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랑 공연 후기
http://to.goclassic.co.kr/concert/1257
결혼하고 애를 낳아 키우기 시작한 이후로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문화생

활을 즐길 여유를 갖기 어려워 웬만해서는 관심 갖지 않거나 혹여 눈에 띄더라

도 꾹 참고 넘어가는 시절이었는데... '랑랑의 피아노 연주회라... 요즘 뜨

는 중국계 피아니스트라는 소문은 들어본 것 같은데,... 오잉~ ? 아니, 이 레

파토리 좀 다시 보자!' 참새가 방앗간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저에

게는 너무나 군침이 도는 화려한 레파토리가 아니었겠습니까? 슈베르트의 반더

러 판타지는 가장 좋아하는 곡이었고 그 하나만으로도 갈등하기에 충분했는

데, 거기다가 가장 감미로운 브람스의 인터메조와 마지막 곡인 발라키레프까

지! 오,오-! 자린고비 가장인 저로서도 더 이상 갈등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화

려한 레파토리의 유혹때문에, 바로 머리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에 접속

해보니 피아노 연주회의 로얄 좌석들(연주자의 손이나 얼굴이 잘 보이는 좌석)

은 이미 다 나간 것 같은데,... 아! 정말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음향면에서

는 조금 불리한 지 몰라도 연주자의 손을 보는 데에는 가장 확실한 명당자리

인 합창석 오른쪽 좌석들이 그때까지는 아직 많이 비어 있더군요. - 더군다나

가장 싼 가격에 말입니다. 결국 오늘 아주 좋은 위치에서 랑랑의 신기를 감상

하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프로그램>
슈베르트 - 방랑자 환상곡
쇼팽 - 안단테 스피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
인터미션
하이든 - 소나타 C 장조
브람스 - 인터메조 2번, 6번 (여섯 소품 Op.118 중)
발라키레프 - 이슬라메이

시작하기 직전. 의외로 빈 객석이 많았습니다. 차가 많이 밀려서 늦게 오는 관

객들이 많은가보다 싶었죠. 그러나 랑랑은 거의 칼 타임을 지키며 등장했습니

다. 청중들의 박수에 답례가 끝나기 무섭게, 아직 박수소리도 잦아들지 않았

고 청중들은 호흡을 고르거나 자세를 추스릴 틈도 없었는데, 어느새 자리에 앉

아 곧바로 서둘러서 '쾅 쾅쾅 쾅 쾅쾅 쾅~~~~' 하는 힘찬 방랑의 서주가 시작

되었습니다. 캬하~! 맞습니다. '방랑'은 준비하고 떠나는 게 아니지요. 무작

정, 충동적으로, 젊은이의 패기로, 아무 준비도 없이 그냥 떠나고 보는 것입니

다. 준비하고 떠나는 것이라면 방랑이 아니라 '여행'이라고 했겠죠. 진정 이것

이 반더러 판타지다운 시작의 컨셉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렇게 시작된 반

더러 판타지의 해석은 사뭇 독창적인 것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반더러 판타지에

서 뿐만 아니라 연주한 전곡 모두에서 그의 특징적인 스타일을 몇마디로 감히

요약해 보자면,

첫째, 뚜렷한 템포의 대비,
둘째, 과장없이 적당하지만 조금 덜 쓰는 듯한 힘,
세째, 완벽하지만 차분하면서도 상당히 가볍게 느껴지는 기교

라는 느낌이었습니다. 반더러 판타지의 1악장에서는 한두군데의 사소한 미스터

치가 들리는 듯했지만 패시지에 별 무리는 없었습니다. 그의 해석이 독창적이

라고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2악장에서였습니다. 그지없이 느리며 우수어린 방

랑자의 주제는 마음속에 눈물을 머금게 할만큼 어둡고 무겁고 애잔하고 아름다

웠습니다. 그처럼 무거운 노래가 방랑자의 격정의 표출로 이어져야 할 지점에

서 랑랑은 제가 들어본 음반 연주들과는 상당히 다른 해석들 들려주었습니다.

폴리니의 육중한 강철같은 격정도 아니었고 브렌델의 깊고 세련된 격정도 아니

었죠. 랑랑이 이끄는 방랑자의 격정은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고도로 절제된 격

정이라고,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어딘가 무딘 격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습니

다. 제 나름대로 보기에는 힘을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처

럼 보였죠. 작곡자 슈베르트 자신조차도 '악마에게나 치게 하라'며 몸서리를

쳤던 초절적인 패시지 역시 대단한 탄력을 보였지만 다소 덜 무겁게 넘어간

것 같습니다. 3악장은 랑랑의 그러한 스타일에 매우 잘 어울리는 악장이었습니

다. 곡의 리듬과 선율이나, 그의 손의 움직임이나, 얼굴의 표정과 제스처, 이

모두가 마치 현란하면서도 사뿐사뿐 날아가는 한 마리의 나비를 연상케 했습니

다. 3,4 악장은 정말 말 그대로 환상적이었습니다. 4악장은 매우 스피디한 템

포 가운데서도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피날레를 들려주었습니다. 최고라

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동양인의 절제된 정서와 섬세한 재주가 녹

아 있는 독창적인 반더러 판타지였습니다.

두번째 곡은 쇼팽의 안단테 스피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 전반부의 트란

퀼로는 사뭇 느린 템포로 조용하게 시작되었습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

은 부드러운 선율이 아름답게 이어졌지만, 워낙 잔잔한 곡이기에 끝나가던 무

렵의 사소한 미스터치가 옥의 티였습니다. 후반부의 알레그로 몰토. 역시 나비

가 날아가는 듯한 템포의 완급 조절이 정말 일품이었지요.

인터미션 후에 첫곡이었던 하이든의 소나타는 제가 잘 모르는 곡이어서 생략하

구요. 브람스의 인터메조 두 곡은 정말 감미로왔습니다. 슈베르트와 쇼팽을 연

주할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가 동양인이기에 이 곡의

섬세한 서정을 더욱 잘 소화해내는 것 같았습니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

은 완전한 연주. 청중들도 완전히 매료되어 마지막 음의 여운이 길게 남도록

숨죽여 듣고 있었고 그가 고개를 들고 일어나서야 박수가 터져나왔습니다.

프로그램 상의 마지막 곡인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는 그야말로 오늘 연주의

하일라이트. 제가 들어본 연주 중에서는 분명히 가장 빠른 템포였습니다. 그

놀라운 템포를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유지해나간다는 것

은 '기적적'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수 없었습니다. 그런 스피드 가운데서 나오

는 서정적인 패시지들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종반부로 치달아가면서 연달아 나

오는 초절적인 기교의 패시지들은 '저것이 과연 사람의 손인가'하는 충격과 경

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저와 제 와이프는 입을 벌린채 넋을 잃고 바라

보았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건반에 부딪히는 소리, 엄청난 스피드의 패시지에

서 그가 페달을 사용하며 발을 구르는 소리, 광란을 춤추는 듯한 그의 몸짓까

지 하나의 완벽한 음악이었습니다. 이 마당에 객석에서의 탄성과 갈채를 언급

하는 것은 쓸데 없는 일이겠죠.

랑랑은 오빠부대를 연상케 하는 여학생들을 비롯한 관객들이 객석에서 연방 터

뜨리는 카메라폰의 플래시 세례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 4 곡이나 되는 앙콜

곡을 연주하는 훌륭한 매너를 보여주었습니다.

첫번째 앙콜곡은 트로이메라이였습니다. 잠든 어린이의 고요한 모습은 숨가쁘

고 광기어린 이슬라메이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단숨에 잠재워 버렸습니다. 커튼

콜이 반복되는 동안 진행요원이 의자 하나를 새로 들고 나오더니 이번에는 랑

랑이 또 한 사람과 같이 나오더군요. 해금과 비슷하게 생긴 중국악기를 들고

나온 어른을 그는 '내 아버지'라고 소개했습니다. 그가 아버지와 함께 연주한

곡은 'Hoarses'라고 한 것 같았습니다. 재미있는 코멘트를 몇마디 한 것 같은

데 합창석에서는 그의 말이 잘 들리지 않더군요. 그의 아버지의 연주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중국 악기에 의해 말들이 소란스럽게 뛰어가는 소

리와 마지막에 히힝거리는 소리가 아주 리얼하게 표현되었고 청중들은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역시 음악가의 집안에는 피 속에도 음악이 흐르는 모양입니다.

세번째 앙콜곡은 손에 악보를 들고 나오길래 뭘까 했더니, 놀랍게도 '마법의

성'이었습니다. 희안하게도 그는 악보를 보면대가 아닌 피아노 현 위에 놓고

보더군요. 객석의 갈채가 그칠줄 모르자 그는 기꺼운 표정으로 곧바로 앉아서

마지막 앙콜곡인 리스트의 사랑의 꿈을 들려주었습니다. 시작되는 순간 오빠부

대의 탄성이 새어나왔죠. 사랑의 꿈의 달콤한 아쉬움을 마지막으로 연주회는

막을 내렸습니다. 얼마 안되어 그는 나이트에 가면 흔히 볼수 있는 흰 양복

으로 갈아입고 로비에 등장했고 팬 사인회는 열광적인 청소년 팬들이 둘러싸

고 카메라폰과 디카를 터뜨려 대는 통에 거의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거

기까지 보고 공연장을 나왔지만, 매너 좋은 그는 아마 끝까지 다 싸인해주고

사진 찍혀주지 않았을까 예상됩니다.
작성 '04/05/07 4:27
ko***수정 삭제 트랙백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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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피아노음악에 대해서는 무지;;에 가깝지만 후기를 읽으니 무척 좋은 연주회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앙코르무대도 무척 성의있게 준비한 것 같고.. ^^ TV에서 실황중계해주겠죠? 챙겨봐야겠네요,,

04/05/07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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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

매우 훌륭한 연주회였습니다. 특히 마지막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 연주는 정말 넋을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사인 받으려고 어린 학생들 틈에 줄을 섰었는데 앞에 한 백 명은 있었을텐데 힘들어서 안 되겠다고 그냥 가더군요. 그래도 훌륭한 연주와 매너(다소 오버하는 감이 있지만), 성의있는 앵콜 공연에 만족합니다.

04/05/08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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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슬라메이의 연주가 랑랑 자신에게도 매우 흡족했는지 연주를 마치고 들어가면서 거의 뛸 듯 환호하더군요. 음악을 정말 즐거워하는 연주자의 연주는 듣는 사람도 즐겁게 해주죠. 진짜 좋은 공연이었어요.

04/05/09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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