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동화, 『아라비안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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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영원한 동화가 있다. 나에게는 『아라비안나이트』가 그것의 하나인데, 내가 그것을 처음 만난 것은 일곱 살 무렵 글을 깨친 바로 직후였다. 나는 친척 집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책이 가득한 방에 들어서게 되고, 거기에서 동화책 몇 권을 빌리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어린이를 위한 『아라비안나이트』이었다. 표지에 그려진 이국적인 풍경과 인물들이 그려져 있던 것이 기억나는데, 그 안에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와 「신드바드와 도적」,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하늘을 나는 양탄자」 등이 수록되어있었다. 하도 신기해서 나는 그것들을 두 눈을 비벼가며, 더듬거리면서, 밤이 늦도록 읽었다.

 
그 후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나는 『아라비안나이트』를 다시 만났다. 그것은 소설의 전형으로 다가왔는데 첫째, 술탄에게 죽지 않기 위하여 이야기를 계속해야만 하는 셰에라자드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야만 하는 글쟁이의 숙명을 암시하는 것이었고, 둘째, 이것은 마술적 사실주의의 효시였는데, 쟁반 위에서 잘린 채 말하는 머리, 열면 낯선 공간으로 통하는 비밀의 문, 한쪽 눈에 바르면 세상의 온갖 보물이 훤히 다 보이지만 두 눈에 바르면 눈을 멀게 하는 신기한 안약, 한 모금만 마셔도 남자가 여자로 바뀌는 마법의 샘 등이 그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격자 소설의 모범이었다. 왜냐하면, 이 속에서 셰에라자드가 술탄에게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또 이야기를 시작하는 , 소설 속의 소설 구조로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또 아라비안나이트를 만난 것은 결혼한 뒤였다. 아내가 어린 아들을 위해 사다 놓은 동화전집 속에서였는데, 그것을 펼쳐보다가 매혹되어 다시 또 읽었다. 그리고 그것을 읽으면서, 요술램프를 문지르면 마신이 나타나고, 양탄자가 하늘을 날고, 안약을 바르면 장님이 눈을 뜨고, 옹달샘을 마시면 다시 젊어지고, 원숭이가 말을 한다는 것을 아직도 내가 믿고 있음을 알고 놀랐다. 그리고 때마침 국내 한 출판사에서 아라비안나이트 열 권짜리 전집이 발간된 것을 알고 그것을 즉시 사서 두 주에 걸쳐 가슴 두근거리며 읽었다.
 
그 뒤 나는 또 『아라비안나이트』를 만났다. 그것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교향시 『셰에라자드』라는 교향시의 형태이었는데, 그것은 아라비아의 세계를 화려하고 관능적으로 그려낸, 마술과 같은 묘사력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의 내용은 하룻밤 동침한 뒤에 아침에 여자를 죽이는 잔인한 술탄에게 셰에라자드가 죽지 않기 위해 꾸며내는 이야기 중에서 네 가지 에피소드를 묘사한 것으로 「바다와 신드바드의 배」, 「칼렌다르 왕자 이야기」, 「젊은 왕자와 공주」, 「바그다드의 축제」였는데, 그것을 듣는 동안 터번을 두르고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육중한 체격의 술탄과 아름답고 관능적인 셰에라자드의 자태, 화려하기 짝이 없는 궁전의 장식들, 그리고 하렘의 궁녀들과 노예들, 광대들, 신드바드의 뱃전에 부딪히는 거친 푸른 물결, 여기저기 모스크가 솟아있는 신비의 도시 바그다드의 시가지가 내 눈에 펼쳐지는 듯하였다.
 
그리고 나는 최근에 다시 또 『아라비안나이트』를 만났는데 그것은 발레의 형태였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교향시 『셰에라자드』의 음악에 알렉산드르 브누아가 대본을 쓰고, 미하일 포킨이 안무를 맡은 작품이었다. 하지만 발레의 내용은 교향시의 작품 내용과는 달랐다. 페르시아의 왕 샤리아르가 사냥을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왕비가 흑인 요리사와 놀아난다. 평소 아내를 의심하던 그는 사냥하러 가는 척하다가 돌아와 불륜의 장면을 목격하고, 격분하여 흑인 요리사와 광대 궁녀들을 죽이고, 왕비는 칼로 자결한다는 내용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터번을 두르고 날카로운 콧수염을 길렀으며 시퍼렇고 긴 반월도를 찬 술탄, 온갖 금은보화를 몸에 두르고 비단 의상으로 육감적인 몸을 가린 왕비, 그리고 그 속에서의 현란한 관능적인 춤, 반월도에 쓰러지는 궁녀들과 시종들, 광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궁금해진다. 언제 다시 또 내가 『아라비안나이트』를 만나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때 그것은 어떤 형태로 나에게 다가올 것인가.
 
작성 '20/05/04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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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

한국에 먼저 들어온 것은 아동용 번안이었을테고, 완역본으로 최초로 정식 출간된 것은 리처트 버튼의 영어번역입니다. 이후에 열린책들에서 6권으로 나온 앙투안 갈랑의 프랑스번역이 있죠.

리차트 버튼판은 흐름이 뚝뚝 끊기는 과잉의 에로티시즘 때문에 그리 손이 가지 않았는데 갈랑판을 보며 비로소 완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가 그러하듯, 로컬문학이 유럽판으로 번역 (번안)되는 과정에서 깔끔하게 정리되어 세계보편적인 문학의 위상을 얻기도 하거든요. 갈랑판은 복잡한 판본을 말끔하게 정리한 것 같습니다. 물론 뒤로 갈 수록 귀찮아져서 세헤라자드가 날이 밝으면 이야기를 멈추고 밤이 되어 이어나가는 형식을 생략하곤 합니다만, 가장 큰 특징은 액자식 구성의 참맛을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천일야화 읽으면서 가장 쾌감을 느끼는 부분은 이야기 자체보다는 구성입니다. 세헤라자드의 이야기가 이어지다 그 이야기 속의 인물이 또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심한 경우 꿈 속의 꿈 속의 꿈 속으로 들어가는 인셉션같은 복잡한 구성이 되는데도 세헤라자드는 날 밝으면 그냥 잘라버리고 밤되면 혼란없이 이어나가니.
버튼은 갈랑판을 읽고 거기서 삭제된 에로티시즘을 끼워넣은 도작쯤으로 보이구요.

20/05/05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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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

지니님께서 제대로 다 읽으셨네요. 시작부터 낯 뜨거운 부분이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다 읽고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겼답니다.^^

액자식 구성은 신기하죠. 상자 속에 상자가 있고 그 속에 또 상자가 있고 또 그 상자 속에 상자가 들어있는 중국의 요술 상자처럼 말이죠. 단편적인 것들을 가지고 긴 서술을 만들어내는 아주 독창적인 수법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신기합니다.^^

20/05/0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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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

아라비안 나이트는 어릴 때에 번안된 동화로 읽어 본 기억이 납니다.
그 긴 천일야화 중에서 몇 가지 이야기를 추려낸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셰헤라자드는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처럼 실감나는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몽환적인 음악이죠.
이 명곡은 키릴 콘드라신도 좋고 정명훈도 좋습니다. 그리고 프리츠 라이너와 앙세르메도 좋더군요.
부정한 왕비에의 분노 때문에 다시 맞아들인 왕비를 첫날밤에 죽이는 광폭한 행위를 반복하는 왕을 달래고 새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매일밤부터 새벽까지 읊어주는 영리하고 아름다운 왕비, 셰헤라자드의 식견과 지혜, 정성에 감복하여 그 의도대로 새사람이 되는 왕의 이야기죠.

20/05/05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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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

어린이날 기념(?)으로 모든 이들의 영원한 동화를 주제로 글을 올려봤습니다.

아라비아 출신이 아닌 러시아 작곡가가 아라비아의 풍경을 실감나게 그려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국적이고 매혹적인 선율은 발레 속의 페르시아 궁전의 화려함, 왕비의 관능미, 반월도를 휘두르는 왕의 잔혹함 등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kp6531님께서 말씀하신 이 작품의 음반들을 시간내어 차분하게 들어봐야겠네요. 소중한 휴일, 틈내어 변변찮은 글에 댓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20/05/05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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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

음악 감상문을 이렇게 재미있게 쓰시다니...^^ 잘읽었습니다.

20/05/06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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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도 읊지요. songjh03님, 보잘 것 없는 글을 칭찬해셔서 고맙습니다.^^

20/05/06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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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

와. 재밌게 읽었습니다.

20/05/22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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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e***:

용전님, 칭찬해 주시니 힘이 납니다. 아라비안 나이트가 없는 어린시절은 생각할 수 도 없지요.^^

20/05/2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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