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 해 만난 음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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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에도 "가속"이라는 게 있나 봅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세월이 빨리 흐른다는 느낌이 드네요.  간발의 차로 늦게 도착해, 자리를 예약해 놓은 기차를 눈 앞에서 보내야 하는 그런 풍경처럼. 세월은 우리의 아쉬워하는 눈길에 조금도 자신의 속도를 늦추거나 적어도 연민의 눈길 한 번 던져주지 않네요. 늘 아쉬움의 연속으로 꾸려지는 삶 속에서, 우리에게 그 아쉬움에 그나마 온기를 불어넣어주고, 어떤 내면의 에너지를 소생시켜주는 존재가 바로 음악이 아닐까 합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밥 사먹을 거 라면 사먹고, 택시나 버스 탈 거 걸아다니면서까지 음반들을 사 모으는 거 아닌가 합니다. 때로 밥보다, 택시보다 더 큰 포만감과 편안함을 주기에..)

올 한 해도 고마운 음악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산들거리는 삶의 미풍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감상이 길어졌네요. )

그런 의미에서 올 한 해, 저와 함께 했던 음반들 중 기억의 표층으로 떠오르는 몇 가지를 이렇게 글로 남김으로써 어지러운 삶을 위무해준 그 음반들의 고마움에 작은 보답을 하고자 합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제가 올 한 해 가장 즐겨 들었던 레이첼 포저/게리 쿠퍼의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음반입니다.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시대악기로 연주한 다른 음반들도 있지만, 곡 자체에 대한 해석을 비롯하여 각 악기의 음색 및 두 연주자 간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제게는 베스트인 음반입니다. 흔히 연주되지 않는 소년시절의 작품들까지도 매우 아름답게 연주하고 있어 여러 모로 흥미롭고 값진 음반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먼지 낀 일상으로부터의 탈주에 큰 몫을 한 음반..

 

  

*다음으로는 바흐의 칸타타 음반(가디너)이 생각나네요. 가디너가 직접 설립한 SDG레이블을 통해 발매되고 있는 바흐의 칸타타 앨범들이 올해 몇 장 수입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올 6월 네덜란드에서 발견된 바흐의 새로운 칸타타인 빌헬름 에른스트 공작을 위한 생일축가 BWV1127 - "만물이 하나님으로 인함이요"를 가장 즐겨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간에, 정말 "만물이 하나님으로 인함"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뜬금없이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라는 유대 속담이 생각나네요.

 

  

*저를 클래식 음악에 푹 빠지게 만들었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의 제 2악장. 수많은 "황제"들을 만나와서 이제는 "황제"와의 만남에 좀 심드렁해져 있던 차에,  다음의 음반은 다시 한 번 "황제의 위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오, "황제 폐하~"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마이너(?) 작곡가는 갈루피입니다. 미켈란젤리가 연주한 갈루피의 피아노 소나타만큼 아름다운 피아노 소나타 연주는 제게 찾기 쉽지 않습니다. 미켈란젤리를 듣던 와중에 갈루피의 또 다른 피아노 소나타가 궁금해졌고 그 호기심에서 해외주문을 통하여 다음의 음반을 구입하였는데 곡 자체, 연주, 음질 모두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따지고 보면, 음악이건 미술이건 문학이건, 아니, 예술과 삶의 전 분야에서 잊혀져간 소중한 이름들이 얼마나 많은지..마이너 레이블들의 음반 작업들을 보면 마치 아날학파의 역사서술들처럼 사소한, 그러나 소중한 것들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보여주고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아, 제가 위에서 가장 좋아하는 (마이너) 작곡가가 갈루피라고 했나요?, 비오티가 들으면 좀 섭섭해 하

겠네요.

.

이 음반에 반해 비오티와 연주자 보베스코의 모든 음반을 한동안 열정적으로 찾아 헤맸습니다. (커다란 성과는 없었지만..)  올해 제가 가장 많이 들은 바이올린 협주곡 음반입니다. 롤라 보베스코. 요한나 마르치와 더불어 제게 묘한 울림을 주는 아름다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 에센바흐, 우치다, 헤블러, 라로차, 기제킹. 제가 가지고 있는 모차르트 피아노소나타 전곡음반들입니다. 낱장으로 브렌델, 피레스, 페라이어, 솔로몬, 박하우스, 켐프, 스코다, 에 또..등등을 갖고 있는데, "이제 그마안~"하려다 새로 구입한 람페의 음반은 모차르트 건반음악의 또 다른 맛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세 가지 다른 악기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 포르테피아노로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작품들, 하나하나 영롱하기 그지 없습니다. (mdg레이블 녹음도 아주 훌륭하더군요!)

 

  

* 이번에는 제가 올해 만난 음반들 중, 덩치가 좀 큰 친구들(박스셋)에 대해 이야기할까 합니다. 빈이무원(貧而無怨)하고자 하나, 늘 궁핍에 우울해지는 제게 박스셋은 참 고마운 친구들이죠. 그 중에서도 특히 올해는 아래와 같은 반가운 녀석들을 만났답니다.

 

 

앞의 두 음반(각각11장,  8장)은 일본의 한 사이트에서 각각 5만원 이하에, 뒤의 두 음반(모두 각각 10장)은 독일의 한 사이트에서 대략 각각 2만 2천원 정도에, 그리고 맨 마지막의 베토벤 희귀작품집(9장)은 역시 같은 곳에서 대략 3만3천원 정도에 구입했습니다. 횡재죠. 

 

  

*올해 제게 있어 가장 아쉬웠던 점 중의 하나는 줄리니가 유명을 달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그동안 구하기 쉽지 않았던 줄리니/ LA필의 연주가 수입되어 그가 떠난 슬픔에 약간의 위로를 주기는 하였습니다만, 그래도 줄리니의 부재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을 허전하게 하네요. 늘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할 것도 없이 단 일초의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보여준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퇴색되지 않은 사랑에,  동시대를 사는 한 사람으로서 그 존재 자체로 위안이 되는 분이었는데..

 

  

 

  

*말이 길어졌습니다. 끝으로 오늘 멀리서 도착한 친구 셋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무리를 지어야겠습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소나타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K331의 1악장입니다. 굴다가 빚어내는 331-1악장. 제가 아는 어휘로는 형용하기 쉽지 않네요.

마술피리, 그동안 솔티와 클렘페러 등을 들어왔는데, 주이트너의 이 염가반(2cd에 채 만원도 안 됩니다.), 가격은 Super budget이지만, 연주는 Super Top입니다.

마지막 음반은 순전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의 현악5중주 편곡 때문에 구입했습니다. 우연히 FM에서 현악5중주로 편곡된 것을 듣고 관현악으로 익히 들어왔던 것과는 또 다른 매력에 귀가 번쩍 뜨이더군요.

  

 

-- 새해는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군요. 온갖 난리법석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잔잔한 공명을 통해, 모차르트 음악처럼 나의 내면이, 그리고 세상의 내부가  아름답길 바라는  마음을 통해 아름다운 천재의 탄생을 기뻐했음 좋겠습니다.

 

--이따금 "클래식 애호가 중에, 아무 부담없이 음반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하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제 생각에 그리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그래도 음악 덕분에 우리는 외빈(外貧)일지언정 내화(內華)의 꿈을 꿀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작성 '05/12/29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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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반가운 음반들이 많아서 좋네요!! ㅋㅋㅋ

05/12/30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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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r***:

저랑 많이 비슷하시군요 ^ ^

05/12/30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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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

산도르 베그의 모차르트의 세레나데 염가반
가격을 떠나서 연주를 따져도 최상이더군요.

이 음반 염가반으로 들어오면 꼭 사세요.
모차르트 음반 넘쳐나셔도 꼭 사십시요.

05/12/3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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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

음반에 대한 차분하고 다정한 소개의 글인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

05/12/30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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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t***:

유준님이 올 한 해 만난 음반들 가운데 제가 가지고 있는 음반은 한 장 밖에 없네요. 그렇지만 청음욕을 불러 일으키는 유준님의 감상이 무척 맛깔납니다. 그 가운데 너무 재미있어, 한참이나 되뇌인 표현은 "마이너 레이블의 음반작업들을 보면 마치 아날학파의 역사서술"을 보는듯하다는 문장. 저작권(?)에 가입해 놓지 않으면 음반평론가들이 무단도용할듯. 새해에도 좋은 음반 많이 만나세요.

06/01/04 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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