건지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홍난파 洪蘭坡│森川潤, 1898~1941

양악 작곡가·조선음악협회 평의원·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1898년 3월 19일 태어났다. 출생지는 서울 또는 경기도 남양(南陽)으로 알려져 있다. 본관은 남양이다. 본명은 홍영후(洪永厚)다. 필명으로 나소운(羅素雲), Y·H생(生), ㄷㄹㅁ, 도례미(都禮美), 도레미 생(生), 솔·파생, ㅎㅇㅎ 등을 썼다. 1910년 9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청년학관 중학과에 입학해 1914년 3월에 졸업했다. 청년학관에 다니면서 1912년 4월에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서양악부(西洋樂部) 성악과에 들어가 음악공부에 전념해 1913년 4월 제2회로 졸업했다. 같은 해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에 입학해 바이올린 연주가로 활동하면서 1914년 3월 졸업했다. 다음 해 1월 서양악부 교사로 임용되었다. 1918년 4월 관립 도쿄(東京)음악학교[일명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 현재 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 예과에 입학해 1919년 3월에 수료했다. 같은 해 2월 일본에서 음악·미술·문학 분야를 다루는 잡지 《삼광》을 창간하고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1922년 9월 전문적인 음악연구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설해 운영했다. 1926년 3월 도쿄고등음악학원[현재 구니다치(國立)음악대학] 선과(選科)에 바이올린 전공으로 입학해 본과로 진학한 후 1929년 3월에 졸업했다. 
귀국 후, 1929년 9월 중앙보육학교 음악 교유(敎諭)에 취임했다. 1931년 9월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음악학교 연구과에 입학해 1932년 6월에 졸업하면서 음악학사를 취득했다. 셔우드음악학교에 재학 중이던 1931년 12월 미주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했다. 1933년 4월 경성보육학교 음악 주임교유에 취임했다. 1934년 6월 일본 빅타(Victor)축음기주식회사 경성지점 음악주임에 취임했다. 1935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강사를 지냈다. 1928년에 도쿄신교향악단(東京新交響樂團 : 현재 NHK교향악단)에 입단해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했고, 1937년 11월에는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취임했다.
작품으로는 〈봉선화〉[기악곡 〈애수〉(1920.4)에 후일 김형준이 가사를 붙여 ‘鳳仙花’로 불려졌다] 등의 가곡, 〈고향의 봄〉(이원수 작사, 1929.10) 등의 동요, 〈애수의 조선〉(1927.8) 등의 기악곡 등 150곡이 넘는 곡을 작곡했고, 《조선동요백곡집》(1929.10, 1930.4, 1933.5) 등의 작곡집을 발간하는 한편 《악전대요(樂典大要)》(1916.4) 등의 음악 관계 서적의 저술과 편저 활동을 했다. 많은 장편·단편소설도 집필해 《처녀혼(處女魂)》(1921.5) 등 창작집을 발간했고, 《청춘의 사랑》[도스토예프스키 원작의 《가난한 사람들》(Poor Folk), 1923.6]·《나나》(에밀 졸라 원작, 1924.6) 등도 번역해 출간했다. 저서와 번역서는 20여 종이 있고, 이외 신문·잡지에 많은 글과 평론을 발표했다. 국내와 일본을 오가면서 여러 학교에서 음악교육 활동도 펼쳤다. 
미국 유학 중 흥사단에 가입한 일로 1937년 6월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으로 검거되었고, 이 시기를 전후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내용의 가요를 작곡하는 한편 단체에 가입해 활동했다. 같은 해 7월 빅타축음기주식회사 경성지점 음악주임을 사임했고, 8월 경성보육학교 음악 주임교유를 사임했다. 1937년 8월 21일 ‘석방 또는 송치’되었다가 10월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思想轉向に關いての論文)을 제출했다. 자필로 쓴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에서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맹한 적이 있는 필자는, 그 동기 여하와 그 활동 유무를 막론하고 후회가 막급할 뿐 아니라, 민중의 지도자의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서 차제에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상전향을 결의하고 나의 그릇된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꿔 과거를 청산하고, 금후는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건한 사상과 정당한 시대관찰로써 국가에 대해 충성을 꾀하며, 민중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라며 글을 마쳤다. 1938년 6월에는 동우회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 가입하면서 조선 민중의 행복은 내선(內鮮) 두 민족을 하나로 하는 대일본 신민이 되어 신동아건설에 매진함에 있다.는 취지의 ‘전향성명’을 발표했다. 대동민우회는 민족주의·사회주의 두 진영의 사상 전향자들을 회원으로 한 단체로 반(反)공산주의 운동을 전면에 내걸고 일본의 대국가주의(大國家主義) 사상을 추종했다. 
1937년 5월 창립된 친일문예단체 조선문예회(朝鮮文藝會)에 김억(金億)·이광수(李光洙)·최남선(崔南善) 등의 문인, 이종태(李鍾泰)·박경호(朴慶浩)·함화진(咸和鎭)·현제명(玄濟明) 등의 음악인과 함께 위원으로 참여해 활동했다. 조선문예회는 조선의 가요를 정화해 일본의 국체(國體)와 전시체제의 선전물로 전환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외곽단체로 조직한 단체다. 같은 해 9월 매일신보사가 주최하고 조선문예회가 후원해 일본군의 중국 바오딩(保定) 점령을 축하하고 ‘황군(皇軍)’에 감사하자는 목적으로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바오딩함락 축하 황군감사 대음악회’에서 자신의 작품인 〈정의의 개가〉(正義の凱歌 : 최남선 작시)와 〈공군의 노래〉[空軍の歌 : 스기모토 나카오(杉本長夫)작시]를 작곡해 발표하는 한편 제2부에서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이날 공연 수익금은 황군위문을 위해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경성고등음악학원이 주최하고 경성군사후원연맹과 경기도군사후원연맹의 후원으로 열린 음악보국대연주회(音樂報國大演奏會)에 출연해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이 연주회 출연자들도 수익금 모두를 국방헌금으로 헌납할 것을 결의했다. 
1938년에는 천황의 분부를 받들어 팔굉일우(八紘一宇)로 대아세아의 대공영권을 건설하여 일장기 날리면서 자자손손 만대의 복 누릴 국토를 만들자는 〈희망의 아침〉(이광수 작사)을 작곡해 《가정가요》 제1집에 발표했다. 이 노래는 1941년 1월 7일부터 25일까지 가창지도곡으로 선정되어 여러 차례 라디오로 방송되었다. 1939년 10월에는 라디오로 방송된 ‘애국가곡집’ 프로그램에서 경성방송관현악단이 연주한 〈대륙행진곡〉·〈황국정신으로 돌아가〉(皇國精神にかへて)·〈애마 진군가〉·〈부인종군의 노래〉(婦人從軍の歌)·〈태평양행진곡〉 등을 지휘했다. 
같은 해 11월에 방송된 〈우미유카바〉(海行かば : 바다로 가면)·〈기념식행진곡〉·〈애국행진곡〉 등과, 12월에 방송된 〈태평양행진곡〉 등을 연주한 중앙방송관현악단을 지휘했다. 1940년 11월 ‘기원2600년 봉축기념 현상 당선곡’인 〈순정의 꽃장사〉를 작곡했다. 1941년 2월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지휘해 〈국민총력의 노래〉·〈모두 병사다, 탄환이다〉(みんな兵士だ彈丸だ)·〈새벽에 빈다〉(曉に祈る)·〈출정병사를 보내는 노래〉(出征兵士を送る歌)·〈열사의 맹서〉(熱砂の誓) 등을 방송했다. 1942년 11월 열린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상위원회에서 홍난파 작곡의 〈산에 들에〉(山に野に : 김안서 작사)가 〈어머니의 마음〉(母の心 : 양주동 작사, 이흥렬 작곡)과 함께 가정가요 부문 문화상 추천 작품으로 선정되었다. 문화상위원회는 흙에서 일하는 기쁨을 노래하고 작곡 역시 경쾌하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산에 들에〉도 〈희망의 아침〉과 함께 《가정가요》 제1집에 수록되었다. 
1940년 7월 7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사변 3주년과 반도문화의 여명 ― 지나사변(支那事變)과 음악〉에서 “과거에 있어서 국민가(國民歌)다운 국민가를 가지지 못했던 우리로서는 애국행진곡 같은 신(新)국민가를 가지게 된 것만으로도 이번 사변이 일억 국민에게 보내준 선물로 우리는 영원토록 언제나 이 노래를 고창함으로써 새로운 감격과 불타는 애국열을 고조시킬 것이 아닌가. 때는 바야흐로 기원 2600년! 성전도 이제는 제3계단에 들어가서 신동아건설의 대업이 하루하루 더욱 견실하게 실현되어가는 이때에 총후(銃後)에 있는 여러 음악가와 종군(從軍)했던 악인(樂人)들의 원정(援程)에는 의당히 넘쳐흐르는 감격과 예술적 감흥이 성숙해 갈 것인즉, 이번의 성업(聖業)이 성취되어 국위를 천하에 선양할 때에 그 서곡으로 그 전주적(前奏的) 교향악으로 음악 일본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낼 날이 1일이라도 속히 오기를 충심(衷心)으로 비는 바이며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과 기량(技倆)을 기울여서 총후국민으로서 음악보국운동에 용왕매진(勇往邁進)할 것을 자기(自期)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941년 1월 조선음악협회 결성대회에서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조선음악협회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알선으로 학무국 내에 사무실을 두고 ‘음악의 건전한 발달과 음악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여 신체제 문화의 발달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모든 음악계를 포괄하는 최대의 단일 조직이었다. 조선음악협회는 음악보국주간연주회 등의 연주회를 주최하고 후원하면서 음악이라는 직능으로 체제에 부응하고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활동을 주도했다. 같은 달 29일에 열린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회의에서 음악인으로 이철(李哲)·박경호(朴慶浩) 등과 함께 문화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는 ‘문화활동에도 신체제를 갖추고 활동 분야에 따라 민중을 지도하고자’ 설치되어 〈국민총력의 노래〉·〈애국반의 노래〉 등의 제정 보급, 전쟁 시국에 부합하는 《국민가집》의 발간과 보급,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행진가인 〈이겼다 일본〉의 작곡과 보급, 국민개창운동 등의 활동을 주도했다.
1941년 8월 30일 경성요양원에서 사망했다.
작성 '13/09/1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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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1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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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

예전에 장준하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이 그러시더군요. '일제시대 때 식민지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인 순사가 길 가다 아무 한국인 학생이나 잡아서 맘에 안든다고 뺨을 후려쳐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때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라도 판단을 갈릴 수 있다고 봅니다. 이등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하여 '반도인'의 지위를 조금이라도 높이는 것이 '권리'에 있어서도 내선일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특히 그것이 본인과 본인 주위의 사람들의 신분 확립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천부당만부당한 것만은 아니겠죠. 모든 사람이 모든 면에서 존경할만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니까요.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지 못하죠.

그러나 그럼에도, '대일본제국'이 속절없이 허물어 내린 이후에도, 그때의 '도덕적 과오'는 차치하고라도, 그때의 (일제가 영속하리라는) '판단 착오'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것은 실로 큰 문제라고 봅니다. 일본에서만 해도 당시의 일본을 휩쓸었던 군국주의의 비합리성과 사회적 구조적 부조리에 대한 고민과 비판이 비교적 깊이있게 이루어졌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 같은 이의 위상은 그때 확립된 것이죠. 반면에 한국의 주류 '보수'는 그저 친일에서 친미로 바꾸었을 뿐이고 지금껏 그걸로 먹고 사는 꼴로 보입니다.

13/09/14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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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

'도덕적 반성'은 언감생심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개탄하게 되는 것은 그네들의 '현실적 판단 능력'입니다. 지금이 일제의 패망 직전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지금의 '미제'가 당시의 일제보다는 자신의 제국을 좀 덜 말아먹었다는 차이 밖에 없는 듯 합니다. 부디 '미제'가 더 망하기 전에, 한국 사회의 이성적 판단 능력이(최소한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더 성장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난파상을 둘러싼 설왕설래에 대해 착잡해 하는 분들은 이런 바람과 현실이 얼마가 먼 거리에 있는 것인지 절감하시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13/09/14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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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도덕과 양심이라는 건 이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성만 따지면 도덕을 지킬 필요가 없죠.
양심 지켜서 잘 사는 사람 봤습니까?

일본이 망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착오.
일제치하 안에서라도 백성을 잘 살게 하자는 각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선일체가 되면 조선인은 사라지는 데 말입니다.
아무 의미없는 고민인 것입니다.
그들의 비겁함을 굳이 변명해줄 이유가 없습니다.
한 사회의 엘리트, 지식인 계층의 책무는 막중하기 짝이 없습니다.
일반인이 친일한거랑 사상의 선도적 위치에 있는 지성인의 변절은
차원이 다르죠.

13/09/14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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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

만일 윗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홍난파는 자발적으로 친일 부역에 나선 문화예술인이 확실해 보입니다. 그런데 어리둥절한 것은 그럼에도 홍난파를 친일예술인으로 분류하기 애매하다는 사람들이 꽤 있는 듯하다는 점입니다. 오늘자 경향신문의 한 꼭지에서도 음악원 민경찬 교수가 그런 말을 했다더군요.

13/09/14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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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16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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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

일제 식민지배가 한반도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뉴라이트(라고 부르기도 민망하지만)과 같은 시각을 가지고 계시군요.
이런 문제에 대해 저는 용서할 수 있는 한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는데요, 친일행위를 한 당사자의 사죄, 반성, 그리고 이에 기초한 헌신이 있었냐는 겁니다.
혹시 안익태, 서정주 등이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사죄했다는 얘기 들어보셨나요?

13/09/1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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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17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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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

홍난파만 그렇게 하지말고 제발 박정희도 친일파 며 일본군 장교였으니까 제발 키보드만 치지말고 박정희 친일행적 고클 회원들 카페라도 하나 만들어서 활동 해보시지....그리고 촟불 집회도 하세요 많이 모일걸요 행동하는 양심이 필요하죠~

13/09/18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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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18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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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

윤이상 작곡가가 뭘 그리 철저히 북한 편에 섰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가 반민족 부역자들이 행한 것에 비견될 정도로 대한민국의 국익이나 대한민국 국민에게 해를 입히면서 북한의 국익이나 북한 국민에게 이득을 주기라도 했나요?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무슨 반민족 부역자 따위를 윤이상 같은 사람과 비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잘못에 대한 지적을 "업적을 깡그리 무시하는 우"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님에겐 그의 친일 과거를 매번 되새김질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전 그런 시각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치와 그 부역자들에 대한 단죄에 이은 되새김질에 비추어보면 친일에 대한 단죄나 당사자의 참회가 없었던 우리는 아무리 되새김질을 해도 모자랄 것 같네요.

13/09/1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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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18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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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

제 글의 무엇을 보고 "윤이상을 예술적으로 폄하하는 것으로 해석"한 거라고 하는 건지 황당하네요.
그리고 누가 "대량 학살"을 주장했다고 그것을 단죄와 동일시하는지도 황당하고요.
또 말씀하신 아프리카 지식인 따위가 어떻게 친일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것이 발전을 저해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정말 황당할 따름입니다.

13/09/20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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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0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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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

논점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시는데요, 전 그런 이야기에 일일이 대응하고 싶은 생각이 없으니까 그런 이야기들은 뭐 그렇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한들 그게 반민족 부역자의 이름을 건 상을 거부한 일과 무슨 상관인데요?!
반민족 부역자의 이름을 건 상을 받지 않겠다는 일이 말씀하신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며 뭐가 어떻게 문제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기실 문제라고는 수상 거부가 님의 마음에 안 든다는 점밖에 없는데도, 논점에서 벗어난 이야기들로 수상 거부에 무슨 문제가 있기라도 하는 양하는 걸로 밖에 안 보이네요.

13/09/2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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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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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1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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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

각 번호에 대한 제 댓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2. 반민족 부역자의 이름을 건 상은 얼마든지 거부할 만하다.
3. 수상 거부는 "홍난파의 음악적 업적"과 무관한 이유로도 얼마든지 행해질 수 있는 일이다.
4. 아무런 단죄도 참회도 없었던 터에 우려먹듯이 한다는 말은 말도 안 된다.
5. 반민족 부역자의 이름을 건 상을 거부한 일을 그와 무관한 일과 비교하며 지나치기라도 한 양하는 것도 말도 안 된다.

반민족 부역자의 이름을 건 상을 거부한 일 이야기와는 무관한 "정치 쟁점화 문제" 이야기 등을 하니까 논점에서 벗어났다는 거고, 친일 청산 이야기를 되새김질해서 나는 역작용이란 반민족 부역자의 후예나 님과 같은 분의 마음에 안 든다는 점밖에 없다는 게 제 요지이고요.

13/09/2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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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

윤이상은 종북 주의자 맞습니다. 김정일과 김일성을 수시로 만나면서 북한정권에 입맛에 맛는 행동들은 많이 했죠.아니그러구 공산주의국가 북한이 그렇게 좋고 동경스러우면 북한에 가서 살지 왜 한국에서 살면서 왔다갔다 하죠?? 아주 편하게 북한으로 보내주자구요. 위대한 수령동지 대를이은 김정은 동지와 천년만년 영화누리시라구요..윤이사의 행적 링크걸어봅니다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bullpen&mbsIdx=1938592
하지만 전 윤이상의 음악에 대해서는 별개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정치색이 없고 순수한 좋은작품은 좋은 평가를 받아야된다고 봅니다.

13/09/1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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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a***:

윤이상은 1963년 어릴 적 친구 최상한 씨를 만나보고 싶어 평양을 단 한 번 갔던 일로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제시하신 자료는 "63년부터 북한을 자주 왕래하였으며"라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요.

제시하신 자료는 그 거짓말을 비롯한 오류와 과장 그리고 논리적 비약 등으로 점철된 엉터리로 보일 뿐이네요.

13/09/18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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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

63년 처음으로 평양을 간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두 번째로 방북한 79년 이후에는 왜 북쪽을 찾은 것일까.

69년 동백림 사건에서 석방돼 독일로 돌아온 윤이상 선생은 다시 고향 땅을 다시 밟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그가 작곡한 오페라 <심청>이 성공적으로 공연되자 그는 남쪽을 찾아 다시 공연을 하고 싶어했고 박정희 정권도 그의 명성에 기대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7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 사건이 터졌다. 그의 외국인 친구들은 ‘야만적인’ 남쪽 정부의 처사에 항의해야 한다고 했고, 윤이상 선생 역시 동백림 사건의 악몽이 되살아나 남쪽 방문을 포기한다. 1980년대 초반에도 전두환 정권이 그를 수차례 초청했지만, ‘광주의 학살’을 알고 있는 그는 차마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남쪽에서 점점 ‘반한 인사’로 낙인찍혀 갔다.

윤이상 선생이 먼발치로만 고향을 바라보며 독일에서 슬프고 외롭고 어둡게 지내고 있을 때 김일성 전 주석이 79년 그를 평양으로 초대했다. 김 전 주석은 “우리나라의 예술을 해외에 알리는 재간둥이”라고 칭찬하면서 음악연구소를 만들어 북쪽의 음악계를 위해서 일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 뒤로 윤이상 선생은 1년에 한두 차례씩, 한 달 정도 평양에 머물면서 윤이상 관현악단 단원들에게 음악교육을 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110568.html

13/09/18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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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

음, 좀 논점일탈일수도 있는데,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국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건 작금에 와서 부정하기 어려운 하나의 사실로 볼 수밖에 없죠(사실 '크게 기여했다'는 식의 표현조차 쓰기 민망하지 않나 싶네요.). 교과서에 나와있는 근대 사회의 맹아니 뭐니하는 건... 그저 레토릭 이상으로 받아들이기 곤란하구요. 이 논지를 그대로 적용할 경우 중국은 무려 남송 시절부터 근대가 태동되고 있었다라고 말해도 무방하달 걸 생각해본다면, 학적 인식이라기보단 하나의 이념적 공상 이상에 불과할테죠.

물론 이게 일제의 식민지배를 정당케 하는 주장의 기반이 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일 것이며, 그 지배 아래에서 살아가는 개별 인간의 선택에 어떤 정합성도 부여하긴 어렵다고 봅니다만(19세기 중후반 문명개화/사회진화론에 입각하여 변법자강을 주장하던 양계초의 현실 인식이 틀려먹었다고 말하긴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어떤 윤리적 정합성이나 필연적 당위라고 보긴 더더욱 어려우니까요. 물론 같은 맥락에서 당대 지식인이 충분히 내릴 수 있는 판단이긴 하지만, 이것이 시간이 흘러 해당 시기를 대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후대에 이르러선 그저 '충분히 가능했다'는 식의 판단에만 머무르는 건 지양해야한다고 봅니다.).

13/09/19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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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

'수량'을 따지면 분명 일제가 조선왕조보단 낫죠, 아니, 이건 거의 모든 식민지에 해당되죠. 아무리 식민 모국이 꽅통에 식민지 건설한 의도가 불순해도 뜯어먹을려면 영양분 좀 투입을 해야 하니. 그런데 저 자본주의’스런’ 변화를, 정확히 말하면 일제 밑에서 떡고물 먹던 사람들이 일제에 배운 걸 고스란히 해방조선에 이식했냐는 것. 얼핏 보면, 네. 경제발전 주도한 인물 상당수가 일제 하에서 근대에 걸맞는 활동들(군인, 자본가, 행정가, 법조인 등등.)을 했고. 박정희 근대화와 일제의 성장 전략엔 공통점이 많고.

그럼에도 '해방공간' 내에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난립함을 애초부터 무시하고 들어간단 점이죠. 조봉암 같은 사민주의자들이 집권한 대한민국이 현재 대한민국과 같았을까요? 그리고 공산주의자들. 해방 이후 무섭게 건준-인공 조직을 접수하고, 곳곳에 기간조직을 건설해 쪽수를 불리고, 노동계급의 적인 봉건적 쁘띠부르조아지인 농민을 파트너로 포섭합니다. 당시 조선에서 농민들, 특히 소작민, 영세농 인구가 엄청났다는 사실이야 자명하고. 여기다 중공 내에서 군사활동을 하던 만단위 넘는 연안파가 귀환. 이렇듯 외부에서 개입하지 않았다면, 즉 '분할점령'이 없었다면 공산주의 계열에 유리하던 정세입니다. 이런 힘관계는 지주-소작 관계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일제의 원시성이 불러온 결과이죠. 그럼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반도 전체를 장악했다면요?

13/09/19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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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a***:

경성콤 계열 주도로 동유럽에 흔히 보이는 스탈린 체제로 이행했겠죠. 그래도 유가-사무라이-스탈린 혼합인 군국주의 왕조는 출현하지 않았겠죠. 결정적으로 이 '사회주의조선민주공화국'은 일제와 경제로 연결되는 체제가 절대 아니었겠죠.

일제 근대화->한국 근대화론은 1) 해방 후 근대 우파에게 공산주의-농민 세력을 압도할 역량이 있고, 2) 이들을 규합할 리더쉽, 플랜을 가진 지도부가 있었어야 성립. <- 1) 근대 우파가 앞선 건 행정-치안력인데 농민들 봉기로 순식간에 무너지기 일쑤였죠. 당시 한국군도 기반이 불안했죠. 공산 계열의 침투작전 꽤 성공했죠. 2) 이영훈 등이 이승만을 띄우는 의도를 보셔야 합니다. 전 이승만은 철저히 실패한 지도자, 박정희는 유능한 '근대' 리더로 봅니다. 문제는 당시 남한에서 가장 근대적이면서 적합한 성장 전략과 의지를 보유한 '군인집단'이 바로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다는 점. 박정희는 김일성한테 평생 절해야 해요. 따라서 한국의 성공적인 근대화는 분할점령, 농민, 전쟁부터 따지고 설명해야죠. 해방조선은 박정희, 이병철한테 안 밀리는 각종각색 인물들이 득실대는 공간이었죠. 그리고 박정희의 근대화(및 유가사상과 결별), 경제성장은 ‘독립’이란 변수가 없인 불가능했습니다. 모국의 편의에 맞춰 경제전략 짜고 투자를 재던 종속체제와 비교가 불가능. 역시나 식근론자들은 이 문제를 제대로 보지 않습니다만.

13/09/19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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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

그리고 이와 별개로 당대의 홍난파를 후대에 와서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지금의 류재준 역시 그리하지 못할 이유는 없어뵈네요.

13/09/19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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