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WILLIAMS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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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eling somewhat constrained by the existing repertoire for the classical guitar, no doubt influenced by musical trends in England in the late 60's, and probably somewhat disenchanted with the direction his professional life was taking, John Williams started the seventies seeking new avenues for his talents and vigorously looking for new works to perform. This coincided with the shake up of the musical world in general, the "discovery" of Oriental music and musicians, and the coining of "fusion".

윌리엄스는 클래식기타아의 기존의 레퍼투아때문에 다소 속박된 느낌을 받았기때문에 1960년대 후반에 영국에서 일어난 음악적 경향에 영향을 받게된다. 그는 프로로서의 삶에 있어서 나갈 방향성에 대한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것 같다.존 윌리엄스는 70년대에 그의 재능에 대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고,연주할 새로운 작품들을 열정적으로 찾아다녔다.이러한것은 일반적으로 음악계에서 일어났던 퓨전의 탄생(퓨전 이라는 새로운 뮤직의 신생)과 동양음악과 동양음악가의 '발견'에 의한 각성과 함께 일어난것이다.

Possessing strong political views, the principal way John Williams makes them known is by the causes for which he is prepared to perform at fundraising and similar events. This has lead to many musical friendships and collaborations. His opposition to the military takeover in Greece found voice in many appearances with exiled Greek singer Maria Farandouri, performing the works of Mikis Theodorakis, which eventually found its way onto record. Regrettably, this has yet to be released on CD.

존윌리엄스는 강한 정치적 견해(관점)을 가지고있었다.그가 이러한것들을 표현하는 주요한방법은 기부금행사나 그와유사한 행사에서 연주를 준비하는 일련의 활동(운동)에서였다. 그리스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는,망명한 그리스의 가수마리아 파란두리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작품을 공연하면서 자주 보여졌다. 그리고 레코드로 만들어질 방법이 모색되어졌다.유감스럽지만 이런것은 더더욱 씨디로 발매되어져야한다.

Williams also made friendships with outlawed Chilean group Inti-Illimani, with whom he appeared on many occasions throughout the seventies and eighties, and was happy to use his name and fame to achieve a wider recognition for battles he thought worth fighting.

윌리엄스는 또한 불법으로 금지된 칠레그룹 '인티-일리마니'와도 친분을 쌓았다.그는 그들과 70년대 80년대를 통해 자주 함께 등장했다.그는 그의 이름과 명성이 싸울가치가 있는 전쟁에 폭넓게 사용되어지는것을 기뻐했다.

In 1971, CBS Records gave him a special award to celebrate having sold one million records, a unique feat at the time for a classical musician. The award was a specially-comissioned crystal sculpture of Williams' left hand, which was reproduced as the cover of his next album. This, strangely enough, was not a CBS release, presumably due to the fact that it was to contain pieces far removed from the classical repertoire, and in arrangements even further distant... Changes arose from his increasing association with Stanley Myers, and also featured him playing the electric guitar for the first time, an instrument which he championed many times before and since, striving to achieve a recognition for his primary instrument's close cousin which he feels it deserves, outside the confines of rock music and jazz. The classical music establishment sneered at Williams "selling his talents short". The walls were tumbling down and some people considered Williams was wasting his time.

1971년에 CBS 레코드사는 그의 백만장 판매를 축하하기위해 특별한 상을 주었다. 그시대에 클래식 뮤지션으로서는 유일한 업적이었다.그 상은 그의 왼손을 조각한 특별 주문된 크리스탈 조각상이었다.또한 그 조각상은 훗날 그의 다음 앨범의 표지로 등장되기도 한다. 충분히 예상밖인 이런일은 CBS의 발매때문에 이루어진것은 아니다. 그것은 클래시컬한 레퍼투아에서 꽤 멀리 벗어난 작품들을 포함하기때문이라고 추측할수 있다.그리고 스탠리 마이어스와의 돈독한 교분을 통해 일어난 많은 변화역시 그 원인의 하나이다.또한 그는 처음으로 일렉기타아를 연주하는사람으로 여겨진 클래식기타아리스트 였다.그리고 윌리엄스는 롹이나 째스음악에 대한 제한으로부터 벗어나서 그가 가치있다고 느끼는 그의 주된 악기의 사촌뻘인 악기이며, 그가 전에 그리고 주욱 옹호해온 악기를 잘알기위해 노력했다.(즉 일렉기타아나 째스 기타아에 대한 관심) 기성 클래식음악계에선 윌리암스가 그의 재능을 불충분하게(짧게) 사용한다고 냉소를 뿌렸다. 벽들이 무너졌고 (클래식과 째스나 롹의) 그런것들에 대해 일부사람들은 윌리암스가 그의 시간을 허비하고있다고 생각했다.

This, however, just made him dig his heels in ever harder (and grow his hair longer...) and in 1973 he returned to the same Abbey Road studio to record The Height Below, this time with Beatles supremo George Martin at the helm. The result was a true fusion of all styles, from classical, through Jazz, to pop, all linked by far-eastern undertones.

그러나 그런 비평들은 그로하여금 어느때보다도 더 주장을 확고하게 했다.(DIG ONE'S HEELS) 그리고 그는 머리카락을 더욱 길게 길렀다.그리고 비틀즈의 지도자였던 조지 마틴의 세상이었던 때인 1973년에 그는 THE HEIGHT BELOW라는 앨범을 녹음하기 위해 다시 애비로드 스튜디오를 찾았다.이 앨범은 클래식 째스 팝 멀리 동양의 잘알려지지않은 음악까지 아우르는 진정한 퓨전이었다.

His interest in the electic guitar also led him to commission works from Andre Previn and Patrick Gowers for the instrument, which when recorded were matched by straight classical pieces in an effort to mollify the die-hard traditionalists. I wonder if anything should be read into the fact that whilst the "traditional" B-sides of these LPs have been released on CD, the more experimental title tracks remain to be issued...

일렉기타아에 대한 그의 관심은 앙드레 프레빈이나 패트릭 고어스에게 작품을 부탁하게했고 녹음하기에 이른다.-완고한 보수주의자들의 반감을 완화시키기 위해 정통클래식작품을 함께 녹음했다.- 나는 전통적인, 이런 LP들의 B면의 음악들이 CD로 출시되어진 반면에 더욱 실험적인 A면(title)은 아직 CD로 발매되기위해 남아있다는 사실로부터 뭘 생각해야하는지 궁금하다

In the early seventies, Williams made a very conscious decision not to undertake extensive tours abroad, and since that time, although he makes annual visits to the U.S., Australia and the Far East, he maintains his base in London, never straying too far away for longer than a couple of weeks at a time. His longest periods "on the road" since then have been his tours with Sky, which even so, never exceeded three weeks. As he puts it, "Why make more money than you need to live if you don't have a life to live at all?" Whilst his fans all over the world would probably like to see more live appearances, one of the benefits of this schedule is that a Williams concert remains a special occasion.

70년대초에 윌리암스는 매우 의식적인 결정을 하게된다.그것은 바로 과도한 해외연주여행을 자제하겠다는것이었다.그결정이후로 비록 매년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동양을 방문하긴했지만 그는 그의 주된거처를 영국에 두었고 한번에 2주이상씩은 돌아다니지 않았다.그 결정이후로 순회공연도중에 가장 오랜기간은 스카이와 함께한 투어였다.하지만 그것 조차도 3주이상을 초과하지는 않았다.전세계에 있는 그의 팬들은 아마도 그를 더 많이 직접보기를원한 반면에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품고있었다.자기생활은 전혀 가지지도 못하면서까지 기본생계에 필요한 돈보다 많은 돈을 더 벌 필요가 있는가?라고 말이다.이런 스케줄의 잇점중 하나는 윌리엄스의 컨서트를 특별한것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점이다.

His commissions for new pieces were not limited to the experimental world frequented by Previn and Gowers; to the relief of his more traditional fans, the mid-seventies also saw new works by Stephen Dodgson, including the Duo Concertante and his Second Concerto, which although classical in structure, remained quite modern in terms of content. Williams' work with Julian Bream also became immortalised in two recordings for RCA, called "Together" and "Together Again" in the UK but inexplicably retitled "Julian and John" for the U.S. market.

그의 새로운 작품에 대한 욕심은 프레빈과 고어스의 실험적인 작품들에 한정되어있지는 않다. 그의 클래식한 팬들의 한숨을 덜수 있도록,70년대중반에 그는 STEPHEN DODGSON에 의한 새로운 작품들을 아울렀다.그 작품들은 클래식한 구조에서 작곡되었지만 다분히 현대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작품이었다.줄리안 브림과 함께한 윌리암스의 RCA에서의 2개의 레코딩 역시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이 두앨범들은 영국에서는 "투게더"와 "투게더 어게인"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되었으나 이해할수없게도 미국에서는 "줄리안"과"존"이라고 재명명되어서 발매되어졌다.

His association with television continued, and he made regular appearances on the UK shows of Val Doonican, Nana Mouskouri and others, gaining more and more fans for the classical guitar. A memorable appearance was on comedian Eric Sykes's sketch show, with the guitarist attempting to play a duet with the comically incompetent Sykes.

그는 TV출연을 계속하였고,나나무스쿠리나 발 두니칸 또는 그밖에 다른사람들의 쇼에 정기적으로 출연하면서 클래식기타아의 팬을 넓혀갔다.아주 잊혀지지 않는 출연은 코메디언 ERIC SYKES의 별난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에 코믹하고 연주능력없는 SYKES와의 듀엣을 시도하는 기타아리스트로 출연했을때였다.

His ever-increasing search for strange combinations of instruments led to regular appearances on the concert stage in the mid-seventies of John Williams and Friends, an ensemble which grew from a core of musicians involved in the Changes and The Height Below records. The inevitable record appeared, and while the ensemble disbanded shortly afterwards, the musicians all having solo careers to maintain, they reformed with a slightly different line-up a decade later for occasional concerts (and another recording).

악기들의 특이한 조합(편성)에 항상 관심을 늘려온 윌리엄스는 급기야는 정규적인 콘서트 스테이지에서 그의 친구들("JOHN WILLIAMS AND FRIENDS"라는 이름으로)과함께 서게된다. 이 팀은 THE CHANGES,THE HEIGHT BELOW 앨범에 참여했던 뮤지션들이 주축이된 앙상블이었다. 필연적으로 레코드가 출시되었고.훗날 이 밴드는 이내 곧 해산된다.솔로로서 활동하던 모든 뮤지션들은 그들의 경력을 유지하기 위해 10년후에는 콘서트나 레코딩에서 때때로 다른 라인업(프로그램)을 재구성하기도했다.

In this busy schedule, Williams also found time to make a recording of all of Bach's work for Solo Lute, which he adapted himself where necessary. This continued his unofficial schedule of alternating new works with other musicians or concertos with solo recordings of the standards from the guitar's repertoire, and adding to them, with the first modern recording of music of Agustin Barrios Mangore rediscovered in the late '60s. Williams' passion for and popularisation of these works earned him the respect of the Paraguayan people, and even that country's Presidential Medal of Honour, which he received at the occasion of concerts there in 1994 to commemorate the 50th anniversary of the composer's death.

이런 바쁜 스케줄에서도 윌리엄스는 필요한 부분은 그 자신이 편곡한, 바흐의 솔로 류트를 위한 모든 작품을 녹음할 시간을 가졌다.그는 비공식적으로 다른 뮤지션들과 새로운 작품을 연주하거나 기타아의 정통적인 레퍼투아를 레코딩하는것을 번갈아가며 했다. 거기에 더해서 1960년대 윌리엄스의 열정으로 현대에 재 발견되어진 아구스틴 피오 바리오스(망고레)의 작품을 첫번째 레코딩 하였고,그는 이 앨범의 대중적인기로 파라과이 국민의 존경을 받게 된다.거기에더해 그는 1994년 파라과이에서 열린 바리오스의 서거50주년을 기념하는 컨서트에서파라과이 대통령이 주는 영예로운 메달을 받았다.

The decade neared its close as it had begun, with a successful solo recording (of the works of Manuel Ponce), a tour with Julian Bream (this time recorded for posterity) and another record with Stanley Myers of "pop" arrangements of Bach and other pieces, Travelling.

마리오 마유엘 퐁세의 작품의 성공적인 레코딩과 줄리안 브림과 함께한 연주여행-이때 후대의작품 들이 녹음되었다,-과 스탠리 마이어스와 함께한, 바흐나 다른 작품의 팝적편곡과함께 10년이 시작했던 것처럼 끝이 다가왔다.(훌쩍 지나갔다)

Despite already being one of the best-known classical musicians in the world, his popularity grew to new heights with the release of Cavatina as a single when it was used as the theme for The Deer Hunter, reaching no.3 in the UK pop charts in the summer of 1979. At the same time, The Shadows released their own version, and for a while the charts saw the strange case of two singles of the same music vying for the top of the hit parade (the Williams version won). The albums on release at the time saw a boost in sales and there was a sudden market for old recordings, and CBS, Decca and Cube Records were happy to oblige with compilations.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클래식 뮤지션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는 날로 높아갔다.그건 바로 영화 디어헌터의 테마로 사용되었던, 카바티나를 싱글로 발표했기 때문이었다.1979년 여름에는 영국 팝 차트에 3위로 올라가기도 했다.동시에 이곡을(카바티나) the shadows가 그들 자신의 버전으로 발매했다.잠시동안 차트에서두개의 같은 음악의 싱글들이 히트 연속의 1위를 다투는 이상한 경우가 발생했다.결국 윌리엄스 버전이 승리했지만 말이다. 그당시에 발매된 앨범들은 판매가 아주 좋았고,거기에 편승해 예전 레코딩까지 찾게되는 갑작스런 현상이 발생했다.CBS DECCA CUBE RECORD사는 컴필레이션(추출음반)을 해야하는수고로움을 마다 하지 않았다.(아주기뻐하면서)

However, in the background, a greater shock was brewing. In April 1979, John Williams got together with four friends to form Sky, a group which was to change the way he and his career would be viewed forever more...

그러나 뒤에서는 대단한 충격적인 사건이 꾸며지고 있었다.1979년에 존윌리엄스가 4명의 친구들과 스카이를 결성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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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lease of Sky's first album in the early summer of 1979 came as something of a shock to the classical world. One of the most respected musicians on the circuit creating a rock band? Amid cries of "traitor", "sell-out" and "fickle", Williams maintained his composure and, with a wry smile, did his best to dispel the fears of his classical fans that his latest project meant the end of his classical career. The five years he was to spend with Sky were to prove probably the busiest of his career, and much to the relief of guitar afficionados, he alternated his work with the band with further classical record releases and concert tours. I'm not dealing with Sky in detail here, as I have set up a separate Sky site.

1979년의 이른 여름에 발매된 스카이의 첫번째 앨범은 클래식계에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롹밴드에서 창작활동을 하는 클래식계통에서 가장 존경받는 뮤지션중 한사람?" .. 반역자,적에게 붙은(SELL OUT),변덕스러운 사람 이라는 외침 가운데서 윌리엄스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평정을 유지하였다.그리고 그는 최근에가진 프로젝트가 클래식쪽의 경력의 마지막이 될것이라는 클래식팬들의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그가 스카이와 보낸 5년은 아마 그의 경력에서 가장 바빴던 날이었을것이다.그리고 그는 기타아 AFFICIONADOS(?아마 팬들)의 안심을 위해 그는 밴드와의 공연과 클래식작품의 레코딩과 콘서트를 병행했다. 나는(이글을 쓴사람) 본사이트에서 스카이 사이트를 따로 만들었기 때문에스카이에 대해 상세히 다루지는 않을것이다.

The attitude of the classical establishment can best be summed up with John Duarte's review of the first album for Gramophone, the definitive guide to classical recordings: ... What does an artist, whose performances of the guitar classics set a standard others strive for, find in music as inconsequential as this? Perhaps the album's achievement of a high position in the LP charts makes the question irrelevant.

클래식계의 태도는그라모폰에서의 첫앨범에 대한 존 두아르트의 논평으로 가장 적절하게 집약 되어질수있겠다.그의 논평은 클래식앨범들의 결정적인 가이드로 통한다. "한 아티스트가-다른사람들은 그걸이루기위해 노력하는, 하지만 윌리엄스는 이미 이룬(클래식기타아에서의 표준)- 이렇게 이치에 맞지않은 음악안에서 무엇을 발견했는가? 아마도 LP차트에서의 높은정도의 성공이 이러한 부적절한 질문을 만든것 같다."

Between his classical concert engagements and duties with Sky that year, he also found time to participate in the enormously successful Secret Policeman's Ball series of charity concerts for the benefit of Amnesty International, masterminded by John Cleese of Monty Python fame. During these concerts, Williams played a duet with probably his most unlikely partner, Pete Townsend of The Who. Two years later, to mark the organisation's 30th Anniversary, he and his fellow members of Sky played a memorable concert in Westminster Abbey, the first and to date only rock concert to take place there.

그해에,클래식한 컨서트 예약과 스카이활동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존 클리스-몬티의 예언자 (비단뱀)라는 명성을 가진-에의해 입안된 내무성(비밀)검찰국의 자선공연의 연회시리즈에 참가했다.이 공연은 국제사면위원회의 기금모금을 위한 것이었다. 그 연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이런한 콘서트동안 그는 가장 어울릴것 같지 않은 파트너, 피트 타운센트와 듀엣을 하게된다..2년후에는 국제사면위원회의 30주년 기념을 축하하기위해, 그와 그의 스카이 친구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연주회 를 갖게된다.이 컨서트는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서의 최초의 롹콘서트로 기록 되었다.

Despite (or perhaps, because of?) his eclectic perfoming schedule, in 1980 he was awarded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by the Queen, one of the highest honours available to non-British citizens (although he's lived most of his life in England, Williams proudly remains an Australian national). For those who don't understand the British system of honours, this does not make him a Lord or a Sir, but he is entitled to call himself John Williams, O.B.E., although he has never used the title and the fact is not mentioned in his short biographies. He's probably slightly embarassed about it...

그의 절충적인 연주스케줄에도 불구하고(아마도,또는 때문에-클래식과팝의 동시연주) 1980년에 그는 영국 여왕에게 영국시민이 아닌사람에게는 가장 높은 영예중의 하나인 대영제국의 계급을 하사받게된다. (비록 그가 대부분의 생활을 영국에서 보냈을지라도 윌리암스는 오스트레일리안으로 남아 있는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영국 작위(계급서열)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말해드리면 존윌리엄스가 받은 영예는 대영제국 제 4급훈작사인것이다.Offic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윌리엄스가 후작(백작,자작,남작)이나 경의 칭호를 받은것은 아니다.윌리엄스는 그 자신을 대영제국 제 4급 훈작사, 존윌리엄스로 부를수있게 된것이었다.하지만 그는 결코이런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또한 그는 그의 짧은 자서전에도 이일에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는 아마도 약간 그것에 대해 약간 쑥쓰러워하는듯(당황스러워하는듯)보인다.

Sky was to be the main focus of Williams' activities for the next five years, and although his classical engagements took a back seat, he maintained a steady output, making new Albeniz and Boccherini recordings, and possibly one of the strangest duets ever, that of guitar and organ with Peter Hurford.

스카이는 다음 5년동안 윌리암스의 활동의 주된 초점이 된다.비록 클래식한 작업은 뒷전이 되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아웃풋(결과물을 산출)을 내고 있었다.그 예로 새로이 알베니즈와 보케리니의 레코딩을 했고,피터 허포드와 함께한 ,여태까지중에 가장 의아한 듀엣중의 하나인, 기타아와 오르간의 작업도했다.

Amazingly, in 1983 he found time away from a busy schedule with Sky's UK, European and Far East tours to re-form John Williams and Friends, Carlos Bonnell's place in the lineup taken by close friend (and London neighbour) Paco Pena and Gerald Garcia, Paco already well-established as a flamenco soloist in his own right, and Garcia's fame beginning to spread. The ensemble toured extensively throughout the UK and Europe over the next three years and released another recording of folk tunes.

놀랍게도 1983년에 그는 영국,유럽,동아시아의 투어등의 스카이의 바쁜스케줄에서 벗어나 존윌리엄스와 친구들을 다시 결성하게된다.라인업(일원)에 있었던 카를로스 보넬리의 자리는 런던에 사는 이웃인 가까운 친구들로 대체되었다.그들은 파코페나와 제랄드 가르시아였다. 파코는 이미 자기의 이름으로 매우 알려져있었고,가르시아의 명성은 널리 퍼지기시작했다. 그 앙상블은 다음 3년동안 영국과 유럽에 걸쳐 투어를 했고,포크뮤직으로서 또하나의 레코딩을 출시하게된다.

At the end of 1983 he decided to leave Sky and returned to his classical roots with a passion, premiering a new work by Patrick Gowers, The Stevie Concerto, based on material written for the film Stevie in 1978, about the English poetess Stevie Smith. The recording of the film's music had been the subject of a short TV documentary, entitled "How to Score... A Movie", which was a fascinating insight not only into the technicalities of adding music to a film's soundtrack, but also into the composition process.

1983년의 끝에 그는 스카이를 떠나기로 결심하고,열정과함께 패트릭고어의 새로운 작품을 초연하면서 클래식의 뿌리로 되돌아오게 된다.그 작품은 THE STEVIE CONCERTO인데, 1978년 영국의 여류시인 스티비 스미스에 관한 영화 "스티브"를 위해 쓰여진, 자료에 근거한 작품이다.이 영화음악의 레코딩 장면은, 영화사운드트랙에 음악을 더하는 기술적인 측면뿐 아니라 작곡과정까지를 매혹적으로 통찰하는 "HOW TO SCORE..A MOVIE"라는 TV 다큐멘터리에서 방영되었다.

In 1984 he was invited to be Artistic Director of the South Bank Summer Music Festival. This annual event had been created in 1968 by Daniel Barenboim, whose idea was to form a programme of events to rival the mighty Proms, with the emphasis on variety and smaller ensembles and soloists, whose talents could not be appreciated in the massive Albert Hall across the Thames.

1984년에 그는 사우스 뱅크 여름 음악 페스티발에 음악감독(지휘자)으로 초대되어졌다.이 연중행사는 다니엘 바렌보임에 의해서 1968년에 만들어진 행사이다.바렌보임은 거대한 프라머네이드 페스티발에 겨루기위해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이 프로그램은 다양성과 작은 앙상블 그리고 템즈강을 가로지르는 대규모의 앨버트홀에서는 감상할수없는 솔로무대를 강조하였다.

The season was a tremendous success, both in artistic and financial terms, Williams making a great many appearances himself, and surrounding himself by friends such as Paco Pena, Cleo Laine, the Medici Quartet, Peter Hurford and others.

그 시즌은 예술적인면에서나 재정적인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윌리엄스도 많은 공연을했고, 파코 페나나 클레오 레인,메디치 쿼텟,페터 허포드,그리고 그밖의 친구들과도 많은 교류를 가졌다.

He returned the following year, and with a many-faceted and extremely versatile programme of events (many of which again featured him) brought the South Bank Centre back to a prominent position in the British arts scene. On a personal note, one of his appearances during the 1985 Festival, an open "educational" session for children, has remained most memorable for me; to demonstrate the guitar's versatility, he made an impromptu rendition of Twinkle, Twinkle, Little Star on various instruments, turning the little ditty into a work of art, the children listening in rapt attention to every note (the only way adults could attend the event was if they accompanied a child under the age of 12; I managed to persuade friends' reluctant 8 year-old daughter to attend with me and I was surprised at the interest she managed to show)

그는 다음해에 돌아왔고,그는 영국 예술 무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SOUTH BANK CENTRE에서 매우 많은 종류의 다양한 이벤트 프로그램-대부분프로그램은 다시 그를 주요한 포인트(주인공으로)삼았다-들을 소화해냈다.한 일반팬의 글에 따르면 "1985년 페스티벌동안에 그가 열었던 공연중의 하나인 아이들을 위한 교육적인 열린 음악회 는 나에겐 가장 기억할만한 순간으로 남아있다.기타아의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즉석에서 "작은별"을 다양한 악기로 즉흥연주했다.그 연주는 작은 소곡을 예술작품으로 바꿔놓은 연주였다. 아이들은 음악한소절한소절을 열중하여 듣고 있었다.(어른들이 그 이벤트에 참석할수있는 유일한 방법은 12살 아래의 아이와 함께 동행하는것이었다.나는 가까스로 친구들의 가기싫어하는 8살난딸을 설득해서 참가했다.그리고 나는 친구의 딸이 보인 흥미에 놀라워했다")

Williams was asked to run the Festival again in 1986, but he declined, taking a stand against the abolishment by Margaret Thatcher's government of the Greater London Council, responsible for the funding of the South Bank Centre. He promised not to appear there again until the Centre's funding could again be assured independence from commercial concerns. His only appearance at the South Bank since that time was in 1991, and extremely reluctantly at that.

윌리엄스는 1986년에 다시 페스티벌을 열도록 요구되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것은 사우스 뱅크 센터의 기금모음을 관할하는 런던시의회에대한 마가렛 대처정부의 폐지에 항의하였기때문이었다.그는 다시 센터기금이 재정적인 문제로부터의 독립성을 보장받을때까지 공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그때이후로 사우스뱅크에 다시 나타난것은 1991년 이었고 이것은 매우 어쩔수없이 나타난것이었다.

In October 1984 he performed the premiere of Takemitsu's concerto for guitar and oboe d'amore Vers l'arc-en-ciel, with Simon Rattle and the City of Birmingham Symphony Orchestra, a work the Japanese composer was commissioned to write for this orchestra, and which Williams later recorded with the London Sinfonietta. He was to return to Birmingham two years later for a live broadcast of the Concierto de Aranjuez with Rattle and the CBSO to mark the Tenth Anniversary of the National Exhibition Centre, a multimmedia extravaganza with flashing lights and lasers, bringing the presentation of classical music world even closer to the world of rock'n'roll. The concert was staged in the NEC's Arena, one of the largest indoor venues in Britain (seating some 17,000) and usually more accustomed to the presentation of rock concerts. Williams was evidently at ease in these surroundings, partially from his experiences with Sky, but the same cannot be said of the audience, most of whom had no idea what to expect...

1984년 10월에 타케미츠의 기타아와 오보에를 위한 협주곡을 사이먼 래틀과 버밍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도시,버밍엄에서 초연했다. 이 작품은 훗날 존 윌리엄스가 런던 신포니에타와 녹음을 한곡이었고,버밍엄 오케스트라를 위해 부탁되어진 곡이기도 했다.

In 1986 he toured Spain with the Academy of St. Martin-in-the-Fields and made a highly successful American tour. He also gave a recital in Paris at the Salle Pleyel and took part in the Classic Aid concert in Geneva, masterminded by Lorin Maazel in aid of the United Nations Fund for Refugees. He was also asked to score a small Australian film called "Emma's War", and the resulting record is one of the few examples of Williams' own compositions.

1986년에 그는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와 함께 투어공연을했다.그리고 매우 성공적인 미국 투어또한 행했다.그는 또한 파리에 있는 the Salle Pleyel에서 공연을 가졌고 로린 마젤에 의해 기획되어진 UN의 피난민을 위한 기금모음의 일환으로 개최되어진 제네바에서 열린 클래식 에이드 컨서트(원조를위한 컨서트)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소규모 오스트레일리아 영화 '엠마의 전쟁'의 스코어를 부탁받게 되고 앨범으로 만들어진 이곡은 ,윌리엄스의 몇곡 안되는 자작품속에 한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작성 '02/02/02 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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