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dwig van Beethoven, Symphony No. 3 in E flat major op. 55 'Eroica'
Photo by Oracle the Miracle, 2004년 5월, 베를린 필하모니커
들어가기 전에
내가 사이먼 래틀경을 알게 된 것은 말러의 교향곡 5번 앨범을 통해서였다. 그가 2002년 시즌부터 10년간의 계약으로 타악기 주자의 희얀한 경력을 갖고서 도도한 세계적 관현악단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로 내정된 후 EMI을 통해 앨범을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그를 만났다. 이번에는 Carl Orff의 "Carmina Burana"를 통해서이다. 중세부터 수도사를 통해 내려오던 민간의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담은 카르미나 부라나에서 영국 리버풀 출신의 그가 해석하는 중세 독일의 민담의 해학은 어떠할 지 자못 궁금했었기 때문에, 기라성 같은 Carmina Burana의 음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름신의 강령대로 행동했었다. 그것이 올 5월의 일이다.
그 때 나는 흠집을 내고 싶었던 고약했던 심보를 접고 비로서 래틀이란 한 거인을 세계 최고의 명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해야한다고 비로서 고개를 조아릴 수 있었다. 그의 "카르미나 부라나"는 내 비뚤어진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을만큼 제대로 중세 독일의 해학을 코믹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그가 해석한 성악 파트에서의 윤택하고 풍윤한 음색은 듣고만 있어도, 아이러니와 풍자가 그득하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도록 드라마틱한 곡에 강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1. 해적
날은 춥지 않으나, 가을비에 노란 은행잎이 가을 아스팔트 위에 쓸쓸하게 포장된 날이다. 일을 부랴부랴 마치고 입던 옷차림 그대로 달려갔다. 공연 시간 5분전, 나는 내 자리인 합창석 G열 16번, 그러니까 래틀이 정면에서 보이는 자리이다. 래틀경의 지휘를 볼 요량으로, 과감하게 팀파니와 탐탐, 그리고 트롬펫, 혼 등의 일부 금관 악기의 시각적 확인이 불가능한 자리를 선택했었던 것이 7월 초의 일이다. 그만큼 나는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비록 그 근본적인 동기가 지난 해 베를린에 세 번째로 입성했을 때 보았던 베를린 오케스트라의 본고지인 '베를린 필하모니커' 앞에서 은행잎처럼 노란 벽칠을 한 음악관을 들렸지만 공연은 보지 못한 채, 사진으로 마음을 달래야만 했던 아쉬움 때문이였다고 고백하자. 그러나, 언제 이들을 또 다시 서울 하늘아래에서 만나게 될 것인가? 도대체 유명 지휘자의 운명이란 우리 평민들같지 않아, 어느 날 갑자기 신문의 비보란을 채우게 되기도 하지 않던가? 그래서였다. 래틀경이 비록 55년 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51살이라고 해도, 그와의 인연 또한 이번이 아니면 영영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 나는 특별히 래틀경에 대한 애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 명성 하나만으로도 이번 공연에 거는 기대가 각별했다. 이번 공연에서 연주되는 곡들이 다소 생경하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나의 크로이체르를 통해 비로서 사랑하게 된 Ravel의 곡 또한 연주되니 솔직히 공연장에 들어서는 내 마음은 제법 흥분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대가 바로 코 앞인 자리에 앉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대 정중앙 좌석의 가장 왼쪽 편(무대에서 바라보았을 때) 우리의 메세나 선구자이신 앙드레 김선생께서 언제나처럼 하얀 유니폼을 입고 앉아계신다. 꽉 찬 좌석들, 엄중한 관객들, 그 누구 하나 기대감에 설레이지 않는 사람이 없을 듯하다.
내 자리 왼편에는 6대의 콘트라베이스가 있고, 주자들은 이미 조율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단원들이 무대로 들어선다. 역시 개개인의 연주 기량이 독주자로서도 전현 손색이 없을 세계 최고임을 확인시켜주듯, 당당하고 밝은 표정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일단 자리에 앉아마자 그들은 악보를 펼치고 조용히 지휘자의 입장을 기다린다.
자, 래틀경이 들어왔다. 관객을 향해 큰 인사를 하고, 지휘봉을 곧바로 든 래틀경은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바다의 모습, 그것도 해적의 등장하는 거친 바다의 질풍노도를 헤치고 지나가는 무역선의 선장이 되었다. 단원들도 각자의 임무에 충실한 선원이다. 마스터에 올라탄 제1 항해사인 바이올린 악장을 비롯하여 오른편에 위치한 제 1 바이올린주자들, 그리고 그 옆에 제 2 바이올린 주자들, 그리고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 편으로 첼로군단, 그리고 가장 왼쪽에는 비올라 군단이 파고 높은 밤바다를 헤치는 이물 쪽에서 거세게 노를 젓고 있다. 그리고 배의 후미로는 베를린 필의 자랑인 푸르티스트 Emmanuel Pahud외의 플루티스트들과 클라리넷 주자들, 그리고 오버 주자들이 앉아있고,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발라스트 역할을 담당한 바순, 호른, 트럼펫, 트롬본 주자들은 그 뒤쪽에서 무게를 잡아준다. 그리고 마지막, 거센 풍랑 속에서도 전진을 외쳐될 팀파니는 유감스럽게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사각지대에 있다.
높은 파고에도 아랑곳 없이 더 격렬하게 거친 밤바다와 싸워나가는 '베를린 필하모니커호'의 선원들은 맡은 바 임무에 미친 듯 필사적인 연주에 몰입해있다. 누구 하나 삐꺽 헛 발을 딛지도, 누구 하나 나몰라라 업무 태만의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폭풍의 기세에도 꺽이지 않는 듬직한 금속 악기들은 제대로 쩌렁쩌렁하게 밤바다를 가르고 팀파니의 정확하고 확실한 폭격은 푹풍의 광분에 정확히 투척되었다. 자. 이제 승리는 '베를린 필하모니'에게 돌아왔다.
관중들은 아낌없이 그 승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2. 어미 거위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비련한 이미지에는 못 미친다고 하더라도 역시 라벨의 곡들
은 서정적이다. 라벨의 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몰리에르, 말라르메 등의 프랑스 서사시인들을 알아야하는 것인가? 아무려면 어떤가? 무지하면 무지한대로 들어보자. 하긴 몰리에르나 말라르메가 서사시인이라고 누가 말했는가? 서양문학의 이해를 들은 것이 대학 1학년 때니까, 내 기억이 맞다고 스스로 어찌 단정할 수 있겠는가?
'어미 거위'는 17세기 프랑스의 동화 작가인 샤를르 빼로의 동화집 이름이다. 샤를르 빼로는 '푸른 수염', '숲 속의 잠자는 공주'등의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 동화를 쓴 동화 작가이다. 자, 동화 작가의 스토리가 모티프가 되었다니 이 얼마나 서사적일ㄲ? 게다가 '어미 거위'는 발레를 위한 모음곡이다. 그러니, 주정적인 곡의 분위기에 서사적인 스토리의 전개는 필수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포스트모던하거나 해체적 발레곡이 아니람 말이다. 그러나, 이미 밝히고 있듯이 17세기 동화가 그 뒷 배경이니, 주정적으로 듣고 서사를 떠올려보란 말이다.
이 곡을 연주하는 동안 하프와 합시코드와 퍼큐션(솔직히 마림바의 소리는 아니다.) 주자가 참가했다. 왜냐하면, 이 악기들을 생각해보면 뻔하게 답이 나온다. 하프의 미려하면서도 몽환적인 소리, 그리고 하프를 타는 공주를 떠올려보면 알만하지 않을까? 긴 머리에 뱃사공들을 홀리는 로렐라이 전설 속의 그녀처럼 하프는 어딘지 주술적인 소리를 갖고 있다. 이 곡에서는 라푼첼과 같은 신세인지 어쩐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라푼첼이 갖혔던 탑에 살고 있을 듯한 '탑의 여왕'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음악도 부속되어 있다. 탑에 갖춘 왕녀는 하프를 튕겨야 제맛이다. 그리고 합시코드는 어떠한가? 딩동댕동 가장 장난감같은 소리를 내지 않을까? 동화가 배경이다. 동화적인 악기로 어쩌면 하프 보다 합시코드가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 생각이다. 장난감같은 소리는 역시 합시코드의 투명하지만 어딘지 가벼운 똑각거리는 음들이 안성마춤이다. 그러면, 정확히 마림바는 아니나 마림바처럼 퍼큐션은 어떠한가? 이 퍼큐션이란 악기들은 생김새부터 커다란 실로폰이니, 역시 아이들의 장난감과 흡사하다. 또한 그 소리는 어떠한가? 유리잔에 물을 담아 놓고 치는 글래스 실로폰의 소리와도 닮아있고, 서로 굵기와 길이가 다른 속빈 대나무 통을 잘라놓고 두들길 때 나는 소리와도 닮아있지 않던가? 자, 이들 악기가 바로 동화적 사운드를 제공해주는 환상 트리오이다.
느린 왈츠의 리듬을 타고 미녀를 나타내는 우아한 선율과 야수를 나타내는 묵직한 선율들이 대조되어 교차되면서 음은 전개되다, 화려한 글리샌도가 비산하는 '요정의 정원'에서 동화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와, 진짜 아름답다. 역시 래틀은 드뷔시, 라벨 등의 프랑스 음악가들과도 정신적 영감을 교류하는 것 맞다. 래틀의 아내가 루마니아 출신의 성악가인 것도 어찌보면 이런 래틀의 정신 세계를 구축하는데 한 몫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래틀은 산만한 레파토리를 갖고 있다는 비평가들의 비난을 일축해버리고, 다재다능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또한, 베를린 필은 어떤가? 흥,,,, 베를린 필이 게르만족만이 모여 연주한다고? 웃기네. 우리 연주자 중 17%는 외국인이야. 동양인도 4명이나 된다고... 프랑스인들은 없는줄 알아? 그들은 이렇게 댓구할 것이다. 베를린 필은 독일을 대표하는 악단이 아니라구.... 전세계적 최고의 악단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라벨을 연주하든 쇼스타코비치를 연주하든, 토마스 아데스를 연주하든 언제나 최고가 된단말야. 우리는 그들을 독일로 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들 조국에 귀속시키면서도 제대로 그 정서를 표출하는거란 말야. 즉 우리는 어떤 색깔로도 변신이 가능한 카멜리온이야. 우리는 터어키 인으로도 변신이 가능해. 그러니, 우리가 라벨을 연주할 때, 우리 모두는 프랑스 인들이 되는거라구....
누가 뭐랬나? 하여간, 나는 한마디로 뿅갔다. 아, 라벨, 라벨, 정말, belle 였다.
3. 에로이카
아, 베토벤. 이 고향곡은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다 그의 행적에 실망하고 "영웅"으로 고쳤다는 에피소드로 더욱 유명해졌는데, 웅장한 첫 악장에 귀가 푹 죽는다. 제 1 바이올린 군옆으로 비올라군이 옮겨 앉았다. 그 옆에 첼로, 그리고 제2 바이올린이 가장 왼쪽 편에 위치한다. 즉, 제 1 바이올린과 제 2 바이올린은 중심축(음,,,,플루트와 오보에)으로 대칭을 이루는 위치에 있다. 이 웅대한 영웅 찬가를 듣기 즐거움은 뜻밖에도 각 악기들의 날렵함을 포착하는데 있다.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가 같은 주제를 주고 받는 간간이, 중심축에 놓여있는 플루트와 오버에는 영웅의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마치, 영웅성을 상징하듯 찬란한 금빛 왕관처럼 반짝인다. 그럼 바삐 움직인 우리들은 뭐냐구? 라고 현악기들이 나에게 돌멩이를 던지려나?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해주련다. 너희들은 그 왕관 아래 휘장처럼 늘어진 벨벳 가운이쟎아. 그래, 그래서 너희들은 벨벳의 고급한 사운드를 내는거라구....잘 했쟎아. 너무 근사했어. 금빛 왕관을 더욱 돋보이도록 해준 것은 바로 너희 벨벳 가운이라구.... 그럼, 제네들 왕관들이 너무 오만해지지 않아? 벨벳 가운들이 아우성칠련지도 모른다. 좀 미안하지만, 솔직히 플루트와 오버에는 연애하는 줄 알았어. 플루트와 오버에는 가끔 마주보고 서로를 향해 시선을 교환하고, 소리로 서로를 애무하는 것이 난 또 그들이 사랑에 빠져있는 동성의 애인들인줄 착각했지 뭐야. 그 정도로 열정적인 정사가 또 어디있담? 솔직히 루비와 황금이 명콤비였지. 그만한 왕관을 본 적이 여짓껏 없었거든....
자, 다들 삐질 필요가 없다. 솔직히 모두에게 '브라보'이다. 팀파니는 어떠했는가? 그 정확한 타법과 음의 완급과 강약의 명확한 쪼개짐과 포개짐...그것뿐이랴? 삑사리 없는 완벽한 호른과 트롬펫, 역시 금관 악기는 우리 나라 악단에서 볼 수 없을 정도의 완벽성 그 자체였지 뭐....
자, 완벽한 영웅담.... 난 대관식에 참여된 후작 부인이였다고 할께. 이 정도면 대만족? 유감없지. 벨벳?
4. 두루미의 정경
본 프로그램은 다 끝났다. 연이어지는 박수 소리가 공연장을 진동한다. 래틀은 왕관에게 다가가서 왕관을 들어올린다. 역시 내 해석이 정확한가보다. 그리고, 래틀이 관객을 향해 말했다. "21년만에 한국에 왔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많은 앵콜은 해줄 수 없지만, 시벨리우스를 연주해드리겠습니다." 햐아. 내가 래틀의 말을 이해했다. 그럴 수 밖에. 영어로 이야기했으니까. 래틀은 리버풀 출신이다. (참 신기한 것...지금껏 예당 공연 많이 갔지만, 장내 안내 방송을 영어로도 해준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두루미들이 조분조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악기는 입다물고 있었다. 주는 '에로이카'에서 벨벳 역할로 만족해야했던 현악기군들이다. 그들이 주 무대가 되었다. 위무공연이라고 하면, 또 약올리는것인가? (솔직히, 완벽하고 최고의 현들이다. 다만 내가 그들을 약올리는 것은 '에로이카'에서 천상의 왕관이 되었던 플루트와 클라리넷에 매료되어 상대적으로 천대를 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나는 현악기 연주자 모두를 사랑한다. 그들이 보여준 절대 집중력, 그 집중이 눈으로도 확인되는 순간 순간의 희열은 눈물까지 자아내게 했으니까....)
음.,... 두루미의 정경이란 이런 것인가보다. 시벨리우스, 나는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사랑한다. 카밀라 뷕스의 연주, 느뵈의 연주로, 하여간, 나는 시벨리우스가 바이올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런데, 두루미들의 춤을 보고 있쟈니 그의 바이올린 사랑이 재차 확인된다. 핀란드의 송래 피요르드, 그리고 어둑한 북구의 가을날, 그리고 잦아든 바람, 차디찬 빙하가 녹인 잔잔한 물 위에서 노니는 두루미들.... 시벨리우스는 무엇을 보았을까? 그리고, 지금 내 앞의 두루미들은 이제 자존감을 회복했는가? 아, 난 이제 두루미도 정말 사랑하게 되었어.
마치고 돌아오면서
오늘의 감격을 크로이체르와 함께 하지 못해 유감스러웠다. 다행스럽게 어제 그와 정명훈씨의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4번'을 함께 들을 수 있었지만, 어제 '베토벤의 '전원'은 놓치지 않았던가? 크로이체르가 있었다면 그는 울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을 교감의 제 1언어로 생각하는 그에게 오늘의 공연을 보지 못함은 예민한 그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다행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 옆에 그가 없어 솔직히 아쉬웠다. 이봐, 당신. 당신이 '선운사'의 해우소의 변산을 바라보고 득도 하고 돌아오던 그 시간에 나는 당신을 소리로 그리고 있었다고.
1957/11 (ⓟ 1958) Stereo
라벨: 어미 거위
RAVEL: Ma mere l'oye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지휘)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Ernest Ansermet (conductor)
Orchestre de la Suisse Romande
전곡
1. Prelude & Danse du rouet [6:14]
2. Pavane de la Belle au bois dormant [1:33]
3. Petit Poucet [3:03]
4. Laideronnette, Impératrice des pagodes [3:32]
5. Les Entretiens de la Belle et de la Bête [3:58]
연주 곡목 안내
Hector Berlioz, Le Corsaire Overture, op. 21
Maurice Ravel, Ma Mere L'Oye
Ludwig van Beethoven, Symphony No. 3 in E flat major op. 55 'Eroica'
Photo by Oracle the Miracle, 2004년 5월, 베를린 필하모니커
들어가기 전에
내가 사이먼 래틀경을 알게 된 것은 말러의 교향곡 5번 앨범을 통해서였다. 그가 2002년 시즌부터 10년간의 계약으로 타악기 주자의 희얀한 경력을 갖고서 도도한 세계적 관현악단 베를린 필의 상임 지휘자로 내정된 후 EMI을 통해 앨범을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그를 만났다. 이번에는 Carl Orff의 "Carmina Burana"를 통해서이다. 중세부터 수도사를 통해 내려오던 민간의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담은 카르미나 부라나에서 영국 리버풀 출신의 그가 해석하는 중세 독일의 민담의 해학은 어떠할 지 자못 궁금했었기 때문에, 기라성 같은 Carmina Burana의 음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름신의 강령대로 행동했었다. 그것이 올 5월의 일이다.
그 때 나는 흠집을 내고 싶었던 고약했던 심보를 접고 비로서 래틀이란 한 거인을 세계 최고의 명 지휘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해야한다고 비로서 고개를 조아릴 수 있었다. 그의 "카르미나 부라나"는 내 비뚤어진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을만큼 제대로 중세 독일의 해학을 코믹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그가 해석한 성악 파트에서의 윤택하고 풍윤한 음색은 듣고만 있어도, 아이러니와 풍자가 그득하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도록 드라마틱한 곡에 강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1. 해적
날은 춥지 않으나, 가을비에 노란 은행잎이 가을 아스팔트 위에 쓸쓸하게 포장된 날이다. 일을 부랴부랴 마치고 입던 옷차림 그대로 달려갔다. 공연 시간 5분전, 나는 내 자리인 합창석 G열 16번, 그러니까 래틀이 정면에서 보이는 자리이다. 래틀경의 지휘를 볼 요량으로, 과감하게 팀파니와 탐탐, 그리고 트롬펫, 혼 등의 일부 금관 악기의 시각적 확인이 불가능한 자리를 선택했었던 것이 7월 초의 일이다. 그만큼 나는 그들을 만나고 싶었다. 비록 그 근본적인 동기가 지난 해 베를린에 세 번째로 입성했을 때 보았던 베를린 오케스트라의 본고지인 '베를린 필하모니커' 앞에서 은행잎처럼 노란 벽칠을 한 음악관을 들렸지만 공연은 보지 못한 채, 사진으로 마음을 달래야만 했던 아쉬움 때문이였다고 고백하자. 그러나, 언제 이들을 또 다시 서울 하늘아래에서 만나게 될 것인가? 도대체 유명 지휘자의 운명이란 우리 평민들같지 않아, 어느 날 갑자기 신문의 비보란을 채우게 되기도 하지 않던가? 그래서였다. 래틀경이 비록 55년 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51살이라고 해도, 그와의 인연 또한 이번이 아니면 영영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 나는 특별히 래틀경에 대한 애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 명성 하나만으로도 이번 공연에 거는 기대가 각별했다. 이번 공연에서 연주되는 곡들이 다소 생경하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나의 크로이체르를 통해 비로서 사랑하게 된 Ravel의 곡 또한 연주되니 솔직히 공연장에 들어서는 내 마음은 제법 흥분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대가 바로 코 앞인 자리에 앉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대 정중앙 좌석의 가장 왼쪽 편(무대에서 바라보았을 때) 우리의 메세나 선구자이신 앙드레 김선생께서 언제나처럼 하얀 유니폼을 입고 앉아계신다. 꽉 찬 좌석들, 엄중한 관객들, 그 누구 하나 기대감에 설레이지 않는 사람이 없을 듯하다.
내 자리 왼편에는 6대의 콘트라베이스가 있고, 주자들은 이미 조율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단원들이 무대로 들어선다. 역시 개개인의 연주 기량이 독주자로서도 전현 손색이 없을 세계 최고임을 확인시켜주듯, 당당하고 밝은 표정으로 들어선다. 그러나, 일단 자리에 앉아마자 그들은 악보를 펼치고 조용히 지휘자의 입장을 기다린다.
자, 래틀경이 들어왔다. 관객을 향해 큰 인사를 하고, 지휘봉을 곧바로 든 래틀경은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바다의 모습, 그것도 해적의 등장하는 거친 바다의 질풍노도를 헤치고 지나가는 무역선의 선장이 되었다. 단원들도 각자의 임무에 충실한 선원이다. 마스터에 올라탄 제1 항해사인 바이올린 악장을 비롯하여 오른편에 위치한 제 1 바이올린주자들, 그리고 그 옆에 제 2 바이올린 주자들, 그리고 가운데에서 조금 왼쪽 편으로 첼로군단, 그리고 가장 왼쪽에는 비올라 군단이 파고 높은 밤바다를 헤치는 이물 쪽에서 거세게 노를 젓고 있다. 그리고 배의 후미로는 베를린 필의 자랑인 푸르티스트 Emmanuel Pahud외의 플루티스트들과 클라리넷 주자들, 그리고 오버 주자들이 앉아있고, 배의 균형을 잡아주는 발라스트 역할을 담당한 바순, 호른, 트럼펫, 트롬본 주자들은 그 뒤쪽에서 무게를 잡아준다. 그리고 마지막, 거센 풍랑 속에서도 전진을 외쳐될 팀파니는 유감스럽게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사각지대에 있다.
높은 파고에도 아랑곳 없이 더 격렬하게 거친 밤바다와 싸워나가는 '베를린 필하모니커호'의 선원들은 맡은 바 임무에 미친 듯 필사적인 연주에 몰입해있다. 누구 하나 삐꺽 헛 발을 딛지도, 누구 하나 나몰라라 업무 태만의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폭풍의 기세에도 꺽이지 않는 듬직한 금속 악기들은 제대로 쩌렁쩌렁하게 밤바다를 가르고 팀파니의 정확하고 확실한 폭격은 푹풍의 광분에 정확히 투척되었다. 자. 이제 승리는 '베를린 필하모니'에게 돌아왔다.
관중들은 아낌없이 그 승자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2. 어미 거위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비련한 이미지에는 못 미친다고 하더라도 역시 라벨의 곡들
은 서정적이다. 라벨의 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몰리에르, 말라르메 등의 프랑스 서사시인들을 알아야하는 것인가? 아무려면 어떤가? 무지하면 무지한대로 들어보자. 하긴 몰리에르나 말라르메가 서사시인이라고 누가 말했는가? 서양문학의 이해를 들은 것이 대학 1학년 때니까, 내 기억이 맞다고 스스로 어찌 단정할 수 있겠는가?
'어미 거위'는 17세기 프랑스의 동화 작가인 샤를르 빼로의 동화집 이름이다. 샤를르 빼로는 '푸른 수염', '숲 속의 잠자는 공주'등의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 동화를 쓴 동화 작가이다. 자, 동화 작가의 스토리가 모티프가 되었다니 이 얼마나 서사적일ㄲ? 게다가 '어미 거위'는 발레를 위한 모음곡이다. 그러니, 주정적인 곡의 분위기에 서사적인 스토리의 전개는 필수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포스트모던하거나 해체적 발레곡이 아니람 말이다. 그러나, 이미 밝히고 있듯이 17세기 동화가 그 뒷 배경이니, 주정적으로 듣고 서사를 떠올려보란 말이다.
이 곡을 연주하는 동안 하프와 합시코드와 퍼큐션(솔직히 마림바의 소리는 아니다.) 주자가 참가했다. 왜냐하면, 이 악기들을 생각해보면 뻔하게 답이 나온다. 하프의 미려하면서도 몽환적인 소리, 그리고 하프를 타는 공주를 떠올려보면 알만하지 않을까? 긴 머리에 뱃사공들을 홀리는 로렐라이 전설 속의 그녀처럼 하프는 어딘지 주술적인 소리를 갖고 있다. 이 곡에서는 라푼첼과 같은 신세인지 어쩐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라푼첼이 갖혔던 탑에 살고 있을 듯한 '탑의 여왕'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음악도 부속되어 있다. 탑에 갖춘 왕녀는 하프를 튕겨야 제맛이다. 그리고 합시코드는 어떠한가? 딩동댕동 가장 장난감같은 소리를 내지 않을까? 동화가 배경이다. 동화적인 악기로 어쩌면 하프 보다 합시코드가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 생각이다. 장난감같은 소리는 역시 합시코드의 투명하지만 어딘지 가벼운 똑각거리는 음들이 안성마춤이다. 그러면, 정확히 마림바는 아니나 마림바처럼 퍼큐션은 어떠한가? 이 퍼큐션이란 악기들은 생김새부터 커다란 실로폰이니, 역시 아이들의 장난감과 흡사하다. 또한 그 소리는 어떠한가? 유리잔에 물을 담아 놓고 치는 글래스 실로폰의 소리와도 닮아있고, 서로 굵기와 길이가 다른 속빈 대나무 통을 잘라놓고 두들길 때 나는 소리와도 닮아있지 않던가? 자, 이들 악기가 바로 동화적 사운드를 제공해주는 환상 트리오이다.
느린 왈츠의 리듬을 타고 미녀를 나타내는 우아한 선율과 야수를 나타내는 묵직한 선율들이 대조되어 교차되면서 음은 전개되다, 화려한 글리샌도가 비산하는 '요정의 정원'에서 동화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와, 진짜 아름답다. 역시 래틀은 드뷔시, 라벨 등의 프랑스 음악가들과도 정신적 영감을 교류하는 것 맞다. 래틀의 아내가 루마니아 출신의 성악가인 것도 어찌보면 이런 래틀의 정신 세계를 구축하는데 한 몫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래틀은 산만한 레파토리를 갖고 있다는 비평가들의 비난을 일축해버리고, 다재다능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또한, 베를린 필은 어떤가? 흥,,,, 베를린 필이 게르만족만이 모여 연주한다고? 웃기네. 우리 연주자 중 17%는 외국인이야. 동양인도 4명이나 된다고... 프랑스인들은 없는줄 알아? 그들은 이렇게 댓구할 것이다. 베를린 필은 독일을 대표하는 악단이 아니라구.... 전세계적 최고의 악단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라벨을 연주하든 쇼스타코비치를 연주하든, 토마스 아데스를 연주하든 언제나 최고가 된단말야. 우리는 그들을 독일로 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들 조국에 귀속시키면서도 제대로 그 정서를 표출하는거란 말야. 즉 우리는 어떤 색깔로도 변신이 가능한 카멜리온이야. 우리는 터어키 인으로도 변신이 가능해. 그러니, 우리가 라벨을 연주할 때, 우리 모두는 프랑스 인들이 되는거라구....
누가 뭐랬나? 하여간, 나는 한마디로 뿅갔다. 아, 라벨, 라벨, 정말, belle 였다.
3. 에로이카
아, 베토벤. 이 고향곡은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다 그의 행적에 실망하고 "영웅"으로 고쳤다는 에피소드로 더욱 유명해졌는데, 웅장한 첫 악장에 귀가 푹 죽는다. 제 1 바이올린 군옆으로 비올라군이 옮겨 앉았다. 그 옆에 첼로, 그리고 제2 바이올린이 가장 왼쪽 편에 위치한다. 즉, 제 1 바이올린과 제 2 바이올린은 중심축(음,,,,플루트와 오보에)으로 대칭을 이루는 위치에 있다. 이 웅대한 영웅 찬가를 듣기 즐거움은 뜻밖에도 각 악기들의 날렵함을 포착하는데 있다.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가 같은 주제를 주고 받는 간간이, 중심축에 놓여있는 플루트와 오버에는 영웅의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마치, 영웅성을 상징하듯 찬란한 금빛 왕관처럼 반짝인다. 그럼 바삐 움직인 우리들은 뭐냐구? 라고 현악기들이 나에게 돌멩이를 던지려나?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해주련다. 너희들은 그 왕관 아래 휘장처럼 늘어진 벨벳 가운이쟎아. 그래, 그래서 너희들은 벨벳의 고급한 사운드를 내는거라구....잘 했쟎아. 너무 근사했어. 금빛 왕관을 더욱 돋보이도록 해준 것은 바로 너희 벨벳 가운이라구.... 그럼, 제네들 왕관들이 너무 오만해지지 않아? 벨벳 가운들이 아우성칠련지도 모른다. 좀 미안하지만, 솔직히 플루트와 오버에는 연애하는 줄 알았어. 플루트와 오버에는 가끔 마주보고 서로를 향해 시선을 교환하고, 소리로 서로를 애무하는 것이 난 또 그들이 사랑에 빠져있는 동성의 애인들인줄 착각했지 뭐야. 그 정도로 열정적인 정사가 또 어디있담? 솔직히 루비와 황금이 명콤비였지. 그만한 왕관을 본 적이 여짓껏 없었거든....
자, 다들 삐질 필요가 없다. 솔직히 모두에게 '브라보'이다. 팀파니는 어떠했는가? 그 정확한 타법과 음의 완급과 강약의 명확한 쪼개짐과 포개짐...그것뿐이랴? 삑사리 없는 완벽한 호른과 트롬펫, 역시 금관 악기는 우리 나라 악단에서 볼 수 없을 정도의 완벽성 그 자체였지 뭐....
자, 완벽한 영웅담.... 난 대관식에 참여된 후작 부인이였다고 할께. 이 정도면 대만족? 유감없지. 벨벳?
4. 두루미의 정경
본 프로그램은 다 끝났다. 연이어지는 박수 소리가 공연장을 진동한다. 래틀은 왕관에게 다가가서 왕관을 들어올린다. 역시 내 해석이 정확한가보다. 그리고, 래틀이 관객을 향해 말했다. "21년만에 한국에 왔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많은 앵콜은 해줄 수 없지만, 시벨리우스를 연주해드리겠습니다." 햐아. 내가 래틀의 말을 이해했다. 그럴 수 밖에. 영어로 이야기했으니까. 래틀은 리버풀 출신이다. (참 신기한 것...지금껏 예당 공연 많이 갔지만, 장내 안내 방송을 영어로도 해준 것은 처음이다.) 그리고 두루미들이 조분조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악기는 입다물고 있었다. 주는 '에로이카'에서 벨벳 역할로 만족해야했던 현악기군들이다. 그들이 주 무대가 되었다. 위무공연이라고 하면, 또 약올리는것인가? (솔직히, 완벽하고 최고의 현들이다. 다만 내가 그들을 약올리는 것은 '에로이카'에서 천상의 왕관이 되었던 플루트와 클라리넷에 매료되어 상대적으로 천대를 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나는 현악기 연주자 모두를 사랑한다. 그들이 보여준 절대 집중력, 그 집중이 눈으로도 확인되는 순간 순간의 희열은 눈물까지 자아내게 했으니까....)
음.,... 두루미의 정경이란 이런 것인가보다. 시벨리우스, 나는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사랑한다. 카밀라 뷕스의 연주, 느뵈의 연주로, 하여간, 나는 시벨리우스가 바이올린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런데, 두루미들의 춤을 보고 있쟈니 그의 바이올린 사랑이 재차 확인된다. 핀란드의 송래 피요르드, 그리고 어둑한 북구의 가을날, 그리고 잦아든 바람, 차디찬 빙하가 녹인 잔잔한 물 위에서 노니는 두루미들.... 시벨리우스는 무엇을 보았을까? 그리고, 지금 내 앞의 두루미들은 이제 자존감을 회복했는가? 아, 난 이제 두루미도 정말 사랑하게 되었어.
마치고 돌아오면서
오늘의 감격을 크로이체르와 함께 하지 못해 유감스러웠다. 다행스럽게 어제 그와 정명훈씨의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4번'을 함께 들을 수 있었지만, 어제 '베토벤의 '전원'은 놓치지 않았던가? 크로이체르가 있었다면 그는 울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을 교감의 제 1언어로 생각하는 그에게 오늘의 공연을 보지 못함은 예민한 그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다행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 옆에 그가 없어 솔직히 아쉬웠다. 이봐, 당신. 당신이 '선운사'의 해우소의 변산을 바라보고 득도 하고 돌아오던 그 시간에 나는 당신을 소리로 그리고 있었다고.
1957/11 (ⓟ 1958) Stereo
라벨: 어미 거위
RAVEL: Ma mere l'oye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지휘)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
Ernest Ansermet (conductor)
Orchestre de la Suisse Romande
전곡
1. Prelude & Danse du rouet [6:14]
2. Pavane de la Belle au bois dormant [1:33]
3. Petit Poucet [3:03]
4. Laideronnette, Impératrice des pagodes [3:32]
5. Les Entretiens de la Belle et de la Bête [3:58]
6. Le Jardin féerique [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