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5 KBS심포니 독일 레퀴엠
http://to.goclassic.co.kr/concert/2965


오늘은 용인 죽전역 인근에 위치한 포은 아트홀에서 브람스의 대작 독일 레퀴엠 공연을 보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KBS 심포니와 합창계에 두각을 나타내는 세 개의 합창단 (서울모테트합창단, 안산시립합창단, 고양시립합창단)이 연합하여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연합합창단과 KBS 심포니는 기대에 부응하듯 안정감있으면서 다이나믹을 잘 살려 연주하였다. 다만, 여리게 흐르는 부분에서 보다 자신감있게 치고 나오지 못하는 것은 연합합창단의 한계였던것 같다. 소프라노 강혜정은 머금어 청아하게 뻗어내는 소리가 좋았는데, 바리톤 슈테판 겐츠의 경우 시차때문인지 좋은 컨디션은 아니었다.
 

주지하다시피 레퀴엠은 죽은 이를 위한 가톨릭 미사를 의미하는데,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그는, 본래 가톨릭 전례에서 쓰이는 레퀴엠 미사에 착안하여, 그 형식과 내용을 파괴한 뒤 자신만의 어법으로 인생의 무상함과 신앙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작품의 제목인 "독일 레퀴엠"에 대해 집어볼 것이 있다. 과연 원제의 형용사 Deutsches가 국가나 민족을 의미할지 아니면 언어 자체를 의미할지 하는 부분이다. 간단히 생각해보자면, 브람스 레퀴엠의 가사가 루터의 1537년판 "독일어" 성경 ("독일" 성경이 아니라)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그의 레퀴엠도 "독일" 레퀴엠이라기보다는 "독일어" 레퀴엠이 되어야 더 원작 의도를 잘 반영하는 제목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이미 유럽어권의 합창지휘자에게 확인한 바인데, 한번 한국어로 굳어진 제목이 쉽사리 바뀌기는 쉽지 않은 듯 하다).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은 무엇보다 모국어에서 느껴지는 친밀함과 심상의 강도가 라틴어의 그것과는 틀렸기 때문일텐데, 예를 들어 우리 한국인에게는 미사 첫부분이 Kyrie eleison이나 혹은 Herr erbarme dich나 모두 외국어이기에 그 느낌상 차이가 적겠지만, 독일어가 엄마의 언어일경우 후자의 흡인력은 월등할 것이다.


따라서 브람스는 작품이 가진 종교적 메시지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모국어를 사용했을테고, 또한 미사에 사용할 의도가 없었기에 굳이 미사고유문이나 통상문을 따르는 대신 보다 자유로운 형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이미 부분적인 형식과 언어의 파괴를 시도를 했던 슈베르트의 독일어 미사 (Deutsche Messe)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아무튼, E. H. Carr가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했으니, 낭만주의 시절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살았던 브람스의 음악이 오늘 여기 대한민국에서는 어떻게 해석이 되어야할까?


어쩌면 바로크 시절 바흐의 모텟이 오히려 현대의 청중들에게는 더 속도감을 주며 친근하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는데, 이렇게 낭만적으로 쳐지는 브람스의 음악은 어떤 청중들에게는 여름날의 레퍼토리로는 인내심을 요구할지도 모르겠다. 제4곡을 정점으로 그 이후는 오로지 "말씀"에 의존하지 않고 음악만 감상할 경우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게 된다. 예를 들어, 제6곡같이 메시아3부를 연상하게 하는 가사에서는 차라리 바로크 풍으로 듣고 싶다는 생각마져든다.


브람스 레퀴엠의 가사를 모국어로서 감상하는 청중과 그렇지 않고 외국어로서 감상하는 청중간에는, 가사를 새김에 있어 천양지차가 있을텐데, 예를 들어 "이제부터"라는 한글번역을 자막으로 단순히 읽는 것과 독일어 "von nun an (from now on)"이 프레이징 말미에 붙어 뻗어가는 느낌의 음악을 즐기는 것은 전혀 다르다.
 
이렇듯, 브람스의 작품이 지금 여기에 던지는 메시지는 친근한 언어사용을 통한 "토착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어, 현재 가톨릭 교우가 상을 당하면 장례미사때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나 베르디의 레퀴엠이 연주되는것이 아니고, 불교의 염불과 흡사한 토속적인 형태가 연주된다. 왜 이런식의 기도송과 전례음악이 나오게 되었을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악에서 모국어가 가지는 힘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형식 때문이라 생각한다.


갈수록 프로 합창단들의 실력은 향상되는데 왜 합창 생태계는 그만큼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되는가? 어쩌면 그 이유는 아직까지도 "그때 거기"의 음악에 집착해서 "지금 여기"에 새로운 음악을 만들 여지를 없애고 있어서는 아닐까? 또한 지금 여기의 상황을 파악함에 있어, 있는 그대로가 아니고 어께에 힘이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좋은 것이 꼭 길고 복잡할 필요는 없을텐데...


루터는 독일어 번역을 통해 성경의 의미전달을 향상시켰고, 브람스는 그 향상된 의미전달을 음악에 접목하였다. 이제 그 음악을 들은 우리 청중들은 모국어의 의미전달력을 인지하고 또 현시대의 새로운 미감을 반영하여 합창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증가시켜야 된다는 미션을 부여받는다.


인간은 풀과 같아 머지않아 마르게 되겠지만, 이 시대 이 공간의 청중들의 진정한 미학적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반영하는 음악가들의 노고는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생각한다.

[금하]

 

작성 '15/07/26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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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

우리나라 합창계가 정체되는 가장 큰 이유는
합창계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개신교 해게모니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국립합창단인데,
모든 곡을 70년대 찬송가 풍으로 연주합니다.

두 달 정도 전에 국립합창단이 독일 레퀴엠을 했는데,
그날 공연을 듣던 모 합창 지휘자는
일어나서 나가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고생했다더군요.

국립합창단은 매년 같은 레파토리만 반복하는데,
독일레퀴엠-까르미나 부라나-마태수난곡-메시아
이렇게 4곡으로 1년을 때웁니다.

그런데 그 곡들의 연주도
다른 단체의 연주보다 훨씬 떨어집니다.

국립합창단의 상임 지휘자가 가장 문제인데,
현재 국립합창단은 정기 연주회의 좌석 대부분을
교회에 맡기다시피 판매하는 실정이라
앞으로 나아질 가능성도 희박합니다.

그나마 제대로 된 합창은 원전악기 연주 단체들인데,
국립합창단에 밀려 제대로 무대도 못잡는 실정이죠.

국립 단체들의 방만한 운영과 부실한 공연의 정점이
바로 국립 합창단입니다.

대학고 합창단들도
2000년대 이후로는 교회 성가대의 연장이 되어 버렸죠.

그래서 개신교 찬송가나 가스펠이 아닌 곡은
아예 연주나 지휘를 거부하는 단원들이 부지기수일 정도입니다.

우리나라 민요도 '무당 굿'같다고 거부할 정도니
더이상 말해야 뭐하겠습니까.

15/07/26 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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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

'개신교 찬송가나 가스펠이 아닌 곡은아예 연주나 지휘를 거부하는 단원들이 부지기수일 정도'ㅡ라구요? 예고-대학-대학원을 거쳐서 음악전공을 해왔지만 해괴한 소리네요. 합창음악이 태생적으로 교회음악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한건 사실이지만, '찬송가나 가스펠이 아닌 곡을 거부한다'니, 황당하네요.

15/07/26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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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

얼마 전 대학연합 합창단 연합 모임에서 몇몇 대학교 합창단장들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자리의 다른 대학 합창단 단장들도 크게 부정하지는 않고, 정도의 차이가 잇다는 말 정도만 하더군요.
실제로 음반 발매를 위한 지휘자 선정에서 한 지휘자가 자기는 성가나 찬송가가 아니면 절대 지휘하지 않는다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것을 들은 바 있습니다.
찬불가 같은 경우는 대부분의 개신교 단원들이 연주 거부를 하기 일쑤고요.
직접 그리고 자주 겪는 일입니다.

15/07/26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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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

교회색채가 강하다는 국립합창단이 독일 레퀴엠이랑 카르미나 부라나를 즐겨 연주하는건 아이러니 하네요.
브람스는 무신론자라는 기록이 남아있고 카르미나 부라나는 기독교 적인 색채와는 거리가 있는 곡이니..

15/07/26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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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

두 곡 모두 근 10년 쨰 매년 연주했던 곡이어서
특별히 연습할 필요가 없어서
그냥 타성적으로 반복하는 것일 뿐입니다.
새로운 곡을 연습하기가 귀찮을 뿐이죠 뭐 -.-

15/07/27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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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27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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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29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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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

바로 아래에 붙어있는
아마추어이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글은
안 읽으셨습니까?

논의에 나중에 끼여들어 이의를 제기하려면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는 제대로 파악하고 끼여들어야죠.

그리고 그 시립합창단이 그러면
가스팰 만큼 찬불가도 부르던가요?

설마 찬불가에는 좋은 곡이 없어서
라고 하실 것은 아니겠죠?

개독들의 자기 변명과 합리화에는
경멸 밖에 생기지 않습니다. -.-+

15/08/01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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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

전공자나 프로와는 달리
아마추어 합창단들이기 때문에 더 자주 일어나고
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국립합창단 정기 공연을 가보면
1층 전체와 2층 중앙을 아예 교회용으로 전부 비워놓습니다.
전부 교회에 표를 넘기는 식이죠.

그리고 국립합창단 상임 지휘자의 프로필을 보시면
그 이유를 아실 겁니다.

15/07/26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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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w***:

Money talks라고 했으니 레퍼토리가 펀딩에 편향되나 봅니다.^^ 모차르트는 긴 음악을 싫어하는 교회의 요구에 짧은 미사곡을 많이 작곡했지요. 하지만 베토벤은 아예 펀딩 소스를 바꿔 대중공연을 엽니다. 요즘으로 치면 "클리우드 펀딩"의 효시라고 할까요?
추후 교회뿐만 아니고 일반인들이나 정부복지기관 혹은 기업메세나 측면에서도 음악가들의 펀딩이 더 생겨나기를 바래봅니다.

15/07/28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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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26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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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2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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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w***:

브람스는 "레퀴엠"을 작곡했지만, 기존 형식과 차별을 두었지요. 하지만 나름의 메세지를 전달합니다. 저는 "감상문"을 썼지만, 기존 형식과 차별을 두었지요. 하지만 나름의 메세지를 전달합니다.^^

15/07/2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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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https://en.wikipedia.org/wiki/List_of_atheists_(surnames_A_to_B)
http://ffrf.org/outreach/item/18436-brahms-the-freethinker
브람스의 경우 무신론자라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아마도 시대상황상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했겠지만요.

15/07/26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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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w***:

무신론자라기 보다 불가지론자는 아닐까요? 아래 분 이야기처럼 "의인화"된 신과 차별을 두는.

15/07/27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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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

불가지론자라 해도 독실한 개신교신자와는 거리가 있죠. 애초에 불가지론이라는 거 자체가 '신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르겠다'는 입장이니 개신교 신자로 보기는 어렵죠. '독실한 개신교 신자 브람스'로 접근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거 같네요.

15/08/0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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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

1.불가지론은 자연에 대한 관찰을 통해 신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보는 이신론과도 다르다.
2.대체로 종교와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유신론적 불가지론자인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도 종교라는 시스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거나 그다지 신실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편.그러니까 그냥 사교생활 비슷한 거 태생적으로 교조주의와는 충돌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교조주의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진리에 재뿌리는 불가지론자들은 유신론자라 할지라도 무신론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from 나무위키)

불가지론에 대한 정의를 봐도 신앙 고백이라는 관점이 끼어들긴 어렵습니다.

15/08/01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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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w***:

그렇다면 브람스가 이러한 종교적 대곡을 작곡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문헌에 의하면 돈때문이 아니고 "죽음"때문이라는데, 무신론자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15/08/05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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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

무신론자라고 하여 죽음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니까요. 무신론자라 할 지라도 주변인들에 대한 추모는 가능하니까요.

주변사람의 추모이든 종교적 이유이든 그건 죽은 브람스 만이 알겁니다. 하지만 브람스 본인이 직접 말하지도 않은 이유를 끼워넣어서 추측하는건 위험한 일이죠.

제 의미는 브람스 본인이 이 곡이 독실한 신앙이라는 것을 드러낸 적도 없었고 실제로는 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는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독실한 믿음으로 곡을 썼다'는건 작곡가와 곡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15/08/08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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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w***:

브람스가 "불가지론자"였다는 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인용하신 아티클에 명시되어있군요.^^ 또한 그 아티클을 대충 해석해보니 신을 부정한게 아니고 단지 교회에서 요구하는 예수에 대한 위상에 대한 견해차이이군요 (한번 잘 해석해보세요).
모차르트는 미사곡을 작곡하면서 그렇게 신심이 좋지는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고,하이든은 만년의 대작 미사곡을 작곡한 이유가 악처에 대한 불만의 표현 (예를 들어 사계 제일의 미사)이며 바흐의 비마이너는 정치인들 때문이라고 하지요.
즉 보기에 따라서 그들의 신심이 크게 왔다갔다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인용하신 문헌에서는 "유신론적 불가지론자"로 묘사되며 문화적 그리스도교인으로 이야기되는데, 다른 문헌에서는 더 독실하게 표현되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 브람스의 태도였는지 혹은 보여주고 싶은 태도였는지는 브람스 만이 알겠지요.
(그리스도인이라고 꼭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만 사는 것은 아닌것 같고 반대로 아니어도 더 가르침에 근접해 살기도 하는것 같네요^^)

15/08/09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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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w***:

브람스가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다는 표현은 본래 다른 문헌에 있던 내용으로, 저 자신도 그가 음악에서 표현하는 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긍하며 다시쓴 표현입니다.
그런데, 자유주의적 웹사이트에서 브람스는 "유신론적 불가자론자이자 문화적 크리스챤"이라는 표현을 들며 제가 쓴 것을 왜곡이라고 하시는군요.
혹시 유신론자로서의 믿음 온도차보다도 유신론자를 무신론자로 만드는 것이 더 왜곡이닐까요?

15/08/09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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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e***:

뭐 브람스가 믿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제 알바는 아닙니다. 이미 죽은 분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죠. 다만 기록들은 보면 독실한지는 의문이 드네요.확실히 저런 말들이 오가는걸 보면 뿌리깊은 믿음과는 거리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브루크너, 메시앙의 경우는 본인들의 종교적 신앙을 음악에 투영하였다는 것이 확실히 들어나고 그것이 자신의 생활에서도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브람스의 경우는 독일 레퀴엠 앞뒤의 곡들을 봐도 딱히 종교적인 내용을 드러낸 곡이 안보이는데(교향곡이든 협주곡이든 실내악이든 종교과 연관시켜 보일 부분이 잘 안보이네요) 얘만 뚝 띄어 해석해서 '브람스의 독실한 개신교관'이라고 하니 좀 이상하긴 합니다.

15/08/11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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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w***:

믿음의 여부문제와 믿음의 온도차문제는 구별이 필요한 문제인데 계속 혼돈되는것 같군요.
아무튼, "무신론자"라며 인용하셨던 문헌은 "유신론자"라는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군요.

이제, 믿음의 온도차에 있어서, 비유를 들자면, 미국 공화당 당원이 있는데, 당이 주장하는 10가지를 거의다 열렬히 지지하고 실천하는데, 단지 한두가지는 민주당 노선에 따른다고 할때, 어떤이는 그를 보고 열렬한 공화당 당원이라 할것이고 또 다른이는 한두가지를 물고 늘어져 아니라고 하겠죠.
개인적으로, 브람스가 개신교의 효시인 루터 텍스트를 이용하여 신의 이야기를 그렇게 절실히 하는것에 대해 어떠한 거짓믿음이 있었다고 생각치는 않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각자의 생각은 다르겠지요.

15/08/12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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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w***:

브람스가 종교곡을 적게 쓴 이유는, 나아가서 성악곡을 적게 쓴 이유는,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 그쪽의 재능이 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연주자"입장에서, 레퀴엠이나 혹은 사랑의 노래같은 합창곡은 다른 작곡가에 비해 비교적 단조롭습니다.
한번 비마이너를 불러보게 되면, 과연 인간이 얼마나 기악적으로 변하며 다이나믹 할 수 있을지 체감하게 되고 슈베르트나 슈만의 가곡을 부르면 반주와 텍스트의 절묘한 결합을 느끼게 되는데 브람스는 미안하지만 그러한 재미가 없습니다. 그냥 가사를 전달하기 위해 투박하게 음악이 흐르는 느낌입니다.

15/08/12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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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7/27 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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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영성'이란건 꼭 인격신에 대한 경외감에 의해 부여된다기보다 인간 자신의 자아고양에 의해서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정신적 힘일수도 있을것입니다.

아마 브람스도 그런 의지로 이 대곡을 만들었다고도..

도이치레퀴엠은 생각하는것만으로도 뭉클합니다..^^

여기서 또 곁가지일지 모르지만..기독교의 주인.예수그리스도가 주창한것은 어떤 인격신에 대한 경외와 복종일까요 아니면 인간됨의 새로운 기준일까요.

그 전까지의 유대땅의 인간됨이란 율법이었고 복종이었겠으나..예수가 주창한 인간됨은 더이상 그런 어린아이들의 복종놀음이 아니라는것이 아니었을지..

도이치레퀴엠이나 기타 기독교문화적 음악들,그리고 합창곡들이 기존의 유대교적 기독교문화의 전유물이 아니라..인류사회유산이라고 생각할수 있는 근거를 찾는것은 의외로 근본적 종교이미지에 대한 고찰까지도 요하는것 같습니다.

15/07/27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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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w***:

사족입니다만, 그라모폰 레이블에 익숙하다보면 도이치라는 형용사도 익숙하게 되는데 실은 도이체(Deutsche)가 맞는 발음이구요, 더우기 레퀴엠앞에 붙는 형용사는 도이체도 아니고 도이체스(Deutsches)가 됩니다. 즉 원제인, Ein Deutsches Requiem은 부정관사+형용사+명사인데, 독일어는 변화형때문에 어려운것 같아요.^^

15/07/28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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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

글이 많이 붙어 있어서 읽어 보았더니, 본문과는 관계없는 댓글이 많군요.

15/08/31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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