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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디: "나부코"
VERDI: Nabucco 
오페라
베르디 오페라와 명반들 3 - 나부코
글쓴이 lhk007날짜 2006년 7월 25일 12시 01분 추천 0조회 9928

아리아보다는 합창으로 더 널리 알려진 오페라 “나부코”는 성서에 나오는 느부가넷살왕과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모두 4막으로 구성된 이 오페라는 그 유명한 합창 “내 마음아 황금빛 날개를 타고”가 잘 알려져 있는데 한국에서는 이 곡을 일반적으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오페라 공연직후 합창의 멜로디는 매우 유명해졌고 이탈리아 독립운동의 열기를 한층 부추긴 곡이기도 하다. 지휘자 쥬세페 시노폴리가 피에로 카푸칠리, 플라시도 도밍과 등과 함께한 도이치그라모폰의 음반(DG 510 412)은 EMI에서 발매된 리카르도 무티의 음반과 함께 좋은 음반으로 손꼽힌다.


DVD

웅장한 무대가 흥미진진함을 더해주는 작품

모진스키 연출이 장대하면서 섬세

굴레기나의 카리스마와 박력은 무대를 압도, 래미도 열창한다.

Verdi - Nabucco / Ramey, Guleghina, Pons, White, Hughes Jones, Deshorties, Levine, Metropolitan Opera

작곡 : 쥬셉페 베르디 - Giuseppe Verdi [1813-1901]

배 경

유대인, 그들은 왜 세계사의 나그네가 되어 온갖 핍박과 환난을 받으며 2000년 동안 유랑해야 했던가? 그 발단이 되었던 유대왕국의 멸망에 대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헤브라이인, 히브리인, 헤브루인 등으로 불리는 유대인(그들 스스로는 이스라엘인이라고 부른다.)은 원래 아라비아 사막에 살던 유목민족이었다. 그들은 농경지를 찾아다녔으나 그 때마다 원주민들에게 박해를 받아 또다시 유랑생활을 했다.

이처럼 서아시아 지방을 떠돌던 유대인들중 일부는 이집트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다른 일부는 팔레스타인 땅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집트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파라오의 박해를 피해 모세의 인도로 대탈출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준 무서운 인내는 유일신 야훼를 믿는 신앙의 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집트를 탈출한 세력과 팔레스타인에 진출했던 세력을 하나로 뭉쳐 마침내 그들의 숙원인 이스라엘 왕국을 가나안 땅에 건설하니, 이것이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이스라엘 국가였다.

이 때가 대략 기원전 11세기 말경으로 추측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 스스로 유대민족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다만 이스라엘인, 또는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불렀으며 본능적인 선민사상, 즉 유일신 하느님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기 전에는 팔레스타인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왕국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두 민족 간에 격렬한 생존권 투쟁을 벌였고,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왕국이 건설됨으로써 두 민족간의 갈등의 씨앗을 잉태하였다.

종교연합 형태의 단일민족국가로 출발한 이스라엘은 초대 왕인 사울을 거쳐 제2대 다윗 왕, 제3대 솔로몬 왕 때에 이르러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다. 특히 '지혜의 왕' 이라고 불리던 솔로몬의 치적으로 이루어진 융성함은 지중해 지역에 크게 떨칠 정도였다. 다윗 왕의 아들이기도 한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설함으로써 이곳을 신앙의 성지로 만들었고, 그 전통은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그러나 솔로몬의 죽음에 따라 그 영화도 점차 빛을 잃어 갔다. 그러더니 솔로몬의 아들 로호보암 때 이르러 마침내 왕국은 남북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북쪽은 이스라엘 왕국이란 호칭을 그대로 존속시켰으나 남쪽은 유대왕국이란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유대인, 유대민족, 유대국가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인과 유대인은 본시 한 뿌리인 단일민족이며 그 결속력에서도 서로 다르지가 않다. 다만 왕국의 분열로 인한 호칭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이스라엘 왕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그 남쪽을 유대왕국이라고 칭하던 무렵의 주변 사정을 함께 떠올려 보아야 한다. 유대 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인을 다시 한번 유랑의 길로 내몰아버린 강력한 고대국가 바빌로니아를 말하지 않고서는 유대왕국 멸망 사를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구상에 최초의 문명을 탄생시켰던 메소포타미아 문명 건설의 주역들이 수메르 인이고, 그 흐름을 이어 받아 건설한 나라가 바빌로니아다. 흔히 '비옥한 초승달 지역' 이라고 부르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기름진 충적지대, 이 둔덕진 벌판이 곧 바빌로니아가 탄생하였고 멸망했던 역사의 터전이다.

오늘날의 이라크가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영토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고대왕국의 중심도시가 바빌론(Babylon)이다. 바빌론이야말로 세계 '7대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공중정원이 있던 도시요, 인간의 허욕이 하늘을 찌를 듯 오만했던 바벨탑이 쌓여진 도시이다. 이 바빌론을 중심으로 흥성했던 고대 바빌로니아 제1왕조와, 그 뒤를 이어 다시 건국한 신 바빌로니아의 발전상이 곧 유대왕국의 멸망과 맞물리고 있는 것이다.

함무라비 왕 때 최대의 융성기를 맞았던 바빌로니아의 세력은 멀리 팔레스타인지방까지 미쳐 유대 땅과 맞닿게 되었다. 저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을 완성시켜 고대사회로는 가장 발달된 사회제도를 탄생시켰던 바빌로니아도 기원전 9세기경에 앗시리아의 침입을 받아 멸망하고 말았다.

치수사업과 설형문자를 인류유산으로 남겨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바빌로니아. 그러나 이 발달된 왕국의 숨결이 그대로 멈추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기원전 6세기경에 이르러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앗사리아는 다시 주변 여러 나라 이민족들의 침입을 자주 받아 근본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칼데아인에 의해서 흡수. 통합되어 새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바빌로니아를 이어받은 신 바빌로니아 왕국이다. 이 신흥왕국이 유대왕국을 멸망시킨 나라로서, 그 탄생 배경과 시대적 상황이 이스라엘 왕국의 분리와 유대왕국의 탄생이라는 시대상황과 엇비슷하게 맞물려 있다.

신 바빌로니아를 가장 강력한 왕국으로 다져 놓은 장본인이 네부카드네자르 왕(성경에는 느부갓네살로 표기됨)이다. 흔히 '나부코'라고도 불리는 이 절대군주의 등장과 더불어 유대왕국 침략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네부카네자르 통치 시대에 신 바빌로니아는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 이었다. 그는 기원전 605년에서 562년에 이르는 43년간의 통치시대를 이끌며 신 바빌로니아의 영광을 구가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 바빌로니아 측에서 바라본 기록일 뿐, 유대인의 관점에서 네부카네자르의 위상은 결코 그렇지가 못하다. 이 강력한 군주가 유태인 2000년 유랑의 뼈아픈 역사를 가져다 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네부카드네자르는 어떻게 유대 왕국을 멸망시켰는가. 그는 신 바빌로니아 왕국을 세웠던 나보포라 왕의 뒤를 이어 등극한 제2대 왕이었다. 그가 왕위에 등극한 기원전 604년부터 시작된 주변 침략의 역사는 3년 뒤인 기원전 601년의 유대 침략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시리아를 점령한 네부카드네자르는 기원전 601년, 유대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상층계급에 속하는 지도자들을 사로잡아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이것을 유대인들의 '제1차 포로' 라고 한다.

침략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기원전 586년에 감행된 제2차 유대 공격 때에는 더욱 철저한 파괴행위를 자행했다. 유대왕국은 시드기야 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신 바빌로니아 군사들의 침략을 받자 여리고 땅으로 피신했다가 거기서 붙잡혀 두 눈을 빼앗기는 참혹한 고통을 당했다. 유대왕국 최후의 왕이기도 한 시드기야의 비극은 유대의 비극을 증언하는 상징으로서 지금도 유대인들을 눈물짓게 만들고 있다. 이 때에도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또다시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강제이주 당하고 말았다. 이것을 유대인의 제 2차 포로라고 부른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기원전 582년에 들어서자 세 번째 유대공격을 감행했다. 이 3차 공격 때에는 예루살렘뿐만이 아니라 유대 나라의 모든 고도들이 완전 파괴되기에 이르렀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붙잡혀 갔다. 이것을 유대인의 제 3차 포로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실상 이것으로 유대왕국은 멸망되고 말았다.

국토는 유린되고 주민들은 포로가 되어 적국의 수도 바빌론에 강제 이주 당했으니, 그 참담한 폐허는 구약성서 <에레미야>에 기록된 그대로다.

네부카드네자르의 집중공격을 받고 폐허가 되었던 예루살렘. 기원전 601년에서 시작되어 20여 년간에 왕국의 멸망을 지켜보았고 유대인이 포로가 되어 적국 바빌론으로 붙잡혀간 민족의 한을 지켜보았던 이 고대 도시로 눈길을 돌린 오페라 작곡가가 있었다. 주세페 베르디가 그 사람이다.

작곡 과정

오페라 <나부코>! 베르디를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다. 베르디는 이스라엘 역사에 일대 타격을 가했던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침략, 포로, 멸망의 역사를 오페라로 작곡했다. 그것은 베르디에게 최초의 성공을 가져다 준 걸작이자 그의 세 번째 오페라 작품에 해당되는 <나부코>다.

여기서 <나부코>는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이름을 이탈리아식으로 줄여서 부른 것이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나부코'로 표기하기로 한다.

베르디가 오페라 <나부코>를 작곡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순전히 스칼라 극장의 지배인으로 있던 바르톨로메 메렐리의 집요한 설득덕분이었다. 당시 베르디는 1840년에 초연한 그의 두 번째 오페라 <하루만의 임금님>의 완전한 실패로 실의에 빠져 있었다. 이 때 메렐리는 나부코 왕의 행적을 오페라 대본으로 만든 이탈리아 사람 솔레라의 작품을 들고 베르디에게 접근했다. 이 대본에 강렬한 애착을 느끼고 있던 메렐리는 처음에 오토 니콜라이(빈 필하모니의 창립자)에게 작곡을 의뢰했다가 거부당한 적이 있지만, 이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베르디를 찾았던 것이다.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오페라 대본을 받아든 베르디는 이 대본을 읽어본 후 의욕을 되찾아 작곡의 붓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1841년 말경에는 전곡을 완성하여 메렐리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베르디가 이 오페라에 푹 빠지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당시의 북이탈리아 사정이 오스트리아의 압제를 물리치고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전국민적인 애국운동으로 온통 술렁거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민족의식과 자유의지에의 열망이 베르디의 오페라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중 <나부코>의 대본을 읽고 완전히 매혹 당해 버린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과 환난, 그런 중에서도 민족의식과 신앙을 잃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강인한 결속력에 베르디 스스로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재기를 다져야 하는 절대적인 위기상황 속에서 <나부코>를 만났다는 점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메렐리의 끈질긴 설득과 권유가 큰 역할을 했지만 일단 작곡에 손을 댄 베르디는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방대한 스케일과 스펙터클한 무대규모를 마음껏 구사하면서 유대왕국의 멸망에 따른 나부코의 행적을 쫓는 그의 음악 정신은 뜨거운 불꽃을 피어 올리고 있었다. 뒷날 이탈리아의 시인 카루두치는 '패기 넘치는 베르디, 오페라 예술의 첫 고동' 이라고 써서 이러한 그를 찬양하기도 했다.

완성된 오페라 <나부코>는 1842년 3월 9일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에서 감격적인 초연이 이루어졌는데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후 무려 67회나 연속 상연될 정도로 오페라 팬들을 열광시켰는데, 특히 제 3막에서 부르는 '노예들의 합창'은 단번에 이탈리아 국민들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것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북이탈리아 국민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나아가 통일을 이룩하는 큰 힘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1901년 베르디가 죽었을 때 토스카니니가 이 합창을 지휘하여 대 작곡가의 영전에 레퀴엠으로 올려준 것은 또다른 감동으로 남아 있다.

1842년 3월 9일 스칼라 극장에서 <나부코>가 초연 되었을 때 여주인공 역을 노래한 소프라노 가수는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베르디와 가까워진 그녀는, 결국 베르디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다.

이래저래 <나부코>는 베르디의 인생과 예술에 끼친 영향력이 막중했는데, 이 발판이 도약대가 되어 베르디는 19세기 오페라 무대를 휘어잡은 위대한 거장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스트레포니 역시 평생동안 베르디를 뒷바라지하며 아내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으니 <나부코>는 그녀에게 있어서도 결코 가벼이 넘기지 못할 작품일 것이다.

줄거리

베르디의 4막짜리 오페라 <나부코>는 각각의 장면에 맞는 부제가 있다. ('막'대신 '부'를 사용하여 1. 2. 3. 4 부로 나누어지기도 하나 여기서는 편의상 '막'으로 표기한다. )

제1막은 예루살렘 성전, 제2막은 배신, 제3막은 예언, 그리고 마지막 제4막은 '우상파괴' 라는 부제를 붙여 오페라의 아우트라인을 설명해 준다. 즉 제 1막에서만 예루살렘 전투 장면이 나오고 나머지 3장면은 모두 바빌론 궁전과 유프라케스 강변이 그 무대로 설정되어 있다.

제1막

막이 오르면 '신포니아'라고 이름 붙여진 서곡이 연주되고 곧이어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 모습이 장엄한 음악과 함께 소개된다. 여기에 나부코의 딸 페레나가 인질로 잡혀와 있음을 알리고, 곧이어 나부코의 바빌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침공하여 대접전이 벌어진다.

결국 나부코는 예루살렘에 인질로 가있던 페네나를 구출하고 난 뒤에 성전에 불을 지르고 유대왕국의 마지막 숨통을 조인다. 유대나라의 제사장 자칼리아가 불타는 성전 속에서 의연한 모습으로 독전하는 장면과 함께 성도 예루살렘은 나부코 군대에게 여지없이 유린당하고 만다.

제2막

바빌론에 있는 나부코의 왕궁이다.

나부코와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딸 아비가일레는 왕위 쟁탈을 둘러싸고 페네나와 신경전을 벌인다. 거만함과 폭정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받은 나부코가 정신 이상에 걸려 왕권을 지키기 어려운 틈을 타서 그의 딸 아비가일레가 아버지의 왕관을 쟁탈하여 억지로 왕좌에 앉는다.

제3막

제3막은 두 장면으로 나누어진다.

첫 장면은 바빌론 왕궁의 옥상 정원이다. 정신상태가 이상해진 나부코는 왕좌에 앉아 있는 아비가일레를 보고 놀란다. 아비가일레는 이에 개의치 않고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페네나를 처형할 것을 명한다.

두 번째 장면은 유프라테스 강변이다. 노예로 잡혀온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면서 유명한 '노예들의 합창' 을 부른다. 간절하고 숙연한 마음으로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 라고 노래하는 '노예들의 합창'에는 조국에 대한 열망이 절박하게 표출되고 있다. 이탈리아 국민들이 열광했던 장면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제4막

다시 나부코의 왕궁이다.

아비가일레는 나부코를 작은 방에 감금하여 놓고 노예들과 페네나를 형장으로 끌어낸다. 이 광경을 목격한 나부코는 자신도 모르게 "유대의 신이여 ! " 라고 외치면서 유대의 신을 모욕한 자신의 죄를 뉘우친다.

이 때 나부코는 다시 정신상태가 맑아 지는 듯 하지만 완전한 상태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왕궁 옥상의 정원으로 장면이 바뀌어 사형장으로 끌려나와 처형당하기를 기다리는 노예들과 페네나가 보인다.

그러나 페네나의 마음은 평온하여 "하늘은 열렸도다." 라고 노래한다.

이 때 나부코와 그의 심복 아브달로가 병사들을 이끌고 사형장에 도착하여 사형을 중지시키고 바빌론의 우상을 파괴해 버린다. 그리고 "히브리 사람들이여 조국으로 돌아가 유대 신전을 다시 세우라" 고 말한다.

노예들은 나부코를 향하여 "위대한 야훼여" 라고 외친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아비가일레는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칼리아는 나부코에게 "야훼를 받들어 모시는 당신이야말로 왕중의 왕이로소이다."라고 하면서 무릎을 꿇는다.

노예들과 신하들은 다같이 나부코를 찬양하는 합창을 부르면서 오페라는 막이 내린다.

양한규님의 허락을 받고 기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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