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장의 LP]게반트하우스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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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유서 깊은 도시 라이프치히(Leipzig) - 작센(삭소니) 주의 주요 도시이며 독일의 10대 도시에도 들어가는 이곳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교통의 요지이자 농업과 다른 상공업의 거점도시였기 때문에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도시였다. 이러한 부를 바탕으로 1710년에는 자치권을 얻어내었고, 학문과 예술 등의 문화적인 발달도 상대적으로 다른 곳보다 빨리 이루어졌는데, 하이델베르크 대학 다음으로 가장 오랜 대학이 설립되어 18세기에는 ‘작은 파리(Paris)’라 불리우며 중부 유럽의 학술과 문예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라이프니츠, 괴테. 니체 등을 배출하여왔으며, 바하와 텔레만이 활동을 하였던 라이프치히 - 바로 그 무렵인 1743년 3월 11일, 16명의 상인들이 모여 친목과 음악적 여흥을 주기 위하여 악기를 들고 “세 마리의 백조(Zu den drey Schwane)” 여관 겸 선술집에 모여 연습과 연주를 시작하면서 “Das grosse Konzert” 를 창단하게 되었다.
 

 

조금 더 상세히 알아보자면, 다른 도시들은 궁정음악으로부터 출발을 했기 때문에 궁정의 여흥과 특히 오페라 공연이 우선적이었다. 그래서 무대연주는 극히 제한된 횟수밖에 열리지 못했다. 하지만 라이프치히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축적된 부와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한 중산층이 발달하여 애초부터 전문 음악인들은 무대연주 자체가 쉽게 허용되어 있었다.
 

 

라이프치히 출신의 작곡가 요한 쿠나우(Johann Kuhnau)가 이끄는 콜레기움 무지쿰(Collegium musicum)이란 음악단체는 1688년부터 커피하우스에서 정기적으로 연주를 가지고 있었다. 이 악단은 대학생들과 마을의 야경꾼 혹은 시민경찰대의 악대인 슈타트파이퍼(Stadtpfeifer) - 지금도 게반트하우스 곁 식당의 이름으로 남아있다 - 단원으로 이루어진 연합악단이었는데, 슈타트파이퍼는 본업무 외에 틈틈이 연주로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1704년 텔레만이 이어받은 다음 1729년에는 J. S. 바하가 물려받았으며, ‘Das grosse Konzert’ 단원들도 이 콜레기움 무지쿰 출신이었다.



[[ 슈타트파이퍼의 모습 : 판화 ]]


약 30여년을 이렇게 연주하던 악단은 마침내 1781년 11월 25일 연주홀에서 20여명의 숫자로 연주회를 가지면서 “Das grosses Konzert”란 명칭으로 데뷔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Gewandhausorchester, Leipzig)의 탄생이다.
 

 

그들이 처음 연주했던 곳이 바로 ‘의상관(衣裳館, 衣服館:Gewandhaus)’ - 이 건물은 1498년에 지어진 무기창고(Arsenal)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요한 칼 프리드리히 다우테(Johann Karl Friedrich Dauthe)가 1781년에 1층을 의상전시관으로, 2층을 연주회장으로 개조하여 처음으로 연주회를 가진 것이 바로 이 관현악단과 연주회장의 역사의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 초기 게반트하우스 ]]

1823년과 1831년, 그리고 1842년에 걸쳐 개보수와 확치장공사를 한 결과 500여석이던 좌석이 1,000석이 되었으며, 벽화와 샹들리에 등으로 꾸며진 공간에는 1층의 무대 아래 중앙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는 모습의 좌석배치를 두었으며, 테라스층은 걸어서 빙빙 돌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 1845년의 게반트하우스 공연장 전경 ]]


하지만 1850년부터 인구가 급속하게 늘기 시작하여 1900년대가 되기도 전에 4배의 인구로 팽창하자 새로운 공연장이 필요하게 되었고, 1884년에 새로운 공연장인 ‘Neues Gewandhaus’가 문을 열었다. 총 1,700여석으로 늘어난 새 공연장은 2차 세계대전때까지 유럽 전체를 통틀어 음향이 가장 뛰어난 홀 가운데 하나이면서 연주홀과 관현악단의 수준 양쪽 다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반면, 옛 공연장인 ‘Alte Gewandhaus’는 빈 건물로 존재하다가 1901년 이 자리에 백화점이 생기면서 헐려졌다고 한다.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을 제대로 된 악단으로 정비하고 실력을 올리게 된 것은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의 힘이 컸다. 종신 지휘자로 있으면서 당시 명 바이얼리니스트였던 페르디난트 다비트(Ferdinand David)를 악장으로 초빙하였고, 바하 음악의 부활과 슈베르트 교향곡 9번의 초연 등 악단의 실력을 끌어올리면서 많은 음악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1895년 대 지휘자 아르투르 니키슈(Artur Nikisch)는 이 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어 근대적인 지휘법으로 악단의 황금기를 이루게 하였으며, 1922년 니키슈의 사망 이후에는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등이 차례로 상임 지휘자직을 맡아 그 명성을 유지해왔다.
 

 

1차 대전 이후 나치의 그림자는 곧 라이프치히를 덮쳤으며, 1937년 마지막 반나치 성향의 시장이었던 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Carl Friedrich Gördeler)가 사임하자 시의 상징인물이었던 멘델스존의 동상이 파괴되고 이어서 1855년에 세워져 건축학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뛰어남을 자랑하던 시의 유대인 공회당(시나고그) 마저 파괴되었다.

 


2차대전이 일어나자 1943년과 이듬해 2월의 연합군 폭격에서 게반트하우스는 살아남지 못했다. 아니, 가까스로 살아남긴 했으나 연주회장 기능을 할만큼 온전하게 남아있지를 못하였다. 결국 연주회장은 시 동물원에 임시로 만들어진 연주회장 - 이 건물 역시 폭격을 받긴 하였으나 1,800여석의 공연장 기능은 살아있었다 - 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게반트하우스는 1964년에 완전히 헐려벌렸다.




[[ 연합군 폭격으로 파괴되어버린 노이에스 게반트하우스 ]]


게반트하우스 악단도 전후 조직이 많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소련군의 진주로 인하여 라이프치히는 점차 사회주의의 지도를 받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전후 1949년에 상임 지휘자로 부임한 프란츠 콘비츠니(Franz Konwitschny)는 이 악단의 깨어진 명성을 잘 이어붙여나갔다. 즉, 작곡자의 원보에 충실하고 또한 연주전통에 충실함으로써 맥이 끊어질 것만 같았던 역사와 전통을 살려나갔던 것이다.




[[ 프란츠 콘비츠니 ]]


1962년 사망한 콘비츠니 대신 빈 아카데미 교수이자 체코의 최고 지휘자였던 바츨라프 노이만(Vaclav Neuman)이 1969년까지 악단의 전통을 그대로 살려나갔으며, 마침내 1970년에는 이 악단과 뗄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의 지휘자 쿠르트 마주르(Kurt Masur)가 상임 지휘자로 부임하였다. 라이프치히 음악원 출신인 그는 게반트하우스와 호흡하였고, 게반트하우스 역시 그와 고락을 함께 하며 26년의 세월동안 안정되고 그러면서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동독 문화 코드의 하나로 더욱더 성장해왔다. 그와 이 악단은 한 몸이 되어 모차르트, 베토벤으로부터 슈베르트, 슈만, 멘델스존, 브람스, 리스트, R. 슈트라우스와 더 현대물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녹음을 내놓았으며, 어느 것 하나도 태작이 없을 정도의 것들이었다.





쿠르트 마주르는 1989년 라이프치히 거리의 음악사들을 체포하던 때부터 체제에 반기를 들었으며, 동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졌을 때 자유동독을 대표하는 지식인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독일 영예 철십자훈장을 받았으며, 그가 동독시절 미국에 데뷔하여 큰 환호를 안겨다주었던 뉴욕 필하모니를 지휘하게 되었고 통독이 이루어진 직후인 1998년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Herbert Blomstedt)가 라이프치히를 맡았다가 2005년부터는 리카르도 샤이(Riccardo Chailly)가 동 악단을 이끌고 있다.
 

 

한편, 옛 라이프치히 중산층과 상공인들의 문화적 핵심의 하나이면서 또한 시민 전체의 자존심이었던 게반트하우스 공연장은 1964년에 완전히 헐려버렸다. 하지만 강렬한 전통은 결코 죽지않는 법 - 라이프치히 시민들의 염원과 기대 속에 1977년부터 시내 중심가인 아우구스투스 광장(Augustusplatz:동독시절의 Karl Marx-Platz)에 건립되기 시작하더니 11층의 문화센터와 더불어 오페라 하우스를 마주보고 세 번째의 'Neues Gewandhaus'가 새롭게 문을 열었다. 그때가 1981년 10월 8일...마침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200주년 생일의 해이기도 하였다.





1,800석의 대강당에는 널찍한 무대와 객석 상단 중앙에 큰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하나의 문구가 새겨져있다. ‘RES SEVERA VERUM GAUDIUM(진정한 즐거움은 매우 중대한 일이다)’ - AD 4세기 루시우스 아나엔스 세네카가 남긴 유명한 글이다. 이 글은 곧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설립취지와 일맥상통하는 문구인 것이다. 그리고 로비의 천정 벽화는 무려 712평방m에 그려진 4폭의 그림들 -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어둠의 힘’ ‘도시의 노래’ 와 ‘행복의 노래’ - 로 이루어져 있는데, 야간에 로비의 불빛을 받아 밖으로 비추이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 아닐 수 없을 듯하다.
 

 

498석의 멘델스존 홀은 소강당 겸 컨벤션 홀로서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원들의 소규모 실내악이 여기서 연주되며, 곳곳에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유디 메뉴인은 이곳을 ‘음악의 전당’이라고 하였고, 바츨라프 노이만은 ‘모자를 쓴 집’이라 하였으며, 별명으로는 ‘마주르 음악당(Auditorium Masurum)’이라고도 불리웠다.










개관식이 열린 1981년 10월 8일, 동시에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200주년 기념 연주회가 있었다. 이날의 프로그램은 동독의 작곡가 지그프리트 틸레(Siegfried Thiele)의 “태양을 위한 노래(Gesänge an die Sohne)”와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9번 D 장조 작품 125 “합창(Choral)”이 연주되었다.
 

 

쿠르트 마주르는 이미 1973년에 게반트하우스 악단과 함께 베토벤의 교향곡 9번 녹음을 하였었다. 당시 진용은 다음과 같다.




[[ ETERNA LP : 8 26 421-422 1975ⓟ ]]

- 안나 토모와-신토우(Anna Tomowa-Sintow) 소프라노

- 안넬리스 버마이스터(Annelies Burmeister) 알토

- 페터 슈라이어(Peter Schreier) 테너

- 테오 아담(Theo Adam) 베이스

- 라이프치히 방송 합창단

- 베를린 방송 합창단

- 드레스덴 필하모니 합창단 어린이 파트

- 쿠르트 마주르 /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이 개관식의 기념적인 연주에서는 독창의 여성 파트와 일부 합창단이 바뀌거나 더해졌으며, 혼 주자가 무려 13명이나 연주하고 200명의 단원이 우렁찬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그것도 모두 라이프치히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로...



[[ ETERNA LP : 8 27 439-440 1981ⓟ ]] 


- 에다 모저(Edda Moser) 소프라노

- 로즈마리 랑(Rosemarie Lang) 알토

- 페터 슈라이어(Peter Scheier) 테너

- 테오 아담(Theo Adam) 베이스

-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어린이 합창단

-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합창단

-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합창단

- 라이프치히 방송 합창단

- 쿠르트 마주르 /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

 

처음으로 만들어진 연주장에서의 실황 녹음인 이 연주를 들어보면 이전의 스튜디오 녹음에 비해 소리가 퍼지고 울림이 있다. 날카로운 음장감이 죽어서 긴장감이 다소 떨어진다. 하지만 앞서의 두 번째 게반트하우스 울림이 얼마나 좋았는진 잘 모르겠으나, 도이치 샬플라텐의 뛰어난 녹음 실력으로 보아 세 번째의 현대식 연주장 역시 음향학적으로는 안정되고 좋은 울림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연주자체는 확실히 전악장을 관통하여 마주르의 안정된 자연스런 흐름과 뛰어나게 균형이 잡힌 관현악단의 소리가 지속된 긴장감으로 끝까지 관통하는 스튜디오 녹음이 좋다. 그러나 1981년의 실황녹음에는 음장감은 떨어지지만 반대로 이상스런 열기와 흥분감이 느껴진다. 새로이 집을 마련하여 들어간 사람의 마음이랄까...이런 것이 연주에서 느껴진다. 잘 들어보면 연주 자체도 73년 녹음보다 못한 점이 전혀 없다. 다만, 큰 홀에서의 울림 아래 대비감이 떨어지다보니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뿐이다.

 


이 음반은 새로운 게반트하우스에서의 기념비적인 최초녹음이란 역사성 뿐만 아니라 결합된 지그프리트 틸레의 희소성 있는 음악과 함께 마주르와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이 내놓은 또하나의 괜찮은 연주로서도 손색이 없을 음반이다.
 

*** 부 록 ***




[[ 음반 자켓 2면 : 두번째 노이에스 게반트하우스 그림과 다비드 오이스뜨라흐의 축하 자필 편지 ]]



[[ 음반 자켓 4면 : 상단 왼쪽부터 지그프리트 틸러/쿠르트 마주르/베토벤 : 하단은 신축 연주장 객석 ]]




 = 2010. 4. 21 조 희 영  





 

작성 '10/04/21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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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라이프찌히라...제 여동생이 아직도 여기서 살고있습니다. 피아노 배운다고 유학생활하다 거기사는 놈하고 눈맞아가 결혼해서 잘 지낸다고 하더군요...음악생활하는 사람들에겐 늘 가보고 싶어하는 1순위 지역이라고 합니다.
저는 딱 한번 가보긴 했지만 오케스트라 하우스 구경은 못해봤구요, 사진으로 보니 정말 가서 연주회를 들어보고 싶네요.
개인적으로 마주어의 연주 참 좋아합니다. 끈적한 라이프찌히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거기에 시원시원한 연주와 지적인 표현 등은 정말 어떤 지휘자에게서도 맛볼수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에 앞서 콘비츠니의 매니아로써 그가 오래살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죠. 정말 100%신뢰가는 지휘자 중 한명인데 많은 음반을 내지 못하고 급서한게 늘 아쉽습니다. 견고한 탑을 쌓는듯한 논리적이고 깐깐한 그의 음악이 위 사진을 보면서 울려 퍼집니다.
좋은 글 감사드려요...^^

10/04/2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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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

ㅎㅎ 집안사 그런 일이 있으시네요...
저도 연전에 독일을 가봤지만,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에서는 공연도 보고싶고 구경도 하고싶은 마음이 더더욱 심해져옵니다.
콘비츠니와 게반트하우스가 만들었던 베토벤의 교향곡들도 거의 다 가지고 있는데, 말씀대로 100% 신뢰가 가는 연주죠...베토벤의 '정격'연주라 할 수 있습니다. 꼭 들어보시기 바라며, 다들 아시는 긴 서두에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0/04/21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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