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WILLIAMS -1-
http://to.goclassic.co.kr/qanda/6426

제 짧은 해석이 부족할수도 있으니 원문을 함게 싣습니다 이 글들은 존윌리엄스 공식 홈페이지로부터 발췌했습니다

John Christopher Williams was born in Melbourne, Australia on 24th April 1941. His father, Leonard Williams, had emigrated to Australia from London in the late 1930's, where he met his wife, Malaan, through a common love of jazz music and political activism. Len was a respected jazz guitarist whose interests had slowly turned towards the classical repertoire, and when John was four years old, he received his first guitar from his father, although John insists that proper tuition did not start for another two or three years. Because of his new-found love for classical technique, Len refused to allow John to dabble in more free-form styles of playing, a fact often regretted by the virtuoso in later life.

존 크리스토퍼 윌리암스는 1941년 4월24일에 호주 멜버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레너드 윌리암스는 1930년대 후반에 런던에서 호주로 이주를 하게된다.거기서 그는 정치적견해과 째스뮤직에대한 애정이 같았던 아내 밀란을 만나게된다. 렌(레너드)은 훌륭한 째스기타아리스트였지만 그의 관심은 서서히 클래식한 레퍼투아로 옮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존이 4살이었을때 그는 그의 첫번째 기타아를 아버지로부터 받게 된다.비록 존은 그당시에 2-3년동안은 제대로된 기타아 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클래식한 연주에 관심을 갖는것을 발견하고, 존이 자유 로운 스타일로 장난스럽게 연주하지 못하게 했다.이러한 사실은 나중에 비루투오소 존에게 유감스러운 일로 남았다.

In 1952, the family returned to England. Len wanted to set up a guitar school (which he did, with great success: The London Guitar Centre continues its work today). He also had an ulterior motive: recognising his young son's talent, he wanted him to study with the only the best teachers. This was not an option in Australia, and through a friendship with Terry Usher, they met Andres Segovia during a visit to London. The "creator of the modern classical guitar" was impressed with the 11-year-old and arranged for him to attend his summer school at the Accademia Musicale Chigiana di Siena in Italy. The young prodigy returned annually until 1959.

1952년에 존의 가족은 영국으로 돌아오게된다.렌은 기타아학교를 세우길 원했고,그는 큰성공과 함께 이일을 해낸다.런던 기타아 센터는 현재에도 계속 운영되고있다. 그는 또한 장래의 목표를 가지고있었다:그것은 바로 그의 어린아들의 재능을 인식한 후에 존이 가장 최고의 선생님들과 공부하길 바라는것이었다.이것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선택이 아니었다.TERRY USHERD와의 우정을 통해 그들은 안드레스 세고비아를 런던여행동안 만나게 된다.현대 클래식기타아의 창시자는 11살짜리 아이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그리고 그의 여름학교에 존이 참가할수 있도록 준비했다.이탈리아의 the Accademia Musicale Chigiana di Siena에서 열리는 세고비아의 여름학교에 참가하도록 준비하였다.젊은 신동은 1959년 까지 매년 섬머스쿨에 참가하기 위해 이탤리로 돌아왔다.

The first of John Williams' successes came when, at the request of his fellow students, he received the unprecedented honour of giving the first complete solo recital by a student of any instrument in 1955.While not in Sienna, he attended the Royal College of Music in London from 1956 to 1959, where he studied piano and music theory. He didn't study guitar simply because, like most other musical colleges and conservatoires at that time, the RCM didn't provide a Guitar curriculum! Shortly after his graduation, however, he was invited to run the newly-created Guitar department. The College was evidently getting prepared for the onslaught of musicians who'd want to emulate their recent alumnus! He remained in the post until 1973, and has maintained a relationship with the College for many years and still makes occasional visits, as he does to the Royal Northern College of Music in Manchester, being an Hon. Fellow of both institutions.

존윌리엄스의 성공들중에 첫번째는 1955년에 그의 동료학생들의 요구에 의해 갖게된 첫번째 리사이틀이었다.이것은 전례가 없었던일로 어떤 종류의 악기(여러종류중 한악기)를 연주하는 한명의 학생이 치루는 완전한 솔로 리사이틀이었다.그는 시에나(이탈리아의 산지)에서가 아니라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런던의 로얄 음악 칼리지에 다니게된다.거기서 그는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공부하게 된다.그는 단순히 기타아만을 공부하지는 않았다.그당시의 다른 음악 칼리지나 컨서버토리에서 그런것처럼.Royal college of music은 기타아 커리큘럼(교과과정)을 개설하지 않았다.그러나 그가 졸업하구 곧 바로 얼마 안있어 새로이 기타아과가 운영되었고, Royal college of music은 존을 초빙했다.그대학은 그들의 최근의 동료들과 경쟁하길 원하는 뮤지션들의 투쟁(맹공격)에 대해 확실히 준비하고 있었다(배우고자하는 학생들에게 존윌리엄스를 교수로 세운것이 아주 훌륭했다는 의미일듯).존은 1973년까지 그 지위에 있었고 수년동안 맨체스터에 있는 로얄 nothern 음악칼리지에 했던것처럼 그학교와 유대관계를 가졌다. 그는 두학교의 친구이자 honey(사랑스런보배,자랑)가 되었다.

Stephen Dodgson, lecturer in Harmony at the College, was to continue a professional association with his erstwhile pupil for many years as arranger and advisor, and his Second Guitar Concerto was written in 1971 at Williams' commission, and is indeed dedicated to the guitarist.

STEPHEN DODGSON,칼리지에서 화성을 강의했던 교수는 오랫동안 편곡자와 충고자로서 그의 옛 제자와 프로페셔날한 관계를 유지해왔다.그는 두번째 기타아 콘체르토를 윌리엄스의 위탁으로 1971년에 작곡하였고, 존에게 헌정하였다.

Williams made his professional debut at the Wigmore Hall in London on 6th November 1958, five months shy of his 18th birthday and completing his formal musical education. Even then, he had a reputation to live up to, as the concert bill included the now famous quote from Maestro Segovia: A prince of the guitar has arrived in the musical world. God has laid a finger on his brow, and it will not be long before his name becomes a byword in England and abroad, thus contributing to the spiritual domain of his race. I hail this young artist on the occasion of his first public performance, and make the heartfelt wish that success, like his shadow, may accompany him everywhere.

윌리엄스는 그의 프로로서의 데뷔를 18살생일에서 5달 부족했던,그리고 그의 공식적인 음악교육을 받았던것을 완성했던(사사를받거나 학교를다니거나 레슨을받은것을 끝마쳤다는 또는 독주자로서 태어났다는 의미) 1985년 11월6일 런던위그모어홀에서 가졌다.심지어 그때에도 그는 음악회용 포스터에 그 유명한 마에스트로 세고비아의 다음과 같은 인용이 포함되었을 정도로 그에 걸맞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기타계의 황태자가 음악세계에 나타났습니다.신께서는 그의 이마에 손가락을 놓으셨습니다(축복 하셨다는 의미일듯.기타의 핑거와 신이 지니신 핑거를 매치시킨듯함). 그리고 영국과 해외에서 그의 연주인생이 갖는 정신적인 영역(지배)을 드러내면서 (기타아의) 대명사가 될 날이 멀지 않을것입니다.저는 그의 첫번째 대중앞에서의 공연을 맞이 하여 이 젊은 아티스트를 두손모아 환영합니다.그리고 마음깊이 제가 바라듯이 존이 성공하길 바랍니다.그리고 그의 차양(감싸주는 보호해주는 존재)처럼 어디서나 그의 연주 와함께 할것입니다.

Of his performance,the London Times had to say: ... Already he has a remarkably well-developed technique; this was particularly evident in a transcription of three movements from a Bach cello suite, [No.3, trans. J.W. Duarte] where every detail was perfectly in place, and to his control he added most musical and stylish phrasing and tone-colouring. Nervousness may well have been responsible for a few over-stressed notes which obtruded from his otherwise shapely line in Weiss's well-known A-minor suite and inevitable artistic immaturity was no doubt the explanation of the unstylish rubato he frequently allowed himslf in Sor's Variations on a Theme of Mozart.In a more romantic sonatina by Torroba he would well have allowed his imagination much freer rein, particularly in the matter of varied tone-colouring. But he is plainly an accomplished, serious-minded young artist whose future development can be watched with great interest.

런던타임즈는 그의 연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미 그는 뛰어나게 잘 개발된 테크닉을 가졌다.그러한 사실은 J.W.DUARTE가 편곡한 바흐 첼로조곡 3번의 3개의 악장(6개중3곡)의 편곡에서 특별히(여실히) 증명된다.그곡들의 모든 세부항목(악상기호등등)들은 적재적소에 쓰였고,그는 그의 테크닉적 컨트럴에 음악적,그리고 스타일리쉬한 프레이징과 음색을 더했다.바이스의 잘 알려진 A MINOR 조곡에서 그는 다른방식의 (다른점에서) 맵시있는(아름다운) 스타일(라인,경계)을 보여주는데 거기서 표현된(OBTRUDE) 약간과도한 액센트의 음조는(음표의 해석) 그의 긴장감이 원인인 듯 하다. 그리고 어쩔수없는(피하기어려운) 예술적 미성숙성은 소르의 모짜르트 마술피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에서 그가 자주 보여준 스타일없는 루바토의 빈번한사용에서 다소 드러났다. 토로바가 작곡한 아주 로맨틱한 소나티나에서 그는 좀더 자유스럽게(MOR FREER REIN) 특별하게 다양한 음색에 있어서 상상력을 표현했다.그러나 그는 명백하게 조예가 깊고 숙달된, (음악에대해)심각하게 고려하는 젊은 아티스트이다.그가 미래에 어떻게 발전할지가 대단히 흥미있고,주목된다.

This criticism of his rather straight-laced technique has, in some circles, remained to this day, with occasional comments about Williams' occasionally soul-less style of playing. The programme of his first performance mirrored the contents of his first two record albums, recorded at that time, and released in early 1959. He signed with the very prestigious Ibbs & Tillett Agency, which later became part of the Harold Holt Organisation, now Askonas Holt, with whom he has remained throughout his career. Highly successful debuts followed in Paris (1959), Madrid (1961) and in 1962 he had the rare privilege for a Western musician to tour the Soviet Union. Wherever he played, he was greeted with adulation.His first UK appearance upon his return, again at the Wigmore Hall, was hailed as a major event,

다소 STRAIGHT LACED한(곧게 짜여진) 그의 테그닉에 대한 비평은 몇가지 범주안에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때때로 정신이 깃들지 않은 연주라는 평과 함께... 그의 첫번째 연주 프로그램은 그당시,1959년 초에 발매되었던 그의 첫번째 두개의 앨범의 내용을 반영했으며 .존은 훗날 HAROLD HOLT ORGANISATION(지금은 ASKONAS HOLT)의 일부가 된 아주 유명한 IBBS & TILLETT 에이전시와 계약을 하게 된다.ASKONAS HOLT화 함께 존은 그의 경력을 쌓아간다.(그의경력에는 아스코나스 홀트가함께 존재한다.)1959년의 파리에서,1961년의 마드리드 에서 그는 대단히 성공적인 데뷰를 했고,1962년에는 서방음악계에게는 드문 소비에트 연방으로의 여행이 주어졌다.그가 연주하는곳마다 그에대한 추종과 함께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그가 영국으로의 첫 귀향은 다시 위그모어 홀에서 였다.그 공연은 중요한 행사로서 환대받았다.

the Times stating: What has emerged first and foremost was the extent to which Mr Williams has strengthened his technique since we last heard him on this platform. He can now boast a very controlled agility, which served him admirably from viewpoints of rhythmic poise in a suite by Bach and and two sonatas by by Scarlatti. ... His concluding romantic group by Villa-Lobos, Turina, Ponce and Grandaos was also treated with sympathetic solicitude, but all this later music he still tends to interpret too inexpansively in terms of black and white instead of enjoying the flexibility and wider range of expressive colour for which it cries out.

타임즈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처음으로 그리고 맨앞에 보여진것은,예전에 처음으로 플랫폼(강단)에서 들었던 연주보다 더욱 견고한 테크닉을 가지고 돌아온 윌리엄스였다. 그는 매우 잘 컨트롤된 민첩함을 가지고있다.이러한 민첩함은 그에게 감탄할만하게 바흐의 조곡과 스카를랏티의 두개의 소나타에서 리듬감있는 평형감을 제공한다.그가 마지막으로 연주한 빌라로보스,투리나,퐁세,그라나도스등의 로맨틱한 그룹의 연주는 연민에 찬 열정(애태움)으로 연주되어진다. 그러나 모든 그의 나중의 음악들은 그 음악들이 내뿜는 융통성(적응성,유동성)과 다양한 범위의 표정풍부한 색깔대신에 너무 좁게(넓지않게)흑과백의 표현으로 해석하는 경향이있다.

After two further successful recordings, 1963 brought a debut in Japan. He was then offered a recording contract with CBS Records (now Sony Classical), the first release, unimaginatively entitled CBS Presents John Williams, being issued in 1964, in time for his U.S. debut in New York on 6th December of that year. Williams has since released at least one new recording each year for the company, although less classical repertoire has also been issued by other labels and collaborations with Julian Bream by RCA. Until the mid-seventies, almost all recording sessions were performed in New York, under the watchful eye of CBS Masterworks producer Paul Myers. In 1964 he married for the first time, though this regrettably ended in divorce in 1969. His daughter Katy, born in 1965, is now a jazz pianist.

더 나아가 두번의 성공적인 레코딩후에 존은 1963년에 일본데뷔를 갖는다.그때 그는 현재의 소니 클래시컬인 CBS레코드사와 레코딩계약을 하게 된다.첫번째 발매된 앨범은 상상력없게 이름지어진 "CBS가 제공하는 존윌리엄스"였다.이 앨범은 1964년에 발행되어졌고 그해 12월 6일에 존은 미국 뉴욕에서 데뷔를하게 된다.윌리암스는 여태까지 매년 회사를위해 적어도 하나의 새로운 레코딩을 발매했다.비록 다른 레이블들을 통해 덜 클래시컬한 레퍼투아가 또한 발매되었고,RCA에 의해 줄리안브림과 공동작업한것이 발매되긴 했지만 말이다. 70년대 중반까지 CBS의 마스터링프로듀서 폴마이어스의 주의깊은 눈빛아래서 거의 모든 레코딩 활동이 뉴욕에서 행해졌다.1964년에 처음으로 결혼했지만 후회스럽게도 1969년에 이혼으로 끝나고 만다.1965년에 태어난 그의 딸 케이티는 현재 째스 피아니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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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important person in Williams' background as he was building his career was the imposing figure of Julian Bream. Eight years John's senior and a child prodigy himself (he made his debut at the age of 12 - by coincidence, just when Williams received his first guitar...), Bream represented a different school of musical expression, and as Andres Segovia was creating a classical repertoire all over the world, Bream worked hard throug the late '40s and '50s dispelling the preconceptions of the classical establishment in the UK towards the guitar. A certain amount of the credit usually awarded John Williams for popularising the classical guitar is Bream's, and Williams is the first to acknowledge this fact.

존윌리엄스가 그의 경력을 쌓아가는데 있어서 윌리엄스의 배경이 된 중요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존 보다 나이로 8살 더 많은, 그리고 그 자신이 신동이었던 줄리안 브림 이라는 훌륭한 인물이었다.-12살의 나이로 데뷔했는데 이때는 우연히도 존윌리엄스가 처음 으로 그의 첫번째 기타아를 받았던 때였다.-브림은 세고비아가 전세계의 클래시컬한 레퍼투아 를 창조한것처럼 음악표현에 있어 다른 하나의 유파를 대표한다.브림은 19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 에 걸쳐 기타에대한 클래시컬한 성취에대한 편견을 쫒아버리기위해 영국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일반적으로,클래식기타아를 대중화 시킨데 대한 존윌리엄스에 대한 상당한 찬사는 브림의것이었다. (브림의 작품이었다정도로 해석하면 될듯함).이 사실을 제일 먼저 인정한것은 윌리엄스였다.

It was inevitable that the two men should meet professionally, and although a meeting of two lesser men (and talents) would have caused sparks of resentment, one already the elder statesman (in his thirties!) and the other reluctantly wearing the prince's crown Segovia had conferred upon him, the only sparks created by their meeting were those of creativity.

두사람이 프로페셔날하게(직업적으로) 만나야했던것은 필연적이었다.그리고 비록 두 명의 부족한 인간(재능)이 만나면 분개의 스파크(섬광)를 야기했을지라도-보통사람 둘이 만나면 의견차이때문에 싸운다는 뜻일듯-한사람은 30대에 이미 중후한 정치가였고, 다른 한사람은 마지못해 쓰고는 있지만 세고비아의 황태자 왕관을 쓰고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의 만남에서 충돌이 있었던것은 유일하게 창조성에 대한 충돌이었다.

Both men immediately acknowledged each other's greatness and in Williams' own words "although the way we each play is alike as chalk and cheese, we're not two musicians, we're an ensemble and we create magic together". Their appearances together were to continue until the end of the seventies, culminating in a live recording of their U.S. Tour in 1978.

"두사람은 즉시 서로의 대단함을 인정하게 되었다.윌리엄스의 말을 빌려본다. 우리가 각각 연주하는 방식이 비록 외관은 비슷하나 실질은 완전히 다를지라도(different as chalk from(and) cheese=(as) like as chalk and(to) cheese)우리는 두사람의 뮤지션이 아니었다.우리는 앙상블이었고,함께 마술을 창조해냈다." 그들이 함께 모습을 드러낸것은 최고정점에 이른 라이브 레코딩(1978년)-그들의 미국투어 의 일환이었던-을 했던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But back to the story... Williams was part of a group of up-and-coming high-profile young classical solosists, including Isaac Perlman, Fou Ts'ong, Daniel Barenboim, Vladimir Ashekanzy and Jacqueline du Pre. Because of the very nature of soloists' repertoire, it was natural for them to take advantage of any occasion to make music together. Where one appeared, the others were rarely far behind, and great friendships ensued (to the extent that Williams and du Pre were to be the official witnesses at Fou Ts'ong's wedding). Williams and Jacqueline du Pre duetted quite often throughout the sixties and he guested on one of her recordings in 1963, playing de Falla's Jota from Suite Espanola (it doesn't appear in my Discography, but you may want to check out the 2-CD Jaqueline du Pre Recital, EMI 5659552).

그러나 이야기로 돌아가면 윌리엄스는 정력적인(수완좋은,머리좋고 근면한) 높은레벨의(고자세의) 젊은 클래식 솔로이스트들의 그룹의 일원이었다.이착펄먼.Fou Ts'ong,다니엘 바렌보임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그리고 재클린 뒤 프레가 이 그룹의 멤버였다. 솔로이스츠들의 레퍼투아의 바로 그 특성때문에 함께 음악을 만드는 좋은 기회를 갖는것은 그들에게 당연했다.한사람이 나타나는곳에 다른사람은 좀처럼 뒤에 멀리있지 않았다.(같이했다 는 의미일듯)그리고 그들의 계속되는 우정은 계속되었다.(fou Ts'ong의 결혼식에서 윌리엄스와 뒤프레가 공식입회인(증인) 이었다는 사실이라는 점(정도)에서) 윌리엄스와 재클린 뒤프레는 60년대에 종종 듀엣을 하곤했다.그리고 그는 1963년의 그녀의 레코딩중 하나에 게스트로 초청되었다.그리고 존은 파야의 스페인 모음곡중 호타를 연주했다.(본 사이트의 discography에는 없지만 EMI에서 출시된 재클린의 2씨디로부터 체크할수있다.)

He also made appearances with Wilfred Brown (Tenor), the London String Quartet and other artists, and eventually took Julian Bream's place in regular appearances with Alan Loveday (violin) and Amarylis Fleming (cello). Television was rapidly becoming the medium of the future, and Williams was often seen on the small screen, both in musical and educational programmes.

그는 또한 테너 윌프레드 브라운,런던 스트링 쿼텟,그리고 다른 아티스트들과 공연을했다. 결국 앨런 러브데이(바이얼린) 아마릴리스 플레밍(첼로)와 함께한 정규발표에 서는 줄리안브림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다.텔레비젼은 차츰 미래의 미디어(매체)가 되어갔고,윌리엄스는 자주 작은 스크린(TV)에 비춰졌다.-음악프로그램과 동시에 교육프로그램에-

He spent a considerable amount of energy on finding new pieces to play and an increasing interest in avant-garde music led him to performing at the Premiere of Michael Tippett's King Priam in 1963, and later being involved in Pierre Boulez's ambition of recording Anton Webern's entire oeuvre, some of which included a guitar part. The resulting Complete Webern is available on CD from Sony (SM3K 45845)

그는 상당한 시간을 연주할 새로운 소품들을 찾는데 할애했다.그리고 아방가르드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존은 1963년에 마이클 티펫의 king priam의 초연에서 공연을 하게된다. 나중에는 Anton Webern의 전작품을 레코딩하려는 피에르 불레즈의 열정에 동참하여(몇몇작품은 기타아파트가 포함된다)소니씨디로 출시하기에 이르렀다.

By the end of the '60s, he was probably becoming rather bored of endlessly playing the same repertoire to the same audiences, and was tireless in seeking out new material and new venues. In common with many classical musicians at the time, and much to the dismay of some in the music establishment, he dismissed wearing white tie and tails for concert performances, prefering to appear in a plain suit. Before long, this developed further and by the end of the 1960's he invariably appeared in trendy flowery shirts (and I expect cringes whenever he sees photographs of himself at that time...).

60년대 후반에 윌리엄스는 항상 똑같은 청중앞에서,똑같은 레퍼투아를 가지고 연주하는것에 다소 싫증을 느꼈던거 같다.그리하여 새로운 자료와 새로 연주할 곳을 찾기위해 지칠줄 모르는 노력을 들였다.그 당시의 많은 클래식 뮤지션들이 입었던 흰 타이와 콘서트 연주를 위한 연미복을 그는 입지않았다(내쳤다). 그리고 평범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이러한것들에 기성음악단체는 아주 많이 당황하게 된다. 머지않아 이런것들은 더 심해졌는데 1960년대의 끝에서 그는 늘 유행하는 꽃무늬셔츠(화려한셔츠) 를 입고 나타났다.(나-오피셜사이트의 필자-는 그당시에 그가 자신의 사진들을 볼때마다 움찔하길(싫증내길) 기원했었다)

His father's love of jazz meant that he had many friendships outside classical circles, and in 1969 John Williams became the first classical musician to appear at Ronnie Scott's Jazz Club in London. His appearances there during the summer season continued for many years until the late 1970's, and one of the concerts in 1971 was filmed for television. He had approached Patrick Gowers and Andre Previn to develop some jazz standards for his own style of playing, but this idea was eventually abandoned, and the music remained the classical repertoire, including Albeniz, Tarrega and Villa-Lobos.

그가 클래시컬한 범주외에 많은 친구들을 가진것은 째스를 좋아했던 그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그리고 1969년에 존 윌리엄스는 런던에 있는 로니 스캇의 째스 클럽에 나타나는 첫번째 뮤지션이 되었다.그리고 1971년의 컨서트들가운데 하나는 텔레비젼에 방영되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연주스타일에 있어 약간의 째스적인 표본을 개발하기 위해 패트릭고어스 와 안드레 프레빈과 접촉했다.그러나 결국 이러한 생각을 포기했고,음악은 알베니즈 타레가,빌라로보스등의 클래시컬한 레퍼투아로 유지되었다.

However, one piece of music he played there did not belong in the dusty halls of the classical concert hall, but in the darkened labyrinths of the film scoring studio.

그러나 그가 연주했던 일부 음악은 클래식컨서트홀의 먼지쌓인(고풍스런) 홀에 속하는곡이 아니었다.

In 1969, Williams met film composer and arranger Stanley Myers, who was working on the score of the film "The Walking Stick". Myers played a short piece on the piano, which he was thinking of using as one of the motifs for the film's score, but on hearing the three bars, John immediately became excited and encouraged Myers to develop the theme, not only for the purposes of the film, but as a guitar tune. Myers took the advice, developed the tune and invited Williams to play it on the movie's soundtrack. The film isn't notable, and the piece of music didn't become famous for another decade, when it was re-used for another film. The later film was The Deer Hunter, and the piece of music: Cavatina... Since that time, Williams and the piece have been inextricably linked, an association of which he is evidently proud, having recorded it on no less than four separate occasions.

1969년에 윌리엄스는 영화음악작곡가이자 편곡가인 스탠리 마이어스를 만나게 된다. 스탠리 마이어스는 영화 the walking stick의 스코어(악보,여기선음악의뜻정도) 를 담당하고 있었다.마이어스는 영화음악(스코어,악보,총보)의 모티브(악곡의동기,주제) 의 하나로서 사용하려고 생각했던 짧은 음악을 피아노로 연주했다.그러나 세소절을 들은 윌리엄스는 고무되었고 마이어스로 하여금 그 테마로 음악을 작곡하도록 격려하였다. -영화음악으로서 뿐만 아니라 또한 기타의 곡조로서-마이어스는 충고를 받아들여 그 곡조를 작곡했고 윌리암스를 초대해서 영화 사운드 트랙에 쓸 그 음악을 연주하게했다. 영화는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고,이 소품은 십년 동안 유명해지지 못하게 된다. 그 음악이 다른 영화에서 다시 사용되었을때 그 순간부터 윌리엄스와 그 작품은 풀리지 않게 단단히 엮여졌다. 그 영화의 이름은 '디어헌터(1979년작품)'였고, 그 작품은 바로 "카바티나"였다. 그가 아주 자랑스러워하는 레이블(CBS)은 이곡을 네번이나 각각 녹음했다.

Work on "The Walking Stick" took Williams in entirely new directions, and his career was to take some strange turns for a classical musician...

the walking stick에서의 작업은 윌리엄스로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방향에 빠져들게했다. 그는 클래식뮤지션으로서 약간 이상한 전환(변화,선회)점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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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02/02/02 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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