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린 터펠이 2001년 내한 했을 때 - 객석 발췌
http://to.goclassic.co.kr/news/1971
현장 스케치 | 브린 터펠 내한공연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서울을 장악하다

한 달 전 휴가차 스페인에 다녀왔다. 마드리드 시내에 있는 한 식당 주인에게서 ‘스페인어를 모르면서 음식을 주문하는 몇 가지 방법’을 간신히 습득했다. 바로셀로나로 이동하면서 이 방법을 써먹고자 제일 먼저 식당을 찾았다. 세상에나. 메뉴판은 스페인어가 아닌 카탈루냐어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결국 먹고 싶었던 야채 샐러드는 물 건너갔고, 비타민을 갈구하던 뱃속은 또다시 고기와 느끼한 치즈만을 가득 물고 있는 바게트 샌드위치로 채워졌다). 하긴, 10여년 전 올림픽을 치룰 때도 바로셀로나는 스페인 국가가 아닌 지역 민요를 노래했던 곳이다. 여러 차례 내전도 불사하며 독립의 꿈을 키우고 있는 바로셀로나며 카탈루냐 지역이지만, 국가 경제의 40%를 책임지고 있는 이 풍요의 땅을 스페인은 앞으로도 여간해서는 놓아주지 않을 것 같다.
‘터펠의 기사에 갑자기 웬 스페인?’이라고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스페인이 아니라 터펠의 고향 웨일즈이다. 무척이나 충실하게 만들어진 팜플렛에는 곡목 해설은 물론, 가사 또한 원어와 한국어 번역이 같이 실려 있었다. 중학교 수준 이상의 영어 교육을 받은 사람치고 누가 ‘Dafydd y Garreg Wen’을 보고 ‘흰 바위 위의 다비드’라는 번역을 떠올릴 수 있을까?
동향 출신이 아닌 다음에야 누구도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된 이 노래들은 터펠은 세계 어느나라를 가건 프로그램에서 빼놓는 법이 없다. 최근에는 음반까지 발매했다. 물론 10월 11일 LG 아트센터에서 있었던 첫 내한 공연에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민족성이라든가 지역성에 얽매이는 사람치고 열려 있는 사람이 없다는 생각은 과연 편견일까? ‘체류 중 인터뷰 불가, 사진 촬영 불가’라는 계약 조건은 ‘생긴 것과 달리, 상당히 까다롭고 소심한 아티스트’라는 편견에 확인 도장을 찍어 주는 셈이다.
한데, 리허설에서부터 이런 편견을 뒤집는 반전의 기미가 느껴졌다. 반주자 말콤 마르티노와 함께 어죽한 공연장에 들어선 터펠은 페이지 터너에게 인사하고 이름가지 묻는 세심함을 보였다. 이때 살짝 엿보이기 시작한 타인에 대한 친밀감이 본 공연에서는 본격적으로, 그리고 온 몸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미 해외에서 터펠의 목소리를 들어 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길, ‘음반하고 똑같다’는 것이다. 이는 확실히 맞는 말이었다. 둥그스름하니 풍부한 저음, 드라마틱함, 낙천적인 분위기까지 그 목소리는 음반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터펠의 노래는 목소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보다 더 많은 요소를 청중에게 서비스하며, 공연장을 한층 더 풍요롭게 채웠던 것이다.
슈베르트의 가곡 ‘타르타루스의 군중’과 ‘고기잡이 소녀’를 부를 때까지만 해도 경직되어 있던 객석의 분위기를 풀어 준 것도 다름 아닌 터펠이었다. 세 번째 가곡 ‘송어’를 부르면서 마치 가사를 다 알아듣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다가온 터펠의 표현력은 얼굴에 지은 능청스런 코믹한 표정, 그리고 낚시줄을 감는 작은 액션과 함께 청중들을 그의 세계로 이끌었다. 일부 관객들의 성급한 중간 박수가 터져 나왔지만 호응이 없자 금세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어색해져 있는 객석에 터펠은 살짝 장난스레 윙크를 보내며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터펠의 무대는 예술가곡 리사이틀이라기 보다는 여러 개의 단막극에 가까웠다. 그의 드라마틱함이 자극적이고 단조로운 개성에 의한 아니라는 사실은 더욱 놀라운 것이다. 끓어오르는 애국심으로 ‘두 사람의 척탄병’을 부르는가 싶더니, ‘그대는 꽃과 같이’를 부를 때는 어느덧 땅 속 깊숙한 곳에서 끌어낸 듯한 심연의 사랑으로 사람을 이끄는 등 그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본 공연에서부터 사인회까지 이어진 푸짐한 메뉴
2부 순서로 이베르의 ‘돈키호테’ 연가곡을 마친 뒤 터펠은 갑자기 공연을 중단하고 객석에 말을 건넸다. 그것은 3일 전 고향에서 세상을 뜬 자신의 할아버지의 부고 소식이었다. 오늘이 장례식이지만 참석할 수 없는 자신의 안타까움을 전하며 터펠은 마지막의 웨일즈 민요를 할아버지에게 바치겠다는 양해를 구했다. 처음 들어 보는 웨일즈의 민요는 그러나 죽은 이에게 바치는 노래치고 몹시 밝고 또 흥겨웠다. 영어로 된 ‘내 작은 웨일즈의 집;이라는 노래를 제외한 모든 노래가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로 불려졌지만 사람들은 팜플렛에 적힌 번역과 터펠의 표정을 이정표로 삼아 그의 노래에 공감할 수 있었다.
앙코르 또한 본 공연과 마찬가지로 푸짐했다. ‘Oh! What a beautiful mornin’ ’을 부르며 터펠은 리허설 때 열심히 발음을 연습했던 ‘함께 노래 부릅시다!’를 외치며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했다.(아쉽게도 영어로 된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었던 청중은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이어 “내 별명”이라며 부른 ‘The Big Brown Bear’에서는 반주자 마르티노의 순발력과 재치가 한 몫 했다. 터펠의 자유분방함을 여유 있게 선반하고 있던 그는 이 노래의 말미에 곰의 물부짖음을 표현하는 괴성을 지르며 –터펠의 표현에 의하면-처음 ‘성악가’로 데뷔 무대를 가졌다. 여기에 “나와 같은 웨일즈 출신이 부른 노래”라며 선사한 리처드 버튼의 뮤지컬 곡 ‘How to handle a woman’에 이르기까지, 그는 모든 장르의 다채로운 메뉴들을 들고 나와 만찬을 아쉽지 않게 마무리 했다. 물론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정장 바지를 빌린 공연장 직원을 무대 위로 나와 인사시키는 마음 씀씀이 또한 잊지 않았다.
콘서트 이후 진행된 팬 사인회에서도 터펠과 마르티노 콤비는 사람 좋은 웃음을 잊지 않았다. 악수는 물론, 함께 사진을 찍자는 요청도 거절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팬의 요청으로 즉석에서 노래까지 불렀다. 덕분에 사인회는 무려 한 시간 반이 지나도록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느즈막이 마련된 저녁 식사에 살짝 끼는 것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뒤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기자에게 터펠은 “나는 브린인데요.”라며 밝은 미소를 건제며 먼저 악수를 건네주었던 것이다.

당신의 이름에 대해 정확한 발음을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브린 테르벨’이 맞다. 사람들이 ‘Terrible Terfel’이라든가, ‘Trouble Terfel’이라고 장난처럼 붙여 부르기도 한다.

‘바지’이야기는 대체 무엇인가?
턱시도 바지를 호텔에 두고 왔다. 아마 지금쯤 객실 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을 것 같은데… (합석한 공연장 관계자를 향해) 그 바지 마음에 들던데, 나한테 팔 생각이 혹시…?

첫 내한 공연이었는데, 소감은?
정말 놀랍고, 멋있고, 위대한 경험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한국 관객들의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체험했다. 또 어쩌면 그렇게 젊은이들이 많은지!

레퍼토리는 어떻게 선택한 것인가?
나는 여러가지 다양한 스타일의 노래를 보여주고자 항상 시도한다. 처음 전반부는 대부분의 성악가들이 예술가곡의 대들보로 여기는 작품들-독일 리트로 꾸미고자 생각했고, 그 가운데서도 선두에 서 있는 슈베르트와 슈만을 선택했다. 2분 순서는 보다 유머러스하게 시작하고 싶어서 이베르의 ‘돈 키호테’ 연가곡을 가져왔다. 영국 작곡가 핀치의 노래들은 내가 학생 시절 처음 만난 노래들이다. 세계 어디를 가든지 나는 항상 내 고향, 웨일즈의 노래들을 포함시킨다. 이 메들리는 내 친애하는 친구이자 뛰어난 반주자이고 세계 모든 나라의 민요에 통달한 전문가 브라이언 데이비스가 편곡한 것이다 그에게 이번에 한국 전통 민요를 채집해 전달해 주기로 약속했는데…

웨일즈 민요를 항상 프로그램에 포함시키는 것은 혹시 고향의 음악이라든가 문화를 전달해야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인가?
물론이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웨일즈의 노래를 배우며 자랐다. 웨일즈의 노래는 두 가지 다른 타입으로 나뉜다. 반주가 없는 전통 그대로의 구전 민요가 있는데 이는 하프가 선창을 해주기도 한다. 다른 하느는 웨일즈 작곡가에 의해 작곡된 노래들인데, 이 음악은 내게 있어 슈베르트나 포레에 의해 작곡된 노래만큼이나 의미있게 다가온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웨일즈의 민요만큼이나 다른 여러 나라의 전통 음악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오페라 돈 지오반니에서부터 볼프람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 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배역은?
팔스타프가 그랬다. 아주 고달픈 배역이었다. ‘육체적으로’ 굉장히 많은 것을 요구했다. 내 몸집도 만만치 않은데, 여기에 엑스트라 사이즈의 패드를 몸에 넣고 연기하다가 오히려 몸무게가 줄어버렸다(!) 사람들에게는 역시 ‘피가로의 결혼’의 피가로 역으로 가깝게 다가갔나 보다. 영국에서 이 배역으로 노래할 때면 집집마다 명함을 나눠 주는 기분이다.

가장 해 보고 싶은 배역은? 아니며 앞으로 곧 오래하게 될 배역은?
많은 이들이 나보고 ‘대체 보탄은 언제 노래할건데?’라고 묻는다. 그 때마다 나는 좀 더 느긋하게 몇 년 더 기다려야 할 거라고 대답해 준다. 아마도 2004년쯤 노래하지 않을까 싶은데…

반주자 마르티노와는 언제 만났나?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다. 우리는 각자 다른 학교를 다녔지만 수년간 함께 호흡을 맞추며 끈끈한 우정을 과시하고 있다. 심지어 내가 실수라도 할라치면 즉석에서 피아노 반주를 바꾸어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마르티노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학창 시절 누가 더 인기가 좋았다?
(치열한 눈싸움 끝에 터펠이 자신을 엄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에 기도 안 찬다는 듯한 마르티노의 장난스런 시선이 이어졌다.)

참으로 식욕이 왕성한데, 혹시 다이어트에 대한 생각은 없나?
천만에. 많이 먹어야 노래도 잘 나온다. 여기 오기 직전 홍콩에서는 공연을 마친 뒤 주빈 메타와 함께 앉은 자리에서 여덟 접시를 해치웠다.

뒤이어 타이페이로 간다고 들었다. 역시 예술가곡을 노래할 예정인다?
아니. 오케스트라 협연이 예정되어 있다. 타이페이 내셔널 오케스트라인데, 볼프람, 보탄 등의 바그너 아리아를 노래한다.

허기를 채운 뒤 터펠은 느긋하게 시계를 보며 오늘은 늦잠 좀 자야겠군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일 몇 시 비행기지?(터펠)”
“아침 7시 30분(매니저)”
“오! 정말 잘났어!(터펠)”
하는 경악의 외침과 더불어 터펠은 매니저의 얼굴에 방금 입을 닦은 냅킨을 휙 날렸다. 날아가는 냅킨을 바라보며 머릿 속에서 몇 가지 편견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터펠은 명성에 걸맞는 까다로운 아티스트이다’ 혹은 ‘지방색을 강하게 가진 지극히 민족적인 인물이다’라는 각종 명제는 그야말로 편견에 지나지 않았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그의 본 모습은 단지 태어난 고향에 대해 소박하고 순수한 사랑을 표현하는 털털한 웨일즈 아저씨에 다름아니었음을.
작성 '04/02/14 15:05
cr***수정 삭제 트랙백 보내기
링크 글 (Trackback) 받는 주소: 로그인 필요
0/1200byte
한 줄 덧글 달기
 
 1
 


뉴스란에 등록하신 공연정보는 공연에도 링크될 수 있습니다.
번호 글쓴이 제목 날짜 조회추천
1168ex*** '04/03/054437 
1167li*** '04/03/054517 
1166sh*** '04/03/044091 
1165ja*** '04/03/0249181
1164  '04/02/274375 
1163sh*** '04/02/2784359
1162se*** '04/02/273766 
1161cr*** '04/02/2758823
1160cr*** '04/02/2743482
1159er*** '04/02/2562821
1158ag*** '04/02/254198 
1157zw*** '04/02/254312 
1156ag*** '04/02/2340211
1154mu*** '04/02/214276 
1153se*** '04/02/204628 
1152ky*** '04/02/2049301
1151mu*** '04/02/194994 
1150cm*** '04/02/184192 
1149ni*** '04/02/184358 
1148ky*** '04/02/174529 
1147fa*** '04/02/174830 
1146ce*** '04/02/1743711
1145vi*** '04/02/174411 
1144cr*** '04/02/1451331
1142ag*** '04/02/124819 
새 글 쓰기

처음  이전  981  982  983  984  985  986  987  988  989  990  다음  마지막  
총 게시물: 26099 (981/1044)  뒤로  앞으로  목록보기
Copyright © 1999-2020 고클래식 All rights reserved.
For more information, please contact us by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