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 명음반, 명연주, 합창교향곡, 푸르트뱅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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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가리키면 저 달을 보아야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 1981년 3월, 성철 스님, 중앙일보에 실린 법문 가운데

1. 손가락으로서의 음악

나는 음악을 들을 때, 두가지 서로 다른 자세를 가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하나는 음악 자체를 듣기 위해 보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연주를 들어 보기 위함이다. 당연히 후자의 경우에는 음악 자체를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가 따라야 한다.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음악이 보여주는, 혹은 암시하거나 예감하는 세계를 이해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좀 더 명확히 해야할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과정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는 음악 한정적인 내용의 이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다(아마도 이 표현은 이강숙 선생님이 사용하신 듯 하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음악의 흐름, 혹은 진행을 이해하는 것, 사용되는 주 선율들과 그 변화를 파악하는 것, 곡의 구조를 파악하는 것, 작곡 기법이나 화성적 진행등을 파악하는 것 등에서부터, 작곡의 동기나 배경 등을 지식으로서 아는 것 등이 이에 포함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최종적인 무엇을 향한 준비, 혹은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한 복잡하고 다양한 장치들을 사용하여 결국 듣는 사람의 마음에 어떤 감동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는가, 이것이 음악뿐 아니라 모든 위대한 예술작품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이다. 위대하고 깊은 감동을 주는 음악들은 인간의 머리가 이해하는 몇마디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정서적 반향을 우리 마음에 불러 일으킨다. 단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음악이 아닌 다른 어떤 예술작품이나 방법으로도 같은 종류의 정서적 반향을 우리 마음에 불러 일으킬 수 없다.

하나의 음악 작품이 우리 마음 속에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감동, 이것을 체험했을 때에야 우리는 그 작품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음악 한정적인 내용이 이해되지 않고서는 얻기 힘든 것이다. 또한 음악한정적인 내용을 이해했다고 해서 저절로 찾아 오는 무엇은 더욱 아니다. 나는 이것을 '교감적 이해'라고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작곡자로 하여금 처음 그 곡을 쓰게끔 만든 저 신성한 영감, 그리하여 그가 심혈을 기울여 곡을 써 나가면서 그 곡을 듣는 사람들이 결국 느끼기를 바랬던 그 무엇을 시공을 뛰어넘어 함께 체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축복된 순간을 통하여 이러한 교감적 이해를 하고 나면, 이는 마치 머리 위에서 비치는 태양처럼 음악 한정적인 내용들에게 다시 그 빛을 비추어 모든 것을 선명하게 하고 제 자리를 잡아준다. 그 전에는 의미가 모호하고 왜 필요했는 지 이해가 잘 안가는 부분들도 하나의 단순하고 선명한 빛에 의해 전체로 통합된다.

어떤 사람이 합창 교향곡을 처음 듣고서도, 즉, 다른 부분들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4악장의 합창 부분에서 가슴 떨리는 감동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두고 감동에는 반드시 음악 한정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인 이해에 따른 부분적인 감동이다. 음악 전체가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완결체로 이해되면서, 각 부분 부분이 가지는 모든 가능성들이 전체의 빛 아래서 동시에 명료하게 체험될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이해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의 음악 작품이란 '교감적 이해'라는 달을 가리키는 하나의 손가락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위대한 작품이란 위대한 달을 가리키는 정확한 손가락이다. 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누구나 볼 수 있듯이, 그렇듯 누구의 가슴 속에나 내재하고 있는, 즉 보편적인 어떤 위대한 정서를 가장 효과적이고 정확하게 불러 일으킬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위대한 예술 작품을 가름하는 시금석이 아닐까.

2. 손가락을 위한 지침 - 음반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는 모르는 곡을 처음 음반을 사서 들을 때 먼저 감동을 받고자 듣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선은 음악 한정적인 내용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 작품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그냥 그 상태로 때로 듣는다. 물론 들을 때면 언제나 어떤 교감의 전류가 내 혈관을 치달릴 순간을 기대한다. 허나 아쉽게도 그런 축복된 순간은 그리 흔치 않은 듯 하다. 어느 날, 어느 한 순간 갑자기 무심코 흘러가던 음악이 한 순간 미묘한 불꽃을 피워 올리고, 그로부터 그 불꽃은 차츰 전 곡으로 번져 나간다.

꽤나 오랫동안 나는 베에토벤의 현악 사중주 12번의 2악장을 "교감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노력해왔다. 후기 사중주들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 곡에는 고뇌와 비탄의 정서가 없다. 15번과 16번을 통해 먼저 이 사중주들과 친해진 내겐 너무 생경한 세계였나보다. 혹은, 내 감성의 가장 뭉툭한 부분과 맞닿은 그런 음악이었나보다. 하여간 처음 듣고 난 뒤로부터 거의 이십년의 세월이 넘어 흐른 최근에야 비로소 그 아늑하고 아득한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으로 그 곡을 들을 때 내 심장의 박동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은 다가 아니다. 주제에 이어지는 변주들이 모두 그처럼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리라. 아니면 좀 더 다른 무언가가 내
삶에서 아직은 빠져 있는 것이리라.

어쨌든, 이처럼 음반을 통하여 손가락을 이해하는 과정들이 이어진다. 이렇게 글을 이어가는 동안 두번째 변주에서도 내 심장의 박동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어느 한 순간 음악이 총체적으로 '교감적 이해'가 되면, 즉,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고 나면, 이제는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빛으로 다시 연주를 보게 된다. 즉, 자신이 이해하는 음악의 빛으로 자신이 듣는 어떤 연주나 음반을 다시금 조명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쯤이면, 부분과 전체가 이미 하나의 빛 아래에서 조명을 받으며, 각 부분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이 부분은 어떤 느낌을 전달해야 하며, 그러기에 어떻게 연주되어야 하는가 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이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해한 것
이 언제나 올바르고 결정적인 것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어떤 경우, 우리는 하나의 음반으로 수십번을 들어도 가슴에 다가오지 않던 곡이 새로운 연주, 즉 새로운 음반을 통해 들었을 경우에는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와 감동의 불길을 지피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대표적인 경우를 꼽으라면, 슈만의 교향곡 4번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외에도 많은 예를 들 수있지만, 이 곡의 경우는 각별하다. 지금은 기억에도 없는 어떤 연주로 들었을 때의 이 곡은 그저 밋밋하고 단순한 느낌 밖에는 별 달리 감동이라 이름할 무언가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어느 책에선가 푸르트뱅글러의 연주를 기념비적인 명연이라고 추천한 것을 보고서 그 음반을 사서 들었을 때, 도도하게 넘실거리는 로맨티시즘의 물결이 주체할 수 없도록 가슴 속으로 짓쳐들었다.

이와는 달리, 이미 이해하고 있던, 혹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 곡에 전혀 새로운 색채를 입혀선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멘델스존의 이탈리아 교향곡이나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같은 경우는 누구나 쉽게 친해지고 이해할 수 있는 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이런 곡들을 들을 때면 언제나 '대충 이러 저러하리라' 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듣는 경우가 거의 전부였고, 그러한 기대는 항상 올바른 것이었다 - 적어도 토스카니니의 연주를 듣기 전까지는. 즉물적이라고들 이야기하는 토스카니니의 가차 없이 냉정하게 치달려가는 연주를 듣고는 그 전까지 이들 곡에 대해 가지고 있던 나의 인상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물론 이들 연주는 - 앞의 푸르트뱅글
러의 예를 포함하여 - 음질에 대한 문제만 빼면 최고의 명연으로 평가받는 연주들이다.

이러한 경험들은 내가 "다른 연주"가 가져다 줄 수 있는 다름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이들 연주는 내가 알고 있던 곡들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며, 이 모습들로부터 이 곡들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능성이 새로운 모습으로 내게 정립되었다. 중요한 문제는, 만일 이들 음반들이 아니었다면, 어떤 실황 연주를 통해서 내가 그 곡들에 대해 그와 같은 기대를 - 그 기대가 설령 아직도 온전치 못하다할지라도 - 가지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하나의 음반은 하나의 작품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상, 하나의 가능성을 구현한다. 하나의 가능성은 궁극적이고 총체적인 완결된 모습의 한 부분이다.(누가 자신의, 혹은 다른 사람의 연주를 극한에 다다른 결정판이라고 단언하겠는가?) 때로는 하나의 모습만을 통하여 전체를 그려낼 수도 있다. 또 다른 경우에는 보다 다양한 모습들이 모여야만 제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수도 있을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모습들을 통하여 우리는 주어진 작품의 총체적이고 완결된 모습에 접근해 나가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총체적이고 완결된 연주란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의 마음 속에 언제나 동경과 그리움의 이상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는 어느 음반의 상이 아니요, 오로지 음반(혹은 실연)을 '통해' 이해된 곡의 진정한 "가능성"이라는 빛으로 조명을 받은 우리 자신의 음악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듣는 연주들을 통해 한 편으로는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가 이해하는 음악을 완성해 나간다.

3. 기대의 결정으로서의 실황 음악

12월 13일,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이맘때가 아니면 듣기 힘든 음악, 합창 교향곡이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7번과 함께 연주된다기에, 며칠 전 모임에 빠져야만 했던 아쉬움도 달랠 겸 혼자 예당으로 걸음하였다.

돌이켜보면, 합창 교향곡의 각 악장들은 각기 한 번 혹은 몇 번씩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곡으로 꼽혔던 듯 하다. 한 때는, 격정과 투쟁을 넘어, 다만 우뚝 솟아 포효하는 저 활화산같은 1악장, 마치 거인이 지축을 울리며 발걸음을 옮기듯 의연하고 장엄한 곡이 언제나 가슴 속에서 울리고 있었는가 하면, 원시적이라고해도 좋을 정도로 약동하는 생명으로 백열하는 2악장을 길을 걸어 가면서도 흥얼거린 적도 있었다. 그리고 3악장. 격정과 고뇌 조차 뛰어 넘은 저 위대한 거인이 그토록 열광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뜨겁게 연소할 때에도 저 심연에서는 억제할 수 없도록 넘실거린 동경과 비원의 노래, 이 애절하고 뜨거운 염원이 지상 최고의 음악인 양 생각된 적도 있었다. 그가 무엇을 그토록 갈구했는 지를 기악과 성악이 한 데 어우러져 그려 내는 마지막 악장이야 하물며 말할 필요가 있으랴.

베에토벤의 후기 작품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이 위대한 작품 또한 그 모든 가능성들을 제대로 그려 낸다는 것이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하물며, 이 대곡을 이루는 저 다양한 요소들을 모두 한 데 묶어 제 모습을 만들어 내는 일임에야. 작게는 하나의 악장에서 선율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각 악장간의 균형을 잡는 일이 그렇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길이의 곡을 시종 일관 긴장감을 유지하는 또한 그러하다. 하긴 이러한 점들은 모든 연주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특히나 4악장에서 클라이맥스를 향해 쌓아 올려가는 과정, 그리고 박자, 템포, 조성 등 모든 것이 수시로 변하며 변주를 이어 나갈 때의 균형감과 긴장의 유지는 단순히 충실함이나 연습만 가지고 해결하기엔 벅찬 그 무엇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악장들은 만만한 작업이라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열 아홉마디에 이르는 길이의 주제가 어울리는 1악장이 그려 내는 거대한 모습은 그 하나만으로도 하나의 연주를 평가하는 시금석이 되고 남는다.

당연히 이러한 기대를 모두 만족시키는 연주를 실황으로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제 아무리 좋은 연주라도 몇 몇 부분은 마음에 안드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연주에 대한 평가는 기대에 따르기 마련이다. 기대가 큰 사람에게는 웬만한 연주라도 만족스럽기가 어렵기 마련이다.

이 날의 연주 또한 내 기대의 기준으로서는 만족스럽지 못한 정도가 아니었다. 만족스럽게 연주하기가 그리 만만한 곡은 더욱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 날 연주회에서 한숨만 푹푹 쉬다가 허탈한 마음으로 연주회장을 떠나왔을까? 아니다, 오히려 그 정 반대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연주의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그러한 것은 아닐 지라도, 온 몸을 관통하는 전율이 내 몸을 훑고 지나간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내가 들어왔던 어떤 음반을 통해서도 나는 이러한 감동을 체험한 적이 없다. 감동적이긴 하였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렇게 강도 높게 나를 흥분시킨 적은 단연코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비단 이 작품에 한정되어서만 나타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작품이던지 음반을 통한 음악이 실황 연주보다 더 감동적으로 다가온 일은 전혀 없었다.

왜 이러한 일이 가능할까? 어떻게 불완전한 실황 연주가 완벽하게 '만들어지기까지 한' 음반의 연주보다도 더욱 크고 강한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우선은 연주의 현장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눈 앞에서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연주는 보다 직접적으로 가슴에 다가온다. 머리보다는 먼저 가슴이 열린다. 바로 '그 자리, 그 시간'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황 연주는 일회적이다. 시간과 함께 음악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음반처럼 언제고 다시 꺼내 들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게다가 연주가 진행될 때의 연주회장은 음악 감상 이외의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함께 하는 이들은 대부분 음악을 듣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그 자리를 찾는다. 언제고 거실에 앉아서 편안하게 다른 일도 해 가면서 듣는 음반에 비할 수 없는 집중력이 함께 한다.

무엇보다도, 공연장의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온 마음을 열어 두고 감동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이 들었던 어떤 연주의 프레이징이나 강약, 혹은 템포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몸을 관통한 저 느낌, 어느 순간 해연히 가슴 속으로 전해진 저 영원과 절대와의 내밀한 교감을 기다린다. 연주가 조금은 부족해도 좋다. 손가락이 크게 방향만 벗어나지 않으면, 그 손가락을 따라서 달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다. 혹은 감추어진 희미한 별이라 하더라도. 그네들은 이전부터 알아 왔고, 예감하고 기대한 무엇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제까지 쌓아 온 음악적 경험의 총화로써, 자신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기대를 한 데 모아 한 음 한 음을 따라간다.

인간이 완벽할 수 없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음반에서 들리는 연주의 만들어진 완벽함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명곡이란 연주에 관계 없이 감동을 주는 것이다. 우리 귀에 들려오는 완벽하지 못한 연주에 우리가 이해하는 음악, 우리가 가진 저 완전함에 대한 기대를 덧씌워 듣기에, 귀로 들려온 음악이 가슴에 닿을 때엔 어느 샌가 우리가 음반을 통해 들었던 그 음악을 닮아 있게 된다. 아니, 음반을 들으며 우리 마음속에 그려 넣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음악을 닮아 있게 된다. 그러기에 베에토벤의 현악 사중주13번을 연주하는 음악회를 찾은 어떤 분은 이러저러한 여러가지 점이 불만족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리라.

그러므로, 이 때 우리는, 비록 음악은 귀를 통해서 들려오지만, 가슴 속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듣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기대요, 소망이고 또한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울려 오는 생명의 고동이다. 우리가 그 때까지 다듬고 추스려왔던 우리자신의 음악이다.

4. 명반

어느 나라에서 생긴 것인 지는 잘 모르겠으나, 연말이 되면 각 교향악단들이 합창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이 관습이 되어 버린 듯 하다. 곡의 성격으로 볼 때, 충분히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또 연말이 아니면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약간은 서운한 생각도 들게 한다.

연말이라 이런 저런 일이 많아서 연주회장을 직접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혹은 평소에 합창 교향곡을 듣고싶은 사람들은 할 수 없이 음반에 의지하지 않을수 없다. 옛날에는 이 곡을 한 번 들으려면 엘피 두 장을 뒤집어야 했다. 물론 앙세르메가 연주한 음반처럼, 삼악장 중간을 잘라서 한 장에 다 때려 넣은 음반도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 것을 요즘은 시디 한 장으로 깨끗이 해결하니, 세상이 참 좋아지긴 한 모양이다.

게다가 이젠 DVD라는 것까지 나와 음악과 영상을 동시에 볼 수 있으니 종래에는 아마도 3D 홀로 그래픽 같은 것을 통해 마치 안방에서도 연주회장에 직접 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 주는 기술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줄 날도 멀지 않은 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음반에 담긴 내용들은 그다지 발전을 하지 않으니 약간은 의아심이 들기도 한다. 녹음 기술이 그대로라거나 혹은 새로운 음반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벌써 반 세기가 훌쩍 지나가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빌헬름 푸르트뱅글러가 1951년에 바이로이트 축제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지휘한 음반을 최고로 꼽는다. 머 가디너나 에르베헤같은 지휘자들이 새로운 음반을 내 놓기도 했고, 또 지금도 어디선가 새로운 음반이 만들어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으나,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음질을 가지고서도 아직 여전히 반세기의 벽을 뛰어넘는 연주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듯 하다.

나의 경우, 살아 온 햇수만큼이나 많은 종류의 합창 교향곡 음반들을 들어 보았지만, 가지고 있는 음반은 단 한가지 밖에 없다. 다른 것들은 모두 다 주어 버렸다. 없어도 하등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음질의 열악함, 잡음, 실연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삑사리, 이런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오직 그 연주만을 고집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다 보면 곡을 이해하게 된다. 이해라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대라는 말과 통한다. 곡이 가지고 있는 세계,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있고, 그것은 언제나 가능성으로 존재한다. 그 가능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곧 음악을 이해하는 것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 가능성은 연주를 통해 현시된다. 음악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록, 그 연주에 대한 기대들이 하나씩 모습을 갖추어 나간다.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키느냐, 그리고 얼마나 충족시키느냐 하는 것이 실연과 음반을 막론하고 어떤 연주를 명연주다, 그렇지 못하다고 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듯 하다.

합창 교향곡 - 장장 70분이나 되는 길이의 음악, 게다가 각 악장들이 담고 있는 내용은 얼마나 심원한가. 베에토벤의 오케스트레이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지만, 달리 비할 데 없는 그 뛰어난 능력조차 제대로 감당하기에 벅찬 내용을 음악이 요구한다.

이러한 것들은 음질이나 오케스트라의 규모 따위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단지 소리가 크게 들리고 선명하게 들린다고 해결될 문제같았으면 벌써 해 넘어간 일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음악을 들을 때, 분명 악기 소리가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음의 상태보다 더욱 더 고요한 정적의 상태를 느낄 때가 있다. 이는 단지 소리를 작게 하는 것이 피아니시모가 아니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음향을 크게 한다고 포르티시모가 저절로 되지는 않는다. 큰 소리를 진정 큰 소리로 만드는 것은 그 큰 소리가 있기 까지의 과정이지 소리 자체의 물리적 크기가 아니다.

푸르트뱅글러가 연주한 합창 교향곡의 1악장은 19분이 넘게 걸린다. 16분 남짓하게 연주를 하는 지휘자가 하고 많음을 감안하면 그가 템포를 얼마나 느리게 잡았는 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알 수 없다. 단 한 순간도 마음 편하게 들을 수 없는 그 긴박감은 마지막 음이 울릴 때에야 비로소 거대한 한 악장이 지났음을 알게 한다. 게다가 손에 닿으면 살갖이 탈 것만 같은 그 집중이라니. 전곡을 통해,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그리고 솔로들이 모두가 지휘자와 말 그대로 혼연 일체가 되지 않으면 결코 가능하지 않을 그 집중과 긴장감은 다른 연주를 들을 때 좀 과장해서 표현하면 마치 단추를 풀어 놓고 연주하는 듯한 생각마저 들게 한다.

1악장의 서주에서부터 제1주제가 나타나는 부분은 아마도 연주의 차이를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부분일 것이다. 고도의 녹음 기술로 선명하게 녹음한 요즘의 음반을 좋은 오디오를 사용하여 충분히 큰 음량으로 들으면 분명 소리는 푸르트뱅글러의 음반이 부끄럽도록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열악한 음질의 음반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주제의 웅대함이 그보다 더욱 거대하게 나타남은 소위 지휘자의 역량이라는 것을 새삼 되돌아보게끔 해 준다.

그러나, 음반에 담긴 명연은 차가운 명연이다. 가슴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는 감동은 대개는 실연의 몫이다. 평가와 감상은 다른 것이다. 음반은 감상을 위해서 들을 수도 있고, 평가를 위해서 들을 수도 있지만, 우리네 평범한 애호가들은 비평하기 위해 음악회를 찾지 않는다(사실은.. 그러기를 바란다). 우리가 음악회에서 원하는 것은 차가운 활자로 얼마든지 대할 수 있는 비평이 아니라, 가슴 떨리는 감동의 순간이다. 감동은 완벽으로부터 오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하고 메마른 세상이 될 것인가.

다만, 소위 명연이라고 하는 내용이 담긴 음반들은 우리가 대하는 음악 작품에 대한 올바른 지평을 열어 준다. 그 온전한 현시를 예감케 한다. 그래서 우리는 '푸르트뱅글러가 이렇게 템포를 변화시켰는데 이 연주는 그렇지 못하므로 이 연주는 잘 못 되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도 안된다. 하지만, '푸르트뱅글러의 연주에서는 1악장의 주제가 그렇게 거대하고 뜨겁게 느껴졌는데, 이 연주에서는는 다소 빈약하고 맥빠지게 들린다'라는 말은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음반에 대해서나 실연에 대해서나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처음 시작은 음반으로부터 나왔으되, 그 손가락을 따라 음악 자체에 다다라서는, 다시 음악의 자리에서 되돌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소위 명반으로 평가받는 연주들은 존중을 받아야 할 충분한 이유와 가치가 있다. 더군다나 수십년이란 세월을 이겨낸 음반들의 경우에는 말할 나위가 없다. 링컨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일부의 사람들을 영원히 속일 수는 있다. 모든 사람들을 한 동안 속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터넷과 시디가 일상화된 오늘날의 세상에서, 하나의 음반에게 수십년이란 세월은 영원과도 같은 것이다. 위장이나 기만 따위로 허명을 유지할 수 있는 호락호락한 세상도, 세월도 아니다.

이러한 음반들에 대해서 말할 때, 혹은 음악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좀 더 겸허해야 하고, 좀 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 음악을 정말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온전한 이해로부터 나온 평가인지를 돌아 보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음반 가이드나 리뷰들을 맹신해야 한다거나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더욱 냉정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야 한다. 그러나, 음악작품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섣부른 평가, 단순한 개인적 취향의 보편화는 아무리 경계해도 지나치다고 말할 수 없다.

별 가치 없는 것을 과대포장하는 일이나, 가치로운 것을 함부로 폄하하는 일 어느 쪽도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사람들이 좀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즉 전문가들이나 혹은 어떤 모임 같은 데서 목소리 깨나 내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렇다. 아직 자신의 기준이 제대로 서지 못했거나 혹은 막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작게는 믿고 구입한 음반에 대해 회의하거나 상심하게 할 수 있으며, 크게는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합창 교향곡은 모두 같은 곡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합창 교향곡은 모두가 다른 곡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진 합창 교향곡을 온전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로부터 온전한 기대가 나오고, 온전한 감동이 나온다. 좋은 음반이란, 좋은 사진과도 같은 것이다. 같은 장면도 뛰어난 사진 작가가 찍으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나타난다. 어떤 음악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예감케 해 줄 수 있는 연주, 그러한 연주를 담은 음반 -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가진 음악을 제대로 만들어 주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음악이 제대로 만들어지면 이제 음반으로부터도 음악이 해방된다. 제대로 된 음악을 우리 가슴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2001년 12월 18일,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합창교향곡 연주회를 다녀와서

P.S. 예전에 썼던 글을 올립니다.
작성 '05/01/29 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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