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의 과실에서 태어난 CD
http://to.goclassic.co.kr/artist/972

이 글은 원래 작년 만우절에 써 먹으려고(^^;;) 아래 음반의 내지를 번역해 두었던 것인데, 당시에 갑작스레 일이 꼬여서 써먹지를 못했습니다..ㅎㅎㅎ 반일 감정이 상당한 요즈음에 올리기에는 적절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냥 두기는 아까워서 이른바 "봉인해제" 하는 셈 치고 올립니다.

 

 

고의의 과실에서 태어난 CD

 

사토 마사하루(佐藤正治)

 

이것은 1986년 10월 22일, 막 오픈한 산토리 홀에서 세르주 첼리비다케 지휘의 뮌헨 필이 연주한 라이브 녹음이다. 뮌헨 필로서는 첼리비다케를 예술감독으로 맞이하고 첫 일본투어로, 이 콘서트가 그 투어의 최후 공연이었다. 앞서 이뤄진 도쿄의 두 공연을 방송수록한 당시의 FM도쿄는, 갑자기 일본에서 유일하게 연주되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5번도 방송녹음을 원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이 프로젝트의 담당이었지만,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에게 녹음의 최종적인 OK를 받은 것은 콘서트 당일 나고야에서 도쿄로 돌아오는 신칸센 안에서였다.


그런데 산토리 홀에서의 회장 연습을 끝내고 연주 시작 5분 전이 되자, "방송은 NO, 녹음은 그만두었으면 한다" 는 지시가 첼리비다케로부터 날아왔다. 일본에서 단 1회의 브루크너, 거기에 새로운 홀로 갈아타는 게네프로와 생방송이라는 불안재료 앞에 첼리비다케는 그 전날의 연주가 방송되는 것에 망설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순간의 판단으로 방송은 불가능해도 녹음은 남겨둘만하다고 생각하여, 극비리에 녹음테이프를 계속 돌려 두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고의의 과실에 의해 녹음된 U매틱 테이프 4개는 결국 파기되는 운명으로 카지모토(梶本)음악사무소의 보관고에 20년 동안 잠자고 있었다. 이번 여름에, 첼리비다케의 아들과 뮌헨 필에게 들려준 결과, 음질과 연주 모두에서 시판되고 있는 CD를 뛰어넘는 것으로, 전세계의 애호가를 위해 꼭 발매하고 싶다는 답을 얻었다.

 

또한 1986년 10월 28일자 요미우리신문 석간에서는 이날의 연주를 “산토리 홀의 탄생으로 그의 철학의 진의가 이 낭만파를 대표하는 장대한 교향곡을 통하여, 유례없이 도쿄의 청중에게 피력되었다는 것은 특필할 가치가 있는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연주가 갖는 의미는 대지휘자의 팬, 그리고 막 태어난 홀에 있어서 무한하게 관계가 깊다.” 라고 평하였다.


첼리비다케와 뮌헨 필과의 첫 방일에서 남은 기념비적 명연

 

1996년 8월 14일, 파리의 자택에서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급서하고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사이, 첼리비다케가 생전에 거절하였던 수많은 방송 녹음들이 세상에 나와서, 실황을 접할 수 있던 음악 팬에게도 첼리비다케의 예술은, 말하자면 그 전체라고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상당히 양호한 형태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한 “귀한 음원”의 광맥은 거의 다 캐내졌나 싶던 중에, 일본에서 생각지도 않은 녹음이 발매되게 되었다. 첼리비다케가 일본공연에서 처음으로 지휘한 1986년 산토리 홀 라이브가 그것이다.

 

첼리비다케가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은 것은 1977년 10월, 요미우리닛폰 교향악단의 객연이었다. 이듬해 3월 다시 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그 예풍의 편린을 일본 청중에게 보였다. 이어서 1980년 4월 런던 교향악단과 내연하여 브람스 교향곡 1번, 무소륵스키 《전람회의 그림》 으로 이채로움을 발하는 그의 예술을 강하게 인상지었다. 그 직후에 뮌헨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에 취임하여 바이에른에서의 황금시대가 시작한다. 단기간 동안에 명성을 쌓아올린 첼리비다케는 뮌헨시에 적극 요청하여 1985년 11월에 가스타익 문화센터 내에 필하모닉 본거를 얻었다. 1986년의 일본투어는 첼리비다케와 뮌헨 필의 관계가 하나되어 피크에 다다른 시기에 이뤄진 것이다.

 

10월 11일, 마츠도(松戶)에서 시작한 투어는 홋카이도(北海島), 카나가와(神奈川), 도쿄, 오사카, 후쿠이(福井), 나고야를 돌아서 22일 산토리 홀에서 끝나는 밀도 높은 것으로, 이동하는 하루 동안 연주회를 여는 일정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74세의 첼리비다케는 그러한 일정을 정력적으로 소화하였다. 모두 10회 공연 동안 9공연까지가 《전람회의 그림》과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메인으로 한 것으로, 최후의 산토리 홀만이 브루크너 프로였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당시의 첼리비다케는 브루크너의 음악이 일본의 청중에게 받아들여질지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 시금석으로서 한번만 연주한 것이 이 브루크너 5번이었다는 것이다. 청중의 반응에 대해서는 대만족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얻은 확실한 보람은 1990년 방일시 4, 7, 8번, 1993년 3, 4번의 프로그램으로 이어졌다.

 

녹음을 듣고 그때의 고양된 기분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첼리비다케의 실황은 이미 여러 번 접했는데, 브루크너를 듣는 것은 처음이다. 게다가 최고봉의 하나인 5번이라는 것 때문에 기대가 더욱더 높아진다. 만년은 앉아서 지휘하던 마에스트로지만 86년의 시점에서는 긴 시간을 똑바로 서서 지휘하고 있었다. 그것이 템포나 리듬에도 미묘한 영향을 주고 있음은 틀림없다. 어쩌면 음악과 관계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신체조건이 후년의 침착하고 여유 있는 발걸음과는 미묘하게 다른 추진력을 겸비하는 브루크너 연주를 만들어내고 있었음은 틀림없으리라. 물론, 최만년의 깊고 그윽한 세계도 더없이 매력적이지만, 장년기의 패기를 함께 지니는 이 브루크너 연주에는 단 한 번의 기회라는 오싹함이 있다. 작품의 구조를 확실히 꿰뚫어볼 수 있는 것도 당시의 첼리비다케 뿐이다. 이 연주에 완전히 얻어맞은 나는 이후 뻔질나게 뮌헨을 왕래하게 되었다. 그만큼 임팩트 강한 콘서트였다.

 

첼리비다케 특유의 정묘하기 그지없는 울림은 마이크에 잡히기 어려운 것이 틀림없다. 그것이 녹음을 꺼렸던 큰 이유의 하나다. 그래도 이 녹음에는 마에스트로 특유의 조용히 확산하여 홀에 녹아들어가는 듯한 울림이 어지간한 부분까지 포착되어 있다. 이만큼 재현성 높은 첼리비다케 녹음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 솔직한 인상이다. 여기에 진짜 첼리비다케의 예술이라고 부르기에 걸맞는 음의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 이상 나의 감상을 열거하는 것은 군더더기일 뿐이다.

작성 '20/02/26 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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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

감사합니다. 소중히 잘 읽었습니다

20/02/2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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