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장의 LP]운무 자욱한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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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나의 잠을 깨운 것은 환기를 위해 열어두었던 창틈으로 슬며시 몰려들어온 짙은 비안개였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채 집 뒤편 금련산의 울창한 수풀 향내를 가득 안고서 나의 코끝을 간질이며 달콤한 나의 아침잠을 끝내 방해하고 깨어나게 한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안개속 풍경은 1년에 단 며칠, 이맘때가 아니면 연출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봄과 가을의 비구름은 쏟아낼 것들이 양이 적은지 이토록 짙고 묵직하게 깔리지도 않지만 바로 지금처럼 장마가 지면 터질듯한 검회색의 구름아래로 꿈틀꿈틀 그 깊고 어두운 속내를 무섭도록 가까이서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맑은 날은 이렇게 황령산과 금련산을 조망할 수 있지만...




오늘 아침은 이러한 모습...

내가 사는 아파트를 나서서 10분여를 걸어내려가면 바로 수많은 자동차와 사람의 행렬이 이어지는 간선도로지만 집에 있으면 비안개때문에 저 멀리 황령산뿐만 아니라 금련산 자락이며 심지어 부근의 연립주택과 교회도 흐려져 보이지 않는, 마치 첩첩산중에 들어앉아있는 듯한 몽롱한 상태를 만들어버린다.



흐린 날에는 역시 현악기의 소리가 공기를 타고 폐부 속을 찌르르하게 잘 파고들며, 특히 바이얼린의 소리가 더 그러한 듯싶다. 후텁하고 습한 날씨 속에 흐르는 바이얼린의 소리는 주위를 시릿하게 순간냉동을 시키며 내게 다가오는 듯하기에 더더욱 잘 받아들여지는 것같다.
하지만 같은 바이얼린의 소리라도 엄연히 차이가 있다. 프리츠 크라이슬러의 연주는 오히려 낙엽이 지는 만추(晩秋)의 풍경을 적시는 추적한 가랑비와 옅은 연무 속에서 진하고 따뜻한 한 잔의 에스프레소 커피를 불러오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야샤 하이페츠의 바이얼린 연주는 ‘파죽지세(破竹之勢)’라는 말이 딱 어울리듯 더운 한낮에 졸다가 차갑고 진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서 ‘각성(覺醒)’하는 소리이지 여름날이라도 아침에는 과한 듯하다.

이때 생각나는 바이얼리니스트가 있다. 우토 우기(Uto Ughi)...밀라노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유디 메뉴인과 조르쥬 에네스코 문하에서 배우고 여러 가지 특이한 배경으로 해서 이탈리아와 유럽에서 인기를 모으게 된 바이얼리니스트이다. 연주자로서 뿐만 아니라 실내악단 음악감독 및 지휘까지도 해내는 재능을 가지고서 유럽을 주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1975년 모스끄바 연주회에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이듬해 다시 모스끄바를 방문하자 그의 연주를 들으려고 엄청난 청중들이 몰려들어 소동을 일으키면서부터였다. 그리고 2002년에는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실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연주를 들어보면 정말이지 한 마디로 열정적이지만 감정의 과잉과 이성적 흐름의 딱 중간을 걷는 서늘함을 보여주는 그런 연주이다. 그가 쓰는 바이얼린은 과르넬리 델 제수와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데, 어느 선을 넘어서면 거친 연주가 되겠지만 이를 넘지 않으면서 음악적 내용물들을 분명하게 증폭시켜 내보낸다. 그래서 다이내믹한 연주이면서도 절제감이 있고 그러면서도 막힘이 없이 시원하게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음악을 내려놓는다. 그런데 그 속에는 대비감이 있으면서도 과하지 않는 감정의 굴곡이 살아있어서 이러한 장마철 아침의 짙은 운무를 뚫고 주위를 시원하게 식혀주면서 나의 마음 속으로 그대로 들어오는 것이다.
 

 

LP로도 약 20여장의 음반이 나왔었지만 조금 구하기가 힘들었으며, 지금은 RCA-BMG와 에라토에서 발매된 13장의 CD로 정리가 되어있다. 그 가운데서 이맘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반은 이 소품집이다.



여기에 수록된 곡들을 듣고 있자면 더 이상 그의 사운드에 대해 더도덜도 붙일 말이 없다. 아침에 차가운 오렌지 쥬스나 사과 쥬스 한 모금에 이 음반을 듣고 있자면 장마철 특유의 갑갑함에서 오는 짜증을 확 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좋다. 젊은 날의 루지에로 리치의 연주도 좋지만 청량감이 우토 우기에 비하면 조금 덜하다고나 할까...?

수록된 파가니니의 ‘라 캄파넬라’와 리스의 ‘무궁동(無窮動)’은 그 극치에 달하는 연주이고 모차르트 ‘하프너’ 세레나데 주제를 편곡한 론도나 사라사테의 ‘치고이네르바이젠’ 역시 서늘하며 심지어 함께 수록된 드보르작과 브람스의 소품마저도 약간의 얼음끼가 포함되어 있는 느낌이다. 파가니니나 다른 협주곡 음반들도 독특한 연주로 인하여 들어볼만하다지만 지금은 이 음반이야말로 가장 먼저 손이 간다.

 


모두들 기나긴 장마철과 무더위에 시원한 음악으로 건강한 여름나기 하시길... ㅎㅎ





*** Bonus Track [[ Recording Data ]] ***




<< side A >>

* A. Dvorak : 4 Romantic Pieces op.75
* N. Paganini : Rondo from Violin Concerto No.2 "La Capanella"
* J. Brahms : Hungarian Dance No.17

<< side B >>

* F. Ries : Perpetuum mobile op.34-5
* J. Brahms : Hungarian Dance No.20
* W. A. Mozart : Rondo from Serenade "Haffner"
* P. Sarasate : Zigeunerweisen

 - Uto Ughi Vln. / Piernarciso Masi Pf.

# RCA Italy - RL 31462
# ⓟ 1979



 = 2011. 7. 2 남저 조 희 영 씀 

작성 '11/07/02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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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저도 참 좋아하는 연주자 인데 못들어본 곡이 많이 들어있는 엘피군요.부럽습니다.그의 브람스와 브루흐 바협 바흐연주를 다시 꺼내 듣고 싶네요.

11/07/02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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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

협주곡이나 실내악 같은 데서 드러나지않는 연주자의 색깔은 바로 이런 음반에서 잘 찾아지곤 하죠...^^

11/07/03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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