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사랑은 음악의 날개를 타고 “지구를 꽃받침으로 핀 꽃” 2회
http://to.goclassic.co.kr/free/9175

 

1987년 1월 10일 토요일

 

3시쯤 울림 음악감상실에 도착했다.

음반지기(DJ) 아가씨는 귀여운 소품 쇼팽 로시니 신데렐라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켜 놓고 리스트 엘레지 1,2번(피아노), 브람스 클라리넷 소나타 1번을 게시판에 적고 들어갔다.

브람스 음악은 처음 울림 갔을 때 신청한 곡이다.

두 곡다 걸작이지만 조금 구석 음악이다.

엘레지는 더 구석 음악이다.

울림지기(DJ) 아가씨도 리스트 피아노 음악을 좋아하는 것인가.

나도 많이 좋아하는데

갑자기 리스트 음악이 듣고 싶어져서 피아노곡만 여러곡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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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트 음악을 몇 곡 신청합니다.

가운데서 부탁드립니다.

 

라 캄파넬라, 사랑의 꿈

3개 연습곡

위로

전설

밤(3개의 장송 송가 가운데)

피아노 소나타

헝가리 광시곡

시적이고 종교적인 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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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캄파넬라, 사랑의 꿈은 FM에도 자주 나오는 음악이고 헝가리 광시곡은 리스트 대표 음악이다. 3개 연습곡 피아노 소나타는 가끔 나온다. 위로는 3번이 잘 연주된다. 나머지는 좋은 곡이지만 리스트를 좋아하지 않으면 잘 듣지 않는 음악이다.

하지만 처음 신청곡처럼 자랑하려고 신청하는 것 같이 생각할 것 같아서 망설이다 신청 하지 않았다.

 

크라이슬러 사랑의 슬픔

고진숙 시 조두남 곡 그리움

바흐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슈만 3개의 로망스 op.94 ♬♬~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이 많아졌다. 나는 숲에 묻힌 듯 편안해 졌다. 아가씨들은 숲속의 새처럼 고운 소리로 재잘거린다. ‘울림’은 울창한 숲 울림이 되었다.

음반지기(DJ) 아가씨가 요한 스트라우스 트리치 트라치 폴카를 켠다. 트리치 트라치는 아낙네들의 수다스런 잡담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다른 음악보다 볼륨을 높여서 켰다. 얘기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리니 이곡이 연상되어서 켜 주는 음악인지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켜주는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 후자의 뜻이 더 큰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얘기 소리가 작아졌다. 참으로 재치가 넘치는 선곡이다. 음악으로 ‘조용히 하세요.’ 말을 다 하다니

다음은 하이든 교향곡 94번 ‘놀람’이다.

조용하게 연주하다가 갑자기 크게 울려 졸고 있는 청중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교향곡이다.

선곡이 참 절묘하다.

크게 떠들지도 말고 졸지도 말라는 것인가.

고전음악 감상실은 보통 얘기하는 게 금기시 되어서 음악이 있고 그 속에 사람이 있는듯한데 ‘울림’은 사람과 음악이 같이 있는 것 같다. 조심 섞여 있는 아가씨들의 얘기 소리와 함께 듣는 음악은 별미다. 울림이 있다.

 

윤해영 시 조두남 곡 선구자

슈베르트 세레나데

모차르트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직

드르들라 추상 ♬♬~

가을에 들으면 제 맛인데 겨울에 들어도 참 좋다.

많이 좋아하는 소품이다.

쓸쓸한 맛이 너무 좋다.

쓸쓸한 맛이 있어서 음악이 좋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맛이다.

마르티니 사랑의 기쁨

랄로 스페인 교향곡

 

밤이 되자 울림은 조용해 졌다.

음악은 반대로 커졌다.(볼륨을 올렸다.)

음악 듣는 사람만 있어서 그런가 보다.

쇼팽 발라드 1번이다.

발라드 1번만 켜 주는 줄 알았는데 명상적인 발라드 4번도 나온다.

모차르트 클라리넷 5중주

황인호 시 윤용하 곡 고독

도나우디 오 나의 사랑하는 님이여

스메타나 나의조국 중 몰다우

쇼팽 즉흥곡 1번

리스트의 시적이고 종교적인 선율 가운데 7번 장송곡 ♬♬~

아까 리스트 음악을 신청할 걸 아쉬워진다.

나도 좋아 한다고 자세를 바르게 해서 들었다.

내가 열심히 듣고 있어서인지 이어서 리스트 밤을 켜 준다.

울림지기 아가씨도 은근히 음악을 많이 듣는다고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다.

쇼팽과 리스트 음악은 상반된 느낌이 든다.

쇼팽은 술술 나온 것 같고 리스트는 애써 만든 것 같다.

리스트 만년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소리에서 관념 같은 게 느껴진다.

 

 

1월 13일 화요일

 

저녁에 ‘울림’ 갔다.

울림 아저씨 친구분이 왔다.

나처럼 두꺼운 뿔테안경이다.

내 바로 앞자리에 앉았다.

울림지기(DJ) 아가씨는 게시판에 바흐 음악의 헌정을 적고 카운터로 간다.

울림지기 아가씨는 대곡을 켜 놓고 밖에 나와 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카운터(계산대와 차 만드는 곳)에서 놀거나 입구자리에 앉아 있다.

음악의 헌정은 울림 아저씨 친구 안경 아저씨 신청음악이다. 어려운 음악이다.

울림 아저씨가 친구 분 옆에 와 앉았다.

울림지기 아가씨도 잠시 후 내 뒤로 와서 울림 아저씨 옆에 앉는다. 나를 슬쩍 본다.

5분정도 있다가 뮤직박스로 들어가면서 또 엿본다.

음악의 헌정푸가의 기법과 더불어 바흐 만년의 작품으로 서양 음악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걸작이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우리를 하늘과 맞닿는 높은 산정으로 인도하는 숭고하고 고결한 음악”이라고 했다. 물어 보는 사람도 없지만 한 때 내게 무슨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물맛 같은 바흐라고 말하고 싶은 때도 있었는데

 

석호 시 조두남 곡 뱃노래

슈베르트 세레나데

쇼팽 녹턴 op.27-2 ♬♬~

 

음반지기(DJ) 아가씨는 무대에서 영상음악 보여줄 준비를 한다.

영상음악은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이다.

울림 아저씨 안경 아저씨는 입구 자리에 앉아 있고 울림 아가씨 친구(단임이)가 내 앞 자리에 앉아있다. 울림지기 아가씨는 영상음악을 켜놓고 친구 옆에 앉았다. 내가 잘 볼 수 있도록 모니터가 가리지 않도록 앉아 주었다. 얼굴은 유난히 하얗고 코가 예쁘게 오뚝하다. 머리는 길고 부드러운 파마다. 친구와 얘기하면서 가끔 곁눈으로 나를 본다. 고개를 돌려서 뒤를 보는 척 하면서 나를 보기도 하였다. 웃음과 약간의 수다도 나를 의식해서 하는 행동 같다. 옆 친구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고 얘기도 별로 하지 않는데 울림지기 아가씨만 자꾸 그러니 외로운 내 가슴에 파문이 인다.

 

영상 음악이 끝나고 베토벤 그대를 사랑해가 흐른다.

울림지기 아가씨가 뮤직박스를 나와서 곡 게시판에 파야 사랑은 마술사를 적는다.

뮤직박스에 들어가서는 사랑은 마술사 음반을 정성스럽게 닦는다. 그냥 음반이 아니라고 내게 말하고 싶은 것인가.

사랑의 마술사 음반을 턴테이블에 올리면서도 작은 창으로 나를 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한 듯 얼굴을 돌린다.

베토벤 그대를 사랑해도 그렇고 파야 사랑은 마술사도 나와 무관한 음악이 아닌 것 같다.

앞에 들려준 조두남 뱃노래 슈베르트 세레나데도 그의 사랑 노래였던가.

 

석호 시 조두남 곡 뱃노래

 

푸른 하늘에 물새가 춤춘다.

에야 데야

어서 노 저어라 임 찾아 가자

두둥실 배 띄워 청춘을 싣고서

여기는 황포강 노을이 붉고나

에야 데야

어서 노 저어라 임 찾아 가자

아득한 창파만리 임 계신 곳 어디런가

 

파야 사랑의 마술사는 스페인 안달루시아지방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발레음악이다.

내용은 청춘의 사랑과 맞는 음악도 아니다.

하지만 금방 13곡으로 된 연주용 모음곡 사랑의 마술사가 흘러간다.

8번째 곡 불의 춤은 어느 때 보다 강했다. 알 수 없는 불빛에 진입 하는 것 같았다.

사랑이 마술을 부린 걸까.

베토벤 로망스 2번이 이어진다.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곡을 적으로 나온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적고 들어간다.

이 곡은 쇼팽의 첫사랑이 담겨 있는 음악이다.

특히 2악장은 첫사랑 콘스탄치아에 대한 순정이 녹아있는 연애편지와 같은 곡이다.

쇼팽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슬프게도 난 내 이상형을 발견했어. 최근 반년 동안 매일 밤 그녀 꿈을 꾸었지만, 난 아직 그녀에게 단 한 마디도 건네지 못했어. 그리고 그녀를 그리워하면서 협주곡의 느린 악장(2악장)을 작곡 했어”라고 적고 있다.

내가 울림 와서 한 것이라고는 신청곡 한번 쓰고 다른 사람보다 오래 앉아 있다가 간 것 밖에 없는데

 

 

1월 14일 수요일

 

나도 울림지기 처녀 생각만 난다.

그 사랑의 마술에 걸린 걸까.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대로 안 된다.

참지 못하고 갔다.

노는 사람처럼 보일까 싶어서 저녁이 되어서 갔다.

브루흐 스코틀랜드 환상곡이 흐르고 있었다.

끝나고 박문호 시 김규환 곡 님이 오시는지를 켜준다.

이상해서 뮤직박스 보니 고개를 숙이고 작은 창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서로 얼굴을 돌렸다.

그도 내가 보고 싶어서 혹시나 하여 뮤직박스 작은 창으로 내가 앉던 자리를 수시로 보는 걸까.

이어서 케텔비 목장넘어 들려오는 종소리다.

종소리가 인상적인 곡이다. 종소리는 봄이 멀리서 오는 것 같기도 하다. 이른 봄 FM에 가끔 나오는 곡이다. 차갑고 스산하지만 그 속에 봄이 움트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리라. 이 겨울에 사랑이 움트고 있다고 내게 얘기하고 싶은 걸까.

 

요한 스트라우스 황제

하이든 현악 4중주 황제 ♬♬~

 

나를 띄워주려는 음악인가!

망설이다 두 번째 신청곡을 적었다.

나의 작은 사랑을 담았다.

신청곡은 음악 신청하는 곳 복조리에 담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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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곡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

드보르작 현악4중주 아메리카

모차르트 현악 4중주 불협화음

브람스 클라리넷 5중주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브루크너 교향곡 4번 로맨틱

 

가운데 한곡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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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 교향곡 로맨틱이 제일 먼저 나온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 한곡이 울림지기 아가씨가 날 좋아 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듯했다.

한없이 좋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난다.

사랑은 다가왔지만 키울 수 있는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고 있으니 이 나이가 되도록 아무 것도 이룬 것 없는 내가 많이 원망스러웠다.

그는 수줍은지 숨듯이 앉아있었다.

로맨틱한 음악도 아닌데 내내 로맨틱하였다.

이렇게 로맨틱한 음악도 없는 것 같다.

끝나고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무도회가 이어진다.

나를 사랑한다고 방점을 찍는 것 같다.

 

드보르작 아메리카는 제일 유명한 애통한 2악장은 들려주지 않고 가장 경쾌한 4악장을 켜 준다.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도 시적이고 감미로운 3악장만 켜준다.

모차르트 불협화음은 켜질 않았다.

쓸쓸한 브람스 클라리넷 5중주도 켜주지 않았다.

부정적인 것은 싫은가 보다.

이렇게 예민하게 음악을 켜 줄줄은 몰랐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앉아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장수철 시 김대현 곡 들국화가 이어진다.

 

흰구름이 떠도는 가을 언덕에

한떨기 들국화가 피고 있는데

그 누구를 남몰래 사모하기에

오늘도 가련하게 구름만 돈다.

 

노래가 그의 사랑 고백처럼 내 몸에 들어와 몽롱하게 한다.

내가 평범만 했더라도 답으로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뛸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

 

우리네 세레나데 같은 이은상 시 현제명 곡 그 집 앞을 신청하였을 텐데

이어 슈베르트 로자문데간주곡이다.

선율이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답구나.

슈베르트도 이 주제를 좋아해서 현악4중주, 즉흥곡에도 전용하고 있다.

대곡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황제다.

또 황제!!

집에서 들을 때는 역시 피아노 협주곡의 황제라 할 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가 들려주는 ‘황제’를 들으니 울림 음악 감상실이 궁전 같다. 나는 황제 된 것처럼 좋다. 그는 무엇을 하는가 궁금해서 뮤직박스를 보니 다소곳이 앉아 있다. 그도 나처럼 울림이 궁전 같을까. 왕비가 된 기분일까

황제 답으로 하이든 교향곡 85번 왕비를 신청 했으면 정말 좋아했겠지.

 

오늘은 차 도우미 아가씨가 말도 않았는데 따뜻한 물을 세 번이나 갖다 주었다.

어느새 차 도우미 아가씨도 날 알아본다.

9시 반쯤 나오는데 카운터에 차도우미 울림아저씨 그 세 사람이 있었다.

차도우미 아가씨가 미소를 지으며 잘 가라고 인사를 해준다. 울림 아저씨도 “잘 가세요” 인사를 건넸다. 그는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일기장에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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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나는 그에게 구속되었다.

억울해서 따졌다.

나 : 왜 나를 구속했나요?

그 : 무심한 사람

왜 울림 왔나요.

나 : 음악 들으러 왔을 뿐입니다.

그게 죄가 되나요?

그 : 그 때문에

내 가슴이 진분홍으로 탔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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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8일 일요일

 

울림 앞에 내리니 2시쯤 되었다.

계단을 올라 3층 울림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가 문 입구 자리(끝줄 끝자리 마주 보고 있는 4자리)에 앉아 있다. 문 여는 소리에 그가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본다. 반사적으로 서로 얼굴을 돌렸다. 나를 기다리고 있은 걸까.

 

울림에 내 자리도 생겼다.

내 자리는 출입문에서 좌회전해서 카운터 앞을 지나 휴게실 입구 앞에서 다시 우회전해서 2줄과 3줄 사이로 직진 3줄 앞에서 2번째 자리다. 좌우 스피커와는 정삼각형 꼭짓점에 해당하는 자리다. 내 자리 우측 바로 뒤에 공간 복판에 있는 큰 사각기둥이 느티나무처럼 편하게 감싸 준다. 앉으면 2시 방향으로 뮤직박스가 있고 작은 창속으로 턴테이블이 돌아간다. 그 얼굴은 고개를 숙여 턴테이블 음반에 바늘을 올릴 때만 볼 수 있다.

 

바그너 입장 행진곡과 합창이다.

숭고하고 장엄한 음악이다.

화려하게 울려 퍼지는 트럼펫 소리가 몸을 짜릿하게 한다.

이어서 우아하고 달콤한 슈만 3개의 로망스 op.94-2다.

3곡 중에 op.94-2가 가장 로망스 같다.

그래서 이곡만 켜주는 것인가.

큰 곡은 하이든 첼로 협주곡 1번

하이든 첼로 협주곡 1번 1악장도 화려하지 않는 작은 입장음악 같다.

마음도 몸도 따라 경쾌해 진다.

세상에 어느 악단이 연주를 한들 그가 지금 들려주는 이 맛은 낼 수 있을까.

3악장은 내 몸에 생기를 불어 넣는 것 같다. 보통 내 몸은 탁한 것이 담겨 있는데 그가 아주 간단하게 생생으로 가득 담아 주었다.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쇼팽 녹턴 op.15-2

드보르작 현을 위한 세레나데 ♬♬~

계속 사랑이 담긴 음악이다.

음악이 달다.

이를 때는 음악은 귀로 먹는 음식 같다.

하지만 나는 무표정으로 있었다.

그에게 세레나데 한곡만 신청해도 더없이 좋아 할 텐데

요한 스트라우스 안넨 폴카

김동명 시 김동진 곡 수선화

로드리고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 ♬♬~

여전히 앉아만 있었다.

 

저녁 7시쯤 베토벤 교향곡 7번을 영상으로 보여 주었다.

울림 아저씨는 내 앞에 앉아서 보고 있다.

내 앞자리는 맨 앞이라 사람이 잘 앉지는 않지만 좌우 스피커와는 정삼각형 꼭짓점에 가까운 자리이고 조용해서 음악 감상하기는 괜찮은 자리다.

울림지기 처녀는 한 참후 뒤로 돌아와서 아저씨 옆에 와 앉았다.

손을 자주 만지작거린다.

긴장이 되는 건가.

희고 보드라운 참 예쁜 손이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나면 고개를 돌려 보면서 나를 엿본다.

나는 계속 표정 없이 꾸부정 있었다.

음악 조금 듣는 내가 뭐 좋아서

 

봄은 멀었는데 요한 스트라우스 봄의 소리 왈츠가 흐른다.

대곡은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이다.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도 2번처럼 첫사랑이 담겨 있는 음악이다.

쇼팽의 첫사랑을 콘스탄치아는 알지 못했다고 한다.

2악장은 ‘로망스’다.

오늘은 그 짝사랑의 슬픔 같다.

 

 

1월 25일 일요일

 

일주일 만이다.

한주 내내 울림 생각으로 가득했다.

오늘은 일찍 가서 오래도록 앉아 있다가 와야지 좋아 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내 사랑이 아쉽고 안타깝지만 그래도 이런 고운 사랑이 내게 온 걸 고맙게 생각해야겠지. 수련이 더 아름다운 건 흙탕물에 뿌리를 내리고 피기 때문이리라. 우리 사랑도 그와 나의 차이 때문에 더 아름답게 피는지도 모른다. 우리 사랑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미완성으로 끝날지라도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처럼 멋진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울림에 들어서니 말러 교향곡 1번 거인이 흐르고 있다. 내가 올 시간이 되었다고 켜 놓은 곡이리라 착각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는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에도 없다.

음악이 끝나갈 즈음 어디 있다 나왔는지 뮤직박스로 들어가는 그가 보인다.

여지껏 바지 입던 아이가 연한 분홍 스웨터에 긴치마다.

보는 순간 황홀하여진다.

그의 가슴속에 진분홍이 연하게 옷에 배어 나온 걸까.

나는 일주일 만에 왔다고 토라져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수줍어서 숨었다 나온 걸까.

첫곡이 쇼팽의 발라드 3번이다.

이 음악은 연인이 대화하는 것처럼 우아하게 시작된다.

쇼팽 발라드 가운데 즐거운 곡이다.

나는 발라드 선율에 떠 있는데 그가 다음 들려줄 곡을 적으로 뮤직박스에서 나온다. 연분홍 옷을 입은 그가 나타나니 몸에 가는 전율이 인다. 진주 목걸이도 했구나. 곡명을 적으니 긴치마가 흔들려 물결을 이룬다. 내 마음도 따라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어느 때 보다 빠르게 적는다. 글씨가 조금 삐뚤 하다. 분홍옷 입고 내 앞에서 하이든 현악 4중주 세레나데를 적으려니 많이 설레었나!

곡을 적고는 숨듯이 뮤직박스에 들어간다. 잠시 후 되돌아 나온다. 게시판에 두고가야 할 분필을 갖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많이 긴장했나 보다.

 

베를리오즈 환상 교향곡 무도회

하이든 현악 4중주 세레나데 ♬♬~

 

나도 신청곡을 적었다.

그가 알지는 모르지만 연한 분홍사랑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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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곡

 

베토벤 엘리제를 위하여

라벨 볼레로

쇼팽 환상곡

헨델 플루트 소나타

브루흐 콜 니드라이

보로딘 현악 4중주 2번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베를리오즈 이탈리아의 해롤드

브람스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협주곡

칼 오르프 카르미나 부라나

 

가운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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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라벨 볼레로다.

볼레로는 스페인 춤곡이다.

그가 켜주니 꼭 나를 유혹하는 음악 같다.

이어서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18변주다.

우아하면서도 극적이기도한 음악인데

오늘은 그의 세레나데 같다.

신비롭기까지 하다.

석양의 불게 타는 노을도 같구나!

그냥 내 마음을 무장해제 시켜버린다.

다음은 베를리오즈 이탈리아의 해롤드 3악장 세레나데다.

나도 3악장 세레나데 때문에 신청했는데

감미로운 세레나데는 즐거움을 배가한다.

대곡은 브람스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 협주곡이다.

곡 이름이 바이올린과 첼로가 연인처럼 관현악을 배경으로 노는 것 같다. 그도 내 마음을 짐작한 것인가.

보로딘 현악 4중주 2번 3악장도 켜준다.

3악장은 녹턴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2악장도 나온다.

2악장은 로망스다.

그는 내 신청곡에서 사랑의 실을 잘도 뽑아낸다.

쇼팽안단테 스피아나토와 화려한 대 폴로네이즈다.

신청곡 쇼팽 환상곡은 시작이 장송 행진곡풍이라 싫었나 보다.

마무리는 칼 오르프 카르미나 부라나

원시적이기도 한 이 음악은 우리 사랑에 주문을 외는 듯하다.

곡은 서부, 제1부 봄, 제2부 선술집에서, 제3부 사랑의 정원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곡과 끝 곡이 오 운명의 여신이여이다. 긴장감과 역동적인 에너지가 느껴지는 혼성합창곡이다.

우리 사랑은 어떤 운명일까.

 

멘델스존 노래의 날개 위에

오동일 시 김동환 곡 강이 풀리면

비발디 2대의 만돌린을 위한 협주곡 RV 532

크라이슬러 사랑의 기쁨

쇼팽 뱃노래

모차르트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직(세레나데 13번)

유경환 시 박판길 곡 산노을

고진숙 시 조두남 곡 그리움

바흐 브란덴브루크 협주곡 5번

보케리니 미뉴에트

 

그가 켜준 음악이다.

쇼팽 뱃노래에 대해 피아니스트 타우지히는 이렇게 말했다.

“배 위에 앉아 그들 서로의 일만을 생각하는 두 사람의 연인의 극적 대화를 우리에게 말해주려는 것 같다.”

고진숙 시 조두남 곡 그리움은 마음을 아리게 하였다.

역시 우리 노래가 가슴에 와 닿는다.

 

고진숙 시 조두남 곡 그리움

 

기약 없이 떠나가신 그대를 그리며

먼 산위에 흰 구름만 말없이 바라본다.

아 돌아오라 아 못 오시나

오늘도 해는 서산에 걸려 노을만 붉게 타네.

 

귀뚜라미 우는 밤에 언덕을 오르면

초생달도 구름 속에 얼굴을 가리운다.

아 돌아오라 아 못 오시나

이 밤도 나는 그대를 찾아 어둔길 달려가네.

 

9시가 넘어서

정진업 시 조두남 곡 길손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 2악장이 나온다.

대곡은 리스트가 피아노와 관현악으로 편곡한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이다.

직감적으로 내게 ‘방랑자?’라고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이 가면 또 언제 올지도 모르고 어쩌면 방랑자처럼 영원히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켜 주는 곡이리라.

답으로 사랑음악을 신청하고 싶었지만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하는 것 같아서 모르는 척 음악만 들었다.

도니제티 사랑의 묘약 중에 네모리노가 부르는 아!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아리아가 생각난다. 소심하고 가난한 농부 네모리노가 지적이고 아름다운 아디나를 바라보면서 자기는 사랑을 호소할 힘이 없음을 슬퍼하는 노래다.

 

아, 어쩌면 저토록 아름다운가!

아, 어쩌면 저토록 귀여운가! 보면 볼수록 더 사랑스럽다

허나 나는 그녀에게 아주 작은 사랑도 불어넣을 수가 없다.

그녀는 책을 읽고 공부하며 지식을 넓혀가고 있다

그녀가 모르는 일이란 없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바보여서 그저 한숨만 쉬고 있을 뿐

그녀는 어쩌면 저토록 귀여울까! 그토록 아름다울까!

작성 '17/10/10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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